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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금 나의 신앙은 추락하고 있지는 않은지?
작성자강만연 쪽지 캡슐 작성일2020-09-24 조회수1,353 추천수1 반대(0) 신고

 

지금 두 시간 가량 거침없이 타이핑을 했습니다. 떠오른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요. 오탈자가 많이 있을 겁니다. 수정은 나중에 다시 하겠습니다. 오늘 묵상글은 제 영혼의 진액을 짠 글입니다. 비록 퇴고는 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퇴고를 하지 않은 글이라는 점 널리 양해를 구합니다.

 

순교성월 끝자락에 15킬로그람되는 배낭을 메고 순교자의 삶을 묵상하며 지금의 나의 신앙을 한번 되돌아보기 위해 한티가는길 45.6킬로미터를 걸으려고 새벽 2시에 출발해 출발지인 가실성당을 향해 달려 한 시간 30분을 달려서 도착을 한 후 성당입구 예수님을 향해 십자성호를 걷고 날이 어느 정도 밝아지길 기다렸다. 이번에 완주를 하면 세 번을 하게 되는 셈이다.

 

2년 전에는 23일로 아주 고전을 치렀고 작년엔 한티별빛잔치 때 울트라 코스에 도전한 후 이번에 또 한 번 도전을 하는 것이다. 원래 계획은 12일 일정으로 완주하고 성지에서 하루 일박하고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작년에 한 자매님이 당일치기로 해서 12시간 만에 완주한 기록을 보고서 그 기록에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최근에 이를 위해서 산행을 하고 집에서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묘소까지 도보순례를 통해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목표는 새벽 4시에 가실성당에서 출발해 성지에 오후 4시에 도착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당일 완주를 목표로 한 이유는 단순히 빨리 도착하려고 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촉박한 시간이라는 한계를 설정해서 오직 그분들의 삶과 순교만을 묵상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기 위해서였다. 시간은 네 시가 되었지만 출발하기엔 어두워서 좀 기다리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20분이 지나자 헤드랜턴을 쓰고 출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순례 스탬프를 찍고 드디어 출발을 했다. 성당을 벗어나서 어느 구간까지는 마을과 가로등이 있어서 어려움이 없었지만 실제 순례지로 접어드는 숲길에서는 랜턴 불빛에 의존해서 걸어야만 했다.

 

처음엔 괜찮았지만 시간이 조금씩 흐르면서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약간 두려움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럴수록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함께해 주실 거라는 실낱같은 믿음으로 마음을 다잡아가며 걸었던 게 사실이다. 겨우 겨우 어둠 속에서 리본을 잘 보며 나름 출발을 순조롭게 했었다. 처음에는 작은 생수 2병만 가지고 출발을 하려고 했지만 이 또한 수정을 했다.

 

단순히 마라톤 경기처럼 기록을 세우는 데 의미를 두는 게 아니고 순교자들의 삶을 나름 최대한 느끼고 싶어서 걸으려고 했기 때문에 옹기 무게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무게감을 느껴야 제대로 묵상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40분을 지나니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었다. 일단 5시간을 쉬지 않고 걸었다. 목을 축이기 위해 잠시 쉬며 숨을 고른 후 다시 출발을 했다. 5시간 동안에는 별 다른 묵상이 되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다시 출발을 하면서 묵상을 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떠오른 묵상주제가 명품신앙이라는 게 순간 영감이 왔다. 지금 우리는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 일부는 신앙의 적신호가 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이 생각이 먼저 나도 모르게 떠올랐다.

 

한티성지 순교자들은 원래부터 그곳에서 태어나 살았던 게 아니었다. 박해를 피해 숨어 살면서 교우촌이 형성되면서 살았고 그곳에서 순교를 하고 묻힌 곳이다. 한티성지의 대표적인 슬로건이 이곳은 순교자들이 살고 죽고 묻힌 곳이라는 표어이다. 이 표어를 볼 때마다 나의 가슴은 저미어온다. 한 장소에서 사람의 일생이 다 녹아 있는 곳이라서 그런 것 같다.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버릴 수가 있었을까?

 

그때 그들이 성사와 미사 참례를 하기 위해 한티에서 신나무골 성지까지 오가며 때로 가실성당까지 100리가 넘는 거리를 오가며 신앙생활을 한 모습을 묵상하면서 든 생각이 지금 시대의 신앙은 은총이 거저 주어지는 신앙인데도 그냥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신앙인데도 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지 못하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다는 생각을 머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신앙이 변변치 못한 나 자신의 믿음에서 봤을 때도 이런 것이다. 요즘 시대는 동네마다 성당이 없는 곳이 없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가 있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특히나 10월이 되면 순교성월이라 가까운 성지를 찾아 순례를 하며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가슴에 담으려고 열심한 신자는 그런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나 자신을 포함해 우리가 평소 고백했던 순교성월기도나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해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 될 것 같다. 그 고백이 허공에 한 알멩이 없는 고백은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다. 솔직히 순교자들이라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다는 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담대히 하느님께 바칠 수가 있었을까?

 

우리는 순교는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순교가 한순간에 이루어진다면 순교의 진정한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순교자들이 마지막에 자신의 생명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담대히 바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일상의 생활 속 믿음에서 자신을 죽이는 순교의 삶을 수도 없이 연습을 했기 때문에 그 연습이 순교라는 죽음의 두려움도 이길 수가 있었기에 피를 흘릴 수 있었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한 분야에 배터랑인 사람이 처음부터 베테랑인 게 아닐 것이다. 처음엔 누구나 다 초보 견습생인 것이다.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혼신의 열을 다해 구슬땀을 흘린 결과물이 가져다주는 명예가 베테랑인 것이다.

 

한티가는순례길의 마지막 최고의 정점은 순교자들이 묻힌 곳을 순례하며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곳에는 무명순교자의 무덤이 대부분이다. 무명순교자라는 말이 조금 이상한 면이 있지 않은가? 말그대로 보면 이름없는 순교자라는 의미일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상한 면이 있다. 이 세상 누구나 사람은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을 가지게 된다. 하물며 천한 신분을 가진 천민도 하다 못해 천한 이름이라도 가지는 게 정상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이름없는 순교자라는 말보다 더 정확한 의미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순교자였다고 하는 게 이치적으로 타당한 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이번에 무명순교자 묘소를 모두 지나면서 그들이 무언으로 마치 이런 말을 나에게 하시지 않을까? “나의 이름은 하늘나라에 있다오.”하고 말이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분들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자신들을 향해서 무명순교자라고 부르는 호칭도 사치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분들은 그들의 이름이 이 지상에서 순교자라는 이름으로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전혀 섭섭한 생각을 가지시지 않을 거라고 본다. 그분들이 만약 그런 생각에 얽매였다면 과연 순교를 할 수가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 지상의 삶 속에서 남는 의미는 다 부질없는 이름이고 오직 그분들이 사모했던 것은 천주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쳐 피흘린 순교자라는 이름이 하늘나라 대전에 영원히 남게 될 이름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의 신앙은 어떤가? 세상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세상말처럼 인간은 이름을 남기는 것처럼 뭔가 드러내고 싶은 본능이 있다. 비단 이름만 그런 게 아니다. 명예, 선행, 자선, 자비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다. 이런 인간의 본성 때문에 오죽하면 성경에 자선을 숨겨두라고 하셨을까?

 

순교자들은 몸은 비록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았지만 눈은 천국을 향해 영원을 사모했던 것이다.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언젠가 사라지고 말 이 지상의 삶에 미련을 가지고 살고는 있지는 않은지 한번 자신을 진심으로 되돌아보며 성찰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같은 물건이면 이왕이면 명품이 있다면 명품을 선호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신앙도 명품신앙, 짝퉁신앙으로 나눈다면 과연 그 기준이 무엇일까를 한번 고민해보고 싶다. 그 기준의 잣대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이 생각하기엔 최우선은 하느님과 자신 사이에 형성된 신뢰관계라고 생각한다.

 

인간 세상에서 신뢰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명예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명예라는 것도 자신의 이름에 대해 대중이 부여하는 신뢰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신뢰가 마치 자신의 생명과 동급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신뢰는 생명과 동일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한낱 인간 세상에서도 신뢰를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하물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신뢰관계는 두 말 해서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원래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형성되었지만 부모님의 명하신 말씀에 신뢰를 하지 못해 죄를 짖게 되는 결과가 벌어졌던 것이다. 말 그대로 부모와 자식이라는 신분관계의 설정이 파기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사람이라는 생명체는 죄의 결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으로 죽음에서 건져내주셨다. 우리는 그런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임을 알고 또한 그분의 피 흘림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원래 영원한 생명을 누렸던 존재로 다시 되돌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삶을 뒤따라가겠다는 전제 하에 세례를 통해 다시 우리는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재설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은혜는 망극하기 이를 데 없는 은혜이다. 사람도 세상에 남남으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으면 그 어떤 외부의 시련이 닥쳐도 부부라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게 인생사인데 하물며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인 우리 사이에 그런 은혜를 망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사태가 어떤가? 팬데믹이라는 세계적인 대유행병으로 우리는 우리 신앙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난 현실을 보게 된다. 이로 인해 신앙의 뿌리가 얼마나 또 약한지를 알 수가 있다. 원래 신앙인에게는 평상시에는 믿음과 신앙의 정도를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예외 없이 그 사람의 신앙은 시련과 위기가 닥쳤을 때 그 난국을 대처하는 자세에서 신앙과 믿음이 강한 믿음인지 약한 믿음인지 드러나기 마련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우리는 지금의 시간이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견고한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될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시험대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대로 이어지는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참으로 쉽지 않은 고민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세상 모든 교착상태에 있는 일을 해결할 때 가장 큰 대원칙 중 하나가 바로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될 것이다. 그 기본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바로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깨어 있는 것이다. 육신은 졸거나 잠을 잔다고 해서 그 피해가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영혼은 이와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영혼이 졸거나 잠을 잔다고 한다면 이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면제를 섭취한 것과 같다고 본다. 만약 자신이 이 수면제를 섭취했다고 상상을 한다면 화들짝 정신이 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잠시 졸 수는 있으되 잠은 자서는 안 되는 시기라는 걸 실감해야 할 때라는 게 절실히 피부에 와 닿는다는 걸 솔직히 고백하고 싶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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