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0.09.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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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09-28 | 조회수1,639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20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욥 1,6-22 6 하루는 하느님의 아들들이 모여 와 주님 앞에 섰다. 사탄도 그들과 함께 왔다. 7 주님께서 사탄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 사탄이 주님께 “땅을 여기저기 두루 돌아다니다가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8 주님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 9 이에 사탄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이 까닭 없이 하느님을 경외하겠습니까? 10 당신께서 몸소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으로 울타리 쳐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내리셔서, 그의 재산이 땅 위에 넘쳐 나지 않습니까? 11 그렇지만 당신께서 손을 펴시어 그의 모든 소유를 쳐 보십시오. 그는 틀림없이 당신을 눈앞에서 저주할 것입니다.” 12 그러자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그의 모든 소유를 네 손에 넘긴다. 다만 그에게는 손을 대지 마라.” 이에 사탄은 주님 앞에서 물러갔다. 13 하루는 욥의 아들딸들이 맏형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다. 14 그런데 심부름꾼 하나가 욥에게 와서 아뢰었다. “소들은 밭을 갈고 암나귀들은 그 부근에서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15 그런데 스바인들이 들이닥쳐 그것들을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6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하느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 양 떼와 머슴들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7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칼데아인들이 세 무리를 지어 낙타들을 덮쳐 약탈하고 머슴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18 그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른 이가 와서 아뢰었다. “나리의 아드님들과 따님들이 큰아드님 댁에서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19 그런데 사막 건너편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그 집 네 모서리를 치자, 자제분들 위로 집이 무너져 내려 모두 죽었습니다.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 20 그러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21 말하였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22 이 모든 일을 당하고도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 복음 루카 9,46-50 그때에 46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났다. 47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신 다음, 48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49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와 함께 스승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서울 대학교 병원에서 스트레스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연구진은 같은 환경에서 양육된 실험용 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서 한 집단에는 2분마다 전기 충격을 주고, 또 다른 집단은 유리창 건너편에서 맞은 편 고통 받는 쥐를 관찰하도록 배치했습니다. 열여섯 시간 동안 실험을 진행하며 쥐들은 480회의 전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탈진한 쥐는 전기 충격을 받은 쥐가 아니라 이 고통을 관찰할 수밖에 없었던 쥐였다고 합니다. 유리창 너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과 스트레스를 느꼈고,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무력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보다 고통을 바라보는 사람의 아픔이 더 큽니다. 그런데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은 그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오랜 병으로 힘들어하는 환자와 그 가족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고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정도로 무시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을 이겨낼 힘은 무엇일까요? 함께 하는 것입니다. 고통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하는 마음보다는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과연 마음이 편안할까요? 더 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육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십니다. 사실 다투게 되면 절대로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그 다툼의 이유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더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답게 어린아이를 그들 앞에 본보기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어린이까지 받아들여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눈높이를 낮춰야지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린이의 행동과 어린이의 말을 따라 하게 되지요. 어린이 앞에서는 세상의 체면이나 명예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낮춰서 함께 하는 사람만이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은 ‘혼자’가 아닙니다. 자신을 낮춰서 누구든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면서, 지금을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생텍쥐페리)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사는 방법. 강의 부탁을 받으면 아무리 멀고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해외에도 또 사람이 없는 시골 본당에 가서도 강의를 해왔습니다. 저를 불러주시는 것에 감사하면서, 지금까지 거부하지 않고 기쁘게 강의를 해왔습니다. (물론 올해는 코로나19로 거의 강의를 못 했습니다) 그런데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강의 청탁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준 높은 강의를 들어 온 신학생에게 어떤 깨달음을 줄 수 있을까? 부족한 저의 강의를 들어는 줄까? 등의 생각으로 강의를 하겠다고 마지못해 허락했지만, 불안을 멈추기가 힘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별것 아닌 것이 됩니다. 스티브 프레스필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 내면에 있는 살지 않은 삶. 이 둘 사이에는 저항이라는 게 버티고 있다.” 저항을 부숴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대전교구 진산성지 모자상)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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