제목 | 2020년 8월 18일[(녹)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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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8-18 | 조회수1,68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8월 18일 화요일 [(녹)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제1독서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말씀입니다. 28,1-10 티로의 군주에게 말하여라.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더 지혜로워 어떤 비밀도 너에게는 심오하지 않다.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다. 하여 재산을 늘리고는 그 재산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졌다. 이렇게 말한다. 너는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가장 잔혹한 민족들을 너에게 끌어들이리니 그들이 칼을 빼 들어 네 지혜로 이룬 아름다운 것들을 치고 8 너를 구덩이로 내던지리라. 무참한 죽음을 맞이하리라. 네가 감히 ′나는 신이다.′ 할 수 있겠느냐? 너는 너를 살해하는 자들의 손에 달린 사람일 뿐이지 신이 아니다. 넘겨져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죽음을 맞이하리라. 주 하느님의 말이다.’” 화답송 신명 32,26-27.28과 30. 35ㄷㄹ과 36ㄷㄹ(◎ 39ㄷ) “그들을 산산조각 내고, 사람들에게서 그들의 기억을 지워 버리리라.” 그러나 원수가 뽐낼까 보아, “우리 손이 더 강하였다. 이 모든 것을 한 이는 주님이 아니다.” 이렇게 적들이 착각할까 보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슬기가 없는 자들이다. 바위이신 분이 그들을 팔아 버리지 않으신다면, 주님이 그들을 넘겨주지 않으신다면, 어찌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을 수 있으며, 두 사람이 만 명을 몰아낼 수 있으랴?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재난이 삽시간에 닥친다. 주님은 당신 백성의 권리를 감싸 주시며, 당신 종들을 가엾이 여기시리라. ◎ 나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복음 환호송 2코린 8,9 참조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도 그 가난으로 부유해지게 하셨네. 복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복음입니다. 19,23-30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형제나 자매,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영성체송 시편 130(129),7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오늘의 묵상 어제의 복음과 바로 이어지는 오늘 복음의 내용도 ‘부’에 관한 것입니다. 젊은이가 떠난 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는 비유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십니다. 대하여 알아들으려면 산상 설교의 시작인 행복 선언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그러나 마태오와 달리 루카는 같은 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루카 6,20 참조). 그리고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마태 5,6)라고 말하는 마태오와 다르게 루카는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루카 6,21) 이라고 언급합니다. 곧 루카는 실재적으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행복을 선언합니다.이렇게 차이를 보이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마태오가 복음을 전하려던 교회는 루카가 속하였던 교회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주류였습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신자들에게 하느님 보시기에 참된 부자가 무엇인지를 강조하여 가르치려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마태오가 이처럼 윤리적으로 각색한 이유는 교회 안의 부유한 신자들이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제 복음의 젊은이처럼 말입니다. 부자가 아니라 많이 주는 이가 부자라는 사실을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스스로를 부족하다 생각하면서 항상 노력하는 겸손한 사람이 부자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말씀처럼 “완전한 사람”(마태 19,21)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으로 자신의 빈 곳을 채우는 ‘마음이 가난한 이’가 바늘구멍을 온전히 통과할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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