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20년 10월 7일 수요일[(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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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0-10-07 | 조회수1,79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0년 10월 7일 수요일 [(백)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16세기 중엽 오스만 제국 (현재의 터키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제국) 은 세력 확장을 위하여 유럽을 침공하였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다. 제1독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였습니다.> 말씀입니다. 2,1-2.7-14 나는 바르나바와 함께 티토도 데리고 예루살렘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올라갔습니다.그리고 내가 다른 민족들에게 선포하는 복음을 그곳 주요 인사들에게 따로 설명하였습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듯이,내가 할례 받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직을 수행하게 해 주신 분께서, 수행하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케파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는 것을 보고,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화답송 시편 117(116),1.2ㄱㄴ (◎ 마르 16,15 참조)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복음 환호송 로마 8,15 참조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복음입니다. 11,1-4 기도하고 계셨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가르쳐 준 것처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양식을 주시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영성체송 루카 1,31 참조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오늘의 묵상 주님의 기도가 지닌 독특한 점은 예수님 시대 즈음에 유다교 회당에서 바치던 열여덟 청원 기도문(쉐모네 에스레) 이나 고대 근동의 아카드인들이 바치던 양팔 기도문과 비교할 때 잘 드러납니다. 이 두 기도문에는 무엇보다도 신적 존재에 대한 호칭이 다양하게 열거되어 나옵니다. 마치 여러 호칭을 계속 반복하지 않으면 그 신적 존재가 그 기도를 듣지 않을 것처럼 말이지요. 이렇게 다양한 호칭을 사용하는 배경에는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합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임금에게 무엇인가를 청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문들을 지나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어전에서 멀리 떨어져 무릎을 꿇게 되는데, 이때에도 고위 신하가 눈짓으로 허락을 해야 겨우 자기가 청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에게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기도에는 이렇게 엄숙하고 격조 높은 궁정 문화가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한 번만 부르는데, 이마저도 가족 안에서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합니다. 다시 말하여 주님의 기도는 가족과 나누는 친밀하고 편안한 대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보통 가족끼리는 에두르거나 거창한 말로 꾸미지 않고 자기가 바라는 것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입니다. 그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며 그분을 붙잡고 마음 편히 우리의 바람을 아뢸 수 있는 응석받이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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