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9월 16일 수요일[(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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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9-16 | 조회수1,84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9월 16일 수요일 [(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고르넬리오 교황은 251년에 교황으로 뽑혀, 로마 박해 시대에 2년 동안의 짧은 교황직을 수행하면서 배교를 선언하였던 신자들을 용서하며 다시 교회로 받아들였다. 그는 이단을 거슬러 교회를 지키다가 유배되어 253년에 순교하였다. 교황과 같은 시대의 목자로서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북아프리카 출신의 그는 늦은 나이에 개종하여 사제품을 받고 훗날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었다. 치프리아노 주교는 박해 속에서도 고르넬리오 교황을 도와 교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258년에 순교하였다. 제1독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서 말씀입니다. 12,31─13,13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견디어 냅니다. 스러지지 않습니다.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화답송 시편 33(32),2-3.4-5.12와 22(◎ 12ㄴ 참조)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고운 가락을 내며 환성 올려라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민족, 그분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당신 자애를 저희에게 베푸소서. ◎ 행복하여라,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백성! 복음 환호송 요한 6,63.68 참조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복음입니다. 7,31-35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하고 너희는 말한다. 와서 먹고 마시자,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영성체송 루카 22,28-30 참조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 오늘의 묵상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들에게 신뢰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사건과 사고들에 대한 판단과 식별도 그때그때 달라지고 뒤틀립니다. 고백하건대, 대개의 판단과 식별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기심으로 그 순수성과 진정성이 퇴색해 가고는 합니다. 한결같았습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다. 그 구원은 모든 이가 화해와 용서 안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세상은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서 늘 함께 계실 것이다.’라고 요약되는 복음의 가르침은 이제껏 달라진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해석에서 비롯합니다. 몇몇 해석들은 타락하여 이단이 되었고, 몇몇 해석들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고도의 수련으로 뻗어 갔습니다. 모든 해석은 어느 정도 제 삶의 가치관과 이해관계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 신앙을 해석하는 방식으로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좋습니다. 어떤 해석이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고유하게 다듬어 온 것이니 좋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대한 단단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이 가꾸어 온 삶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여야 합니다. 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에 물결치듯 흔들리며 기회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단순함이 필요한 것이지요. 자기 삶의 가치관마저 포기하는 비굴함이 세상살이의 당연한 이치로 변질되고 신앙을 지키는 것이 교조주의적 계명 몇 가지를 실천하는 것으로 축소된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부터 회복해야 할 슬픈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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