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바로알기 / 아브라카다브라(내 말대로 되어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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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0-10-12 | 조회수1,79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성경바로알기 2020.10.12.. (공동번역성서) 아브라카다브라(‘내 말대로 되어라!’)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말은 아주 성경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말이죠? 우리는, 자기가 가진 말에 의해서, 종국의 결과를 가지게 된다는 그런 말이에요. 내가 가지고 있는 말이 씨가 되어 무엇을 낳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결국이에요. ‘말이 씨가 된다!’ 우리 주님께서도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죠? 믿음이라는 건 내가 갖고 있는 말씀이에요. ‘그것대로 될 지어다. 너희들이 알아서 한번 마음대로 믿어 봐! 그 믿음대로 되게 해 줄게!’란 말예요. 그걸 히브리어로 옮기면, ‘아브라카다브라’예요. 많이 들어보셨죠? 고대 사람들이 ‘내 말대로 되어라!’라는 그런 소망을 담아서 외우던 주문이었어요. 그게 아람어, 히브리어였단 말예요. 그러나 그 주문은, 아주 무서운 주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말이,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진리의 말이 아닐 때, 그 주문을 외치던 자가 어떻게 되겠어요? ‘내 말대로 되어라!’라고 주물을 외칠 때, 그 사람이 가진 말이, 하느님이 기뻐하는 말이 아닐 때, ‘심판(審判)’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간직하지 못한 자가, ‘아브라카다브라’라고 주문을 외우는 건, 자기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가진 말로 씨를 심어요. 그리고 그 씨에 의해서, 자손을 낳는 거예요. 그 씨가, 곧 우리가 낳을 자손이며, 그래서 ‘씨, 자손, 제라’란 단어를 한 단어로 써요. 그 자손이 우리의 결국(結局)이에요. 그게 ‘나’예요. 이제 영원 속에서의 ‘나!’ 모든 인간은 영생합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영생, 천국에서 영생, 그렇게 갈라질 뿐이에요. 따라서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은 내가 가진 말이, 내가 낳는 후손을 결정한다는 말과 같은 거예요. 그 말! 여러분이 갖고 있는 이 성경 말씀, 다 다르게 듣고 있어요.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그 말, 내가 가진 말에 의해, 여러분은 예수를 낳을 수도 있고, 엉뚱한 걸 낳을 수도 있어요. (고린도후서 11:2) 2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시는 것처럼 나도 염려하는 나머지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순결한 처녀인 여러분을 오직 한 남편 그리스도에게 바치려고 정혼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바치려고’ 이게 ‘파리스테미’ 똑같은 단어예요. ‘의의 무기로 하느님께 드려라’는 말과, ‘정결한 처녀로 남편 그리스도 옆에 서라!’ 이 말과 똑같은 말이란 말예요. 이 단어란 말입니다. 바오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시켜서, 남편이신 그리스도 곁에 세우기 위해, 열심을 내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희 죽을 몸을 의의무기로 드려라!’라는 말은, ‘너희의 그 죽을 몸을, 의의 옷으로 감싸서, 그리스도 옆에 신부로 서라’예요. 그런데 신부가 신랑이 준, 의의 옷이 아닌 자기의 옷을 입고 있으면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갈게 된다, 그러잖아요? 예복 없는 놈은 쫓아내서 이를 갈게 하라 그러잖아요? 밖으로 쫓겨나서 이를 갈게 돼요.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하느님나라 밖으로 쫓겨나서, 이를 간다는 건, 그가 엉뚱한 양식, 양식이 아닌 헛것, 그런데 자기가 양식으로 알고 있었던 걸, 그걸 먹고 나는 살았죠? 라고 하는 자들의 말로를 보여주는 거예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를 간다라는 말은, 입안에서 이가, 먹을 걸 사이에 두게 움직여야 되는데, 먹을 게 없을 땐, 이만 갈게 되죠. 히브리 사람들은 그 때 쓰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식이 없는 이가, 헛것을 양식인 줄 알고 씹는 걸 ‘이를 간다’고 하는 거요. ‘야, 나를 지옥 보내, 이를 간다.’ 이게 아니란 말예요. 따라서 말씀을 자기의 의의 옷을 열심히 준비하는 이들은, 혼인잔치에서 신랑의 곁에 서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나서 영원토록 이를 갈게 되는 거요. 그렇게 신부가 신랑이 선물해 준 의의 옷을 입고, 신랑 곁에 서는 것! 그걸 ‘파리스테미’라 하지요 그걸 히브리어로는 ‘쿰’이라고 해요.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쿰! 그 단어가 신약에서도 히브리어 그대로 옮겨져서 쓰인 곳이 있어요. ‘달리다 쿰’ (마르코복음 5:41-43)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 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 두 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 않았다. 4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먹을 것을 주면 이제, 이를 안 갈게 되겠죠? 예수님께서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시는 장면이에요. 여기서 회당이라고 번역이된 ‘시나고게,’ 이게 교회예요. 회당, 교회! 그러나 가짜 말, 거짓말을 갖고 있는 비 진리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면 돼요. 그거 갖고 있으면 죽어요. 이를 갈아야 돼요. 왜? 그건 헛것이거든요. 못 씹는 거예요. 양식이 아녜요. 그래서 회당장 야이로가 낳은 자손은, 죽은 걸로 나타나야 돼요. 헛된 말! 가짜 말을 갖고 있는 곳의 우두머리가 뭘 낳겠어요? 엉뚱한 씨를 갖고 있는데, 죽음을 낳는 거예요. 그래서 그 열두 살 먹은 딸이, 죽은 시체로 등장하는 거요. (요한묵시록 3:9) 9 사탄의 무리(‘시나고게’)에 속하는 자들이 자칭 유다인이라고 떠들어 대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나와서 네 발 앞에 엎드려 너를 경배하게 하겠으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가짜 말! 진짜 말 아닌 거, 진리의 반대말이에요. 거짓말이! 거짓말을 갖고 있는 자! 이걸 사탄의 교회라 그래요. 그 사탄의 무리! 그것이 시나고게. 그러니까 예수님 당신의 회당은 전부 사탄의 무리였던 거죠. 다 율법주의의 율법을 가르치고 있었으니까. 그럼 거기서 낳는 건 뭐겠어요? 죽음! 그래서 회당장의 딸이 시체로 나오는 거죠. 그런데 그 나이가 열둘이에요. 열둘은 아들의 숫자죠? 이제 크로노스에서 카이로스의 때가 온 거예요. 열둘! 완성의 때!. 그게 카이로스예요. ‘때가 이르렀다.’ 그러죠. 성경에서. 이제 때가 온 거죠. 열둘이에요. 그리스도라는 남편의 신부로 완성이 되는 때가 열둘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남편과 연합이 되어 하나로 연합이 되면, 그 때는 둘이 아니라, 하나로, 진리로 존재하는 때이기 때문에, 고걸 아들이라 그래요. 그 열둘의 때에, 그게 히브리 여자들의 결혼 적령기였어요. 그때부터 결혼할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첫 남자가, 그 시체가 눈을 뜨자마자 그 앞에 딱 서 있는데, 신랑 예수인 거예요. 남편이 찾아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 신부의 상태를 친절하게 설명해 줘요. 고 속에 들어 있는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의 이야기예요. 예수님께서 그 죽어 있던 야이로의 딸에게로 가는 도중에, 열두 해 하혈병(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나타나죠? 하혈병이라는 건, 생명의 실체인, 그 피를, 피는 생명이라 그러잖아요? 성경이, 율법에서도! 그 생명을 담지 못하고. 성경에서 지켜라, 행하라 할 때 그게 다 ‘keep’이에요. 안에다 keep하라는 뜻이지, 지켜 행하라가 아녜요. 그걸 지키지(keep) 못하고 피를 쏟아내면 어떻게 돼요? 죽음이에요. 그래서 율법에서는 여자가 월경을 할 때 부정하다고 하는 게,(월경을 하는 게 더럽다는 말이 아니라, 상징적이란 말예요) 피를 담지 못하고 쏟아내는 걸 부정하다 그래요. 그 하혈병!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았어요. 이제 또 카이로스의 때가 온 거죠. 열둘. 열두 해니까. 그 열두 해 죽어 있던 하혈병 앓던 여인이, 신랑의 옷을 만져요. 그런데 그 옷이 겉옷이란 뜻이라 그랬어요. 겉옷을 만졌어요. ‘히마티온, 겉옷!’ 그 겉옷은 진리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랬습니다. 속옷이 율법이고! 진리의 말씀에 의해, 부정한 여자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서, 아들로 연합이 되는 형국이에요. 그래서 열두 해 하혈병 앓던 여인이 야이로의 딸이에요. 그게 죽은 거예요. 피를 쏟아내니까. 피 없으면 죽은 거라니까요. 그 여자가 진리의 겉옷을 만지자, 그 겉옷이, 예수의 겉옷이 십자가 위에서 군사들에게 주어졌잖아요? 그것처럼 네 조각으로 주어지는 거예요. 4복음으로. 산상수훈에서도 네 가지로 설명해 주잖아요? 주어지면, 그가 그 겉옷을 입고 살아나는 거예요. 피가, 이제 생명이, keep이 되는 거예요. 마태복음에 보면, 그 여자가 진리의 겉옷을 만지자마자, 주님에게서 능력이 나갔다 그래요. 그러면 그 겉옷=능력이란 뜻이죠. 만지자마자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그래요. ‘듀나미스’라는 단어가 ‘능력, 권세’ 이런 걸로 번역이 되는 단어가 있어요. 그런데 ‘엑소시아’는 말씀을 받아 담는 능력을 말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실 때 ‘엑소시아’를 주시는데, ‘듀나미스’도 같이 주시죠? 그걸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말씀을 담을 수 있는 능력, 그 상태를 ‘엑소시아’라 그래요. 그걸 진리로 전하는 걸 ‘듀나미스’라 그래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듀나미스’의 능력을 그 여자에게 주어, ‘엑소시아’의 능력으로, ‘keep’하게 만들어버린 거죠. 그러자 그 여인에게서 나가던 피가, 멈추어버리는 거예요. 생명을 얻는 거죠. 그리고 똑같이 열두 살 먹은 소녀가, 시체로 등장하는 거요. ‘그게 죽은 거야!’를 설명하는 거예요. 생명의 피를 모두 쏟아낸 부정한 여자! 그 앞에 신랑이 나타나요. 결혼 적령기의 신부 앞에 신랑이 나타났는데, 그 신부가 죽은 시체로, 나타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는데, 살려야죠, 신랑이 나타났는데 신부가 죽은 상태로 있네요. 신랑이 이 땅에 오셨어요. 여러분은 다 죽어 있었다니까요. 그런데 결혼을 해야돼. 아들을 만들어야 되는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요? 살려야죠. 먼저 살려내야죠. 그런데 어떻게 살려내요? 말로 살려내요. ‘달리다 쿰!’ 그래요. ‘일어나라!’ 그런단 말예요. ‘소녀야, 일어나라! 내 곁에 서라!’ 이런 뜻이에요. 신랑의 겉옷이 신부에게로 전해지는 거죠. 그게 하혈병에서 설명이 됐잖아요. 말로 살려내는 거죠? 그렇게 신랑의 말이, 신부에게 들려지자, 그 신부가 신랑의 겉옷! 말씀을 입고, 신부로 일어서요. 그렇게 죽어 있던 신부가, 신랑의 겉옷을 입고, 신랑이 선물해 준! 겉옷을 입고 신부로 서는 걸, ‘쿰’이라고 하고, 그 ‘쿰’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단어가 ‘파리스테미’예요. 그 신랑의 겉옷을 입고 그 곁에 서라는 거예요. ‘엉뚱한 옷 입지 마!’ 그러는 거죠. ‘불의의 무기, 불의의 옷, 그것 입자 마!’ 그러는 거예요. 그거 입으면 신랑 곁에 못 선다는 거예요. 쫓겨나서 이를 갈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이 좀 심상찮아요. ‘달리다’예요. ‘달리다!’ 달려라 하니가 아니고 ‘달리다.’ 그 이름은 히브리어 ‘타아래’를 음역한 건데요. 그 ‘타아래’라는 단어가 ‘어린 양’이에요. ‘달리다’가! 어린 양이 죽었다가 살아나는데, 신부가 같이 살아나는 거예요. 그 ‘타아래’라는 단어는 ‘태에라’에서 기인한 단어인데, ‘태에라’가 ‘감싸다, 덮다’예요. 그러니까 단어 속에 복음이 다 들어가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어린 양의 신부인 ‘달리다’는, 어린 양의 겉옷으로 감싸고 덮여서 세운 신부! ‘쿰!’ 선 신부! 이게 ‘달리다 쿰’이에요. 그 단어 안에 성경 전체가 다 들어가 있는 거라고요. 그 신부가 누구예요? ‘달리다 쿰’해서 선 신부가? 열두 살이 되어서 ‘다리다 쿰’으로 완성이 된 신부가 여러분과 저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에게는 먹을 것을 주어라는 거예요. 그는 이제는 이를 갈면 안 돼요. ‘진짜 먹을 것을 주어라.’ 이제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그 ‘파리스테미’의 히브리 단어인 ‘쿰’을 파자하면, ‘코프’와 ‘멤’인데요. ‘코프’가 굉장히 중요한 단어예요.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라는 뜻이 있고요, ‘멤’이 ‘물’이라 그랬죠? 말씀, 물! 그러므로 ‘쿰’은 원래, ‘말씀으로 파괴하고 다시 세움’이란 뜻이에요. ‘쿰, 파리스데미, 옆에 서라!’ 이건 먼저 죽고 다시 살아나야 하는 거예요. 그 단어가 가진 자체의 뜻이. 그 다음은 ‘콜’이라는 단어에서 오는데, 그 단어도 ‘코프’와 ‘라메드’로 파자가 되거든요. ‘코프’는 ‘파괴하고 다시 세우다.’ ‘라메드’는 ‘교훈하다, 가르치다.’ 그러니까 ‘콜’의 원래 뜻은 ‘파괴하고 다시 세운다’라는 뜻이 뭔지를 가르쳐서 알게 하는 것! 이게 ‘콜’이에요. 그걸 알게 하면, ‘쿰’으로 서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단어는 전부 연결이 되어 있다니까. 그 ‘콜’이라는 걸 사전적 의미로, ‘소리, 목소리’라 그래요. 소리라는 건, 파괴하고 다시 세워서, 하느님의 선부로 세우는 걸, 목소리라 그래요. 그러니까 목소리는 무슨 뭐 노래하고 욕하라고 준 게 아니라 그거 하라고 준 거예요. 우리에게. 그런데 엉뚱하게 다 사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걸 ‘도둑질’이예요. 여러분 원래 목소리의 뜻이 그거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그 목소리는 ‘카라’라는 단어를 또 파생하는데, ‘초청하다’예요. 그렇게 ‘부수고 다시 세운다’는 게 뭔지를 알게 해서 (이게 ‘콜’이죠?) 신부로 옆에 다시 세우는 걸, ‘카라, 초청하다’ 그래요. 거기에서 ‘파라칼레토스, 위로하다, 보혜사, 성령’이란 단어가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성령은 여러분을 ‘파괴하고 다시 세워, 하느님의 신부로 옆에 세운다’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서 여러분을 위로하는 게 ‘보혜사’예요. ‘파라칼레토스!’ 그렇게 말씀으로 죽이고, 다시 세워서, 의의 옷을 입혀, 신부로 세우는 것! 이것이 ‘복음을 전하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카라!’ 초청받은 사람들이, 한 사람이라도 그 초청에 응하던가요? 성경을 보면, 한 사람도 안 와요. 예수님이, 신랑이 직접 오셔서 ‘야, 신랑이 왔다,’ 했는데 한 사람도 영접하지 않았다 그래요. 성경이. 단 한 사람도! (마태복음 22:2-14) 2 '하늘 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길 수 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치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 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 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를 보고 12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적다!’ 이 단어는 거의 없다는 뜻이에요. 거의 없다! 왕이 아들이 혼인잔치를 배설(排設)하고 사람들을 초청해요. 그 아들은 물론 그리스도 예수예요. 혼인잔치를 차려놓고 초청하는데, 사람들이 자기 일을 하기 위해 안 온다, 그래요. 여기서 이렇게 기록했지만, 다른 곳에 보면 소도 사야하고, 장가도 가야하고, 장가는 그리스도 예수와 해야 되는 거지, 저희들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걸 간음이라고 하잖아요. 소는 하느님. 성경이 소를 하느님으로 이야기하잖아요. 하느님은 어디 가서 살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런데 소 사러가고 장가가려고 그 혼인잔치에 안 온다니까요.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장가, 내가 생각하는 하느님. 그 하느님의 열심을 부리느라 진짜 혼인잔치에 안 오는 거예요. 그들은 전부 군대를 보내 진멸했죠? 고게 이스라엘이에요. 육적 이스라엘. 유대인. 그러니까 모형이었다니까요. 이스라엘은! 그래서 어떻게 해요? 그 다음부터, 십자가 이후에는 이방인들까지 다, 사실 이스라엘, 이방인 이런 것들은 다 의미가 없어요. 진리를 알게 되면! 뭐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이 되어야 된다는 둥, 요즈음 인터넷에서 회복, 뭐 이래 갖고. 천만의 말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함께 승리한 자예요. 야곱. 가짜 말을 가지고 남을 실족하게 하던 자가 하느님의 은혜로 승리자가 되는 걸 이스라엘이라 그래요. 야곱의 그 후손 70명이 들어갔죠? 그것도 상징적인 숫자예요. 7 곱하기 10. 일부러 그런 숫자를 쓰는 거란 말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70이 들어가서 야곱과 요셉과 그 후손이 다 죽었다 그래요. 다 죽었다! 그리고 요셉을 모르는 왕이라 그랬는데, 진짜 원어를 보면 요셉을 알지 않기로 한 왕, 요셉은 복음을 상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그걸 반대하는 왕! 세상을 그리는 거예요. 애굽은요, 왕이 나타나서 어떻게 했다 그래요?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율법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그리고 라암셋과 신전을 짓게 했다는 거예요. 엉뚱한 성전을 짓게 했다! 다 모형(模型)인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衆多한 잡족이 나오죠. 보세요. 70명이 들어가 430년을 거기에 있었고, 그리고 그들이 막 퍼지기 전에 요셉과 함께 들어간 자가 다 죽었다고 일부러 성경이 기록해 놓은 건, 그들은 그냥 애굽이다라는 뜻이에요. 그리고 그들이 종살이 했다는 건, 여러분, 다 부족국가였을 때, 진짜 강대한 나라가 하나 있었어요. 애굽! 여기에서 성과 신전을 지을 때는, 전 국민이, 노예뿐만 아니라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그 일을 해야 돼요. 그리고 기록에 보면, 그 옆에 그들을 먹이려고 빵굼터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대요. 먹을 것도 잘 줬어요. 그리고 심지어 그런 고대시대 때, 그 큰일, 피라미드, 신전 이런 것 짓는 게 굉장히 큰 일거리였다고요. 노가다들에게. 그래서 용병들이 돈을 많이 줬기 때문에 일부러 그 일을 하러 왔다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그냥 껍데기로만 보고, ‘야, 그들이 거기에 들어가서 고생했어! 종살이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애굽인 우리. 그 모든 게 다 애굽이었는데, 그 많은 무리들(衆多한) 잡족 중에 ‘나와라’ 했을 때 듣고 따라 나온 이들을 이스라엘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무슨 육적 이스라엘. 그러니까 비 진리 쪽에서는 항상 꼼수를 부리죠. 그런 걸 오해하게 말들기 위해 민족적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거요. 그걸로 착각하게! 민족적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그 안에서 여러분과 저를 발견하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 안에 그게 없으니까. 자꾸 밖에서 증거들을 찾아내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거 아무 것도 아녜요. 속지 마세요. 시간을 그런데 쓰지 마세요. 4절을 보면, 왕이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 혼인잔치를 준비했다.’ 그러죠. 그건 나의 소를 잡고 살진 짐승이 아니라, 알곡이라는 단어예요. 살진 짐승과 알곡으로 준비를 해 놓고, 혼인잔치에 초청을 했는데, 아무도 안 와요. 살진 소는, 소를 잡았다는 게 하느님이 자기를 제물로 드렸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알곡, 진짜 양식을 만들어 놓고, 잔치를 차렸는데, 아무도 안 오는 거예요. 그게 뭔지를 모르니까. 하느님의 말씀! 그 부수고 다시 세우는 하늘의 진리를, 처음부터 알아먹는 자가 없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임금은 자격조건을 막론하고 선한 자, 악한 자 구별 없이, 오로지 당신의 자비로만 불러요. ‘가서 불러 와!’ 하느님이 자비응 베푼 자만 오는 거예요. 선한 자, 악한 자 구별 없이. 천국은 그렇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길을 가다가, 불현 듯 받은 초청장에 의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상식적으로 거기에 온 사람들이 예복을 준비해 오는 게 맞아요? 그냥 오는 게 맞아요? 아니 찬치에 가려고 생각도 안 하고 길 가다가 불려 왔는데, 무슨 예복을 준비하느냐고요? 그 예복은 누가 준 거다? 주인이! 임금이 준 거예요. 그리고 고대시대 때는 진짜로 잔치에 오면 주인이 앞에서 예복을 나눠 줬어요. 하나씩. 겉에 입으라고. 그거 안 입으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임금이, 불현 듯 초청장을 받고 온 사람들에게서 예복을 찾잖아요? 내가 예복 안 줬는데 여기에 들어와서, ‘나는 하느님나라의 이 혼인잔치에 합당하다고 하는 놈들이 누구야?’ 찾아다니는 거예요. 내가 말씀도, 진리도 안 줬는데 자기들이 루이비똥 같은 것 입고 ‘이거 괜찮지 않아요?’ 이런 놈이 누군지 찾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내죠. 찾아내서, ‘얘는 밖으로 쫓아내라!’ 왜? 내가 준비한 이 알곡이 얘 에겐 합당하지 않아. 그럼 그 알곡이 없으면, 이를 가는 거예요. 밖으로 나가 이를 갈게 하라. 걔에게는 줄 양식이 없다. 그리고는 ‘홀리고스, 택함을 받은 자는 거의 없어! 거의 없어!’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 봐야, 그걸 속옷으로, 율법으로, 법으로만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자! 그 성경이란 속옷을 진리의 겉옷, 예복으로 입지 못한 자! 그들에게는 말씀이 하늘 양식이 되지 못하고, 이를 갈게 하는 헛것이 되는 거예요. 관념으로만 뱅뱅도는 거예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데 우리 가정은 구원을 다 못 받을까? 그게 아니거든요. ‘나와 네 집이 구원 받으리라’는 건 성전이에요. 네가 갖고 있는 그 ‘호 코스모스, 성전이 진리로 구원 받지 못하면 너도 구원 못 받아.’라는 뜻이지, 주 예수를 믿으면 너희 가족이 다 구원 받는다. 이런 말 아니란 말예요. 관념으로만 알고 있어서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 신부들은, 반드시, 이 역사 속에서 파괴당해야 하는 뭔 가를 갖고 있다는 뜻이죠. 헐고 다시 세워야 되니까. 그것이 파괴되고, 다시 세워져야, 신부로 서게 되는 거란 말예요.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이러합니다. “나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하러 왔다. 그러나 알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왔다.”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이야기 같죠? ‘나는 폐하러 왔다.’예요. 그리고 카머(,) 그리고 ‘그러나 나는 폐하러 온 게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율법과 예언서! 이거 그냥 율법, 성경이라고 하자고요. 예언서! 이 ‘나비’라는 단어는, 율법을 가지고 진리를 알아, 진리로 전하면, 그렇게 해서 열매를 맺는 자를, ‘나비, 예언서’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율법이에요. 그냥, 율법과 예언서는! 그리고 그건 성경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무방한 거죠. 주님께서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말씀하시고는, ‘그러나’라고 완곡 접속사를 붙이세요. 그리고는 ‘아냐 완성하러 왔어.’ 이 말은 폐하는 것이 곧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말이거든요. 헬라어 원문을 보면, 이 문장의 맨 앞 단어가 ‘메 노미조’예요.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는 가장 중요한 핵심 내용을 맨 앞에 놓는다 그랬죠? ‘메, 하지 마! 하지 마! 노미조.’ ‘노미조 하지 마!’ 이런 말예요. 그 ‘노미조’라는 건 ‘노모스’란 단어의 동사형이에요. 그리고 ‘노모스’는 법이에요. 율법! 그러나 ‘노모스’는, ‘분리, 둘로 나눔.’ 이런 의미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법이라는 건, 인간들 자신의 그 생래적 성향, 바탕으로, 분리하고 나누어서 판단하는 거. 고걸 ‘노미조’라고 하거든요. 항상 인간들은 두 마음을 갖고 있잖아요? 선과 악이라는! 그래서 성경은 그 두 마음을 품은 걸, 악이라 그러죠? 그 두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게 구원이잖아요? 그 두 마음을 갖고서 항상 둘로 나누어서 생각한다니까요. 요거 악이야? 선이야? 그러면 선을 할까? 악은 하지 말까? 요렇게. 항상 그렇게 판단을 해요. 생각하고. 그러니까 ‘메 노미조’라는 건, ‘그렇게 하지 마!’라는 거예요. 왜? 그게 율법인데, 나는 율법을 폐하러 왔다. 먼저 얘기하는 거요. ‘메 노미조, 노미조 하지 마!’ 왜? ‘호치’라는 접속사가 있거든요. 그래서 나는 너희들이 나쁘게 쓰는 그걸 폐해버리고, 그게 뭔지를 가르쳐 완성할 거야. 이런 말이에요. 성선설, 성악설, 그거예요. 여러분. 맹자의 성선설이나,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은 나면서부터 악해, 나면서부터 선해, 그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그 바탕! 나면서 생래적으로, 운명적으로 갖게 되는 그 바탕! 그것의 진의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은 ‘어, 이게 진짜인 거구나’ 알게 되는 게 성선설이고, 그냥 그 율법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악한 거란 말예요. 그래서 성악설인 거예요. 너희들은 절대로 모든 걸 판단할 때 율법으로 해석하지 마. 성경을 ‘노미조’로 해석하지 마! 그렇게 그 속에 들어 있는 진의를 가르쳐서, 진리로 완성하는 거. 이게 ‘파기하여 다시 세우다, 파리스테미, 쿰’이라고 하는 거요. 그럼 부서져야 할 것은 뭐다? 진리를 설명하는 모형으로서의 껍데기들이 다 부서져야 된다는 거죠. 그게 율법이니까. 자 완성으로 나아져야 할 건, 그 율법 속에 들어 있는 진짜 진리를 말하는 거지, 표피적, 문자적 개념의 바로 그거는 아니다라는 거예요. 그건 내가 폐해버리겠다는 거예요. 왜? 너희들이 그걸 갖고 모든 걸 ‘노미조’하니까. 둘로 나누어 버리니까? 그렇게 판단하니까! 율법, 노모스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토라.’ 그걸 모세 오경이라고도 하고, 율법이라고도 하고, 성경이라고도 하잖아요? 다 같은 거예요. 그건. ‘토라!’ ‘완성된 소’예요. 완전한 하느님. 그걸 담고 있는 게 성경이에요. 그래서 ‘토라’예요. 완성된 소! 그 ‘알렙’이 ‘소’란 뜻도 있지만, ‘하느님’이란 뜻도 있죠. 그리고 일(1)이라는 뜻도 있고 천(1000)이라는 뜻도 있어요. 그러니까 성경에서 하나와 천은 항상 같아요. 그래서 5 리를 가려고 하는 자들에게 10 리를 같이 가주라. 거기에서도 천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오 리, 십 리라고 해서 2킬로, 4킬로 계산하고들 있는데 그거 아니거든요. 천, 하나, 같은 거예요. 하느님으로서의 ‘소!’ 히브리어에는 ‘소’라는 단어가 세 개 있어요. 하나는 ➀‘알렙’이라는 밭가는 소! 일하는 소! ‘알레프’는 진짜 그 하느님. , ②두 번째는 ‘바카르’ 일하는 소예요. 그런데 ‘베’로 시작하기 때문에, ‘성전’이거든요. 두 번째 글자가, 성전 안에서 일하는 소! 야훼 엘로힘이 내려와서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 여기서 하느님을 설명하잖아요? 성자의 일이 그거였잖아요? 그래놓고 자기를 성전이라 그러잖아요. 그 분이. 고게 ‘바카르’예요. 성전에서 일하는 소! 성전으로 일하는 소! ‘바카르.’ 그리고 또 하나의 소가 있는데, ③그게 ‘토라’예요. ‘토르’ 완성된 소, 성전으로, 눈에 보이는 그걸로 하느님을 설명해서 그게 알렙으로, ‘진리야!’라고 알게 되면, ‘토라’라 그래요. 그걸 성경이라 그래요. 그런데 모르고 그 아래의 ‘바카르’의 수준에서 그냥 성전으로만, 율법으로만, 희생제사로만, 성경을 보게 되면, 그냥 거기에 머물러서 죽는 거예요. 평생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가다가. 그걸 ‘토라’로 못 받는 거라니까요. 그러니까 ‘토라’는, 파괴되어져야 할 옛 것임과 동시에, 완성되어져야 할 새 것을, 동시에 가리키는 거예요. 껍데기로서의 토라는 죽이고! 그래서 벧세메스로 가는 두 소가 말씀을 짊어지고 가서, 제사장의 뜰에서 죽는 거예요. 죽고 진짜 진리의 소로 살아나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여러 번 읽고 보세요. 그래서 요것만 알게 되면, 여러분이 성경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래서 진리를 알게 된 자들에게 있어서는, 선과 악이 하나가 되겠죠? 우리가 아랫물, 이 성전, 율법 이걸 악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걸 통하여 율법이 진리를 설명하는 거였다면, ‘이게 이거였구나!’라고 이게 하나가 되면, 고걸 한 마음이라 그래요. 그래서 고 한 마음을 가진 걸, ‘모노.’ 한 마음을 가진 자, ‘모노게네스.’ 그게 독생자예요. 그러니까 독생자는, 외아들이라는 뜻이 아녜요. 온통 두 마음을 갖고 있는 이 세상 속에, 하나를 갖고 온 그 분이, 하느님이, 하나, 이게 뭐지 가르쳐 주기 위해, 하나를 갖고 내려 오셔서, ‘얘들아 이게 하나야!’ 그래서 세리, 창녀들하고 막 어울리면서! 그런데 율법은 ‘어, 저거 악한 건데.’라고 하는데 그 분은 ‘아냐, 하나야.’라고 가르쳤잖아요? 그분을 ‘모노게네스, 독생자’라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해서 진리를 알게 되어 하나를 갖게 되면, 여러분이 유니크(unique), 독생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아들’이라 그래요. 성경에 보면 우리를 아들로 만들었다 그러죠? 고게 ‘모노게네스’예요. 하나를 가진 자! 그 선악의 구조에서 뽑아내버리는 거예요. 아무튼 그렇게 ‘토라’가 ‘알렙’으로, 그 진짜 하느님으로, 나 안에 들어오게 되면, ‘바카르’라는 그 소가 일을 하던 옛 성전이, 그게 뭔지 알았으니까! 희생제사가 뭔지 알았으니까! 율법이 뭔지 알았으니까! 이제 그건 필요 없게 되잖아요? 그렇다고 그게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게 아니라, 나에게 蒙學선생으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던 거였기 때문에, 그것도 선한 거란 말예요. 그러나 그 속에 있는 진리를 내가 알았을 땐, 그건 필요 없죠? 예수, 십자가, 성전, 성령, 마찬가지예요. 그 분이 ‘내가 진리다.’라고 한 건, ‘이 껍데기인 나를 보지 마!’란 말이었단 말예요. ‘내가 담고 있는 그 진리를 봐! 내 안에 있는 진짜 소를 봐! 나는 ’바카르‘로 일하러 왔는데, 그런데 너희는 그것으로 ’알레프‘라는 진짜 소를 알아야 돼. 그래야 이게 ’토라‘로 네 안에 새겨지는 거야. 네 마음에.’ 자, 그러면 보세요. 그렇게 율법, 이 아랫물. 그거 창세기 1장 1절에서 뭐라고 그래요? 천지(天地)! 하늘과 땅. 거기에 옛 하늘과 옛 땅이, ‘아 이걸로 진짜 새 하늘과 새 땅!’ 그게 진리 속에서의 천지란 말예요. ‘새 하늘과 새 땅! 그걸 가리키는 거였구나!’를 알면, 옛 하늘과 옛 땅, 그 천지가 필요 있어요? 필요 없죠? 그래서 그러는 거예요. 율법의 일점일획이 진리로 완성이 되면 천지(天地)가 사라진다, 그러는 거예요. 요한묵시록을 보면, 옛 하늘과 옛 땅이 두루마리처럼 올라가잖아요? 그게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옛 하늘과 옛 땅이 필요 없는 그런 모형으로 나에게 이해되어지면, 그건 없어지는 거예요. ‘천지가 사라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一點一劃)이, 모두 완성되어야 돼. 하나라도 떨어지면 안 돼!’ 이 말이 그 말이에요. ‘성경 전체는 다 진리야. 그 중에 하나라도 법으로 보면, 너는 네 옛 하늘과 옛 땅에 갇힌 거야.’ 이런 뜻이에요. 그게 진리로 완성이 될 때, 옛 하늘과 옛 땅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모형! ‘호 코스모스!’ 껍데기 속에서 벗어나는 거란 말예요. 율법의 일점일획! (마태복음 5:18-19) 18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19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이게 ‘행하며’가 아니라, ‘keep, 호이에이’ ‘이걸 간직하고,’ 아니, ‘이것이 되어서’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갖고, 율법을 갖고, 진리가 되어서, 가르치는 자! 그 자가 천국에서 진짜 큰 자고, 진리가 되지 못하고, 그걸 그냥 이 깨어진 상태, 이게 율법이잖아요? 그대로 가르치면, 천국에서 작다고 한 대요. 그러면 이게 무슨 말인지 보잔 말예요. (루가복음 16:9-11) 9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10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11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데도 충실하지 못한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엘라스키토스, 지극히 작은 거,’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진리로 알지 못하고, 그걸 율법으로 보는 자는, 작은 자라 그랬어요. 여기서 지금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같은 단어란 말예요. 그럼 요게 뭔지를 알면, 그게 뭔지 알 거 아녜요? 그래야 여러분이 이 땅에서 부수고 세워야할 게, 뭔지 알거 아닙니까? 그걸 진리로 이루는 게 부수고 세우는 거니까.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요. 여기에 두 주인이 나와요. 한 주인은 맨 앞에 나오는 부자라는 주인이고, 한 주인은 그 청지기를 지혜롭다고 하는 주인이에요. 그 주인의 이름은 ‘호 큐리오스’예요. ‘주’예요. 주는 곧 그리스도라 그랬죠? 그리스도와,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하는 그리스도와,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왜 하늘의 거 낭비해! 왜 내 것 낭비해!’라고 야단치는 부자라는 주인이 나와요. 두 주인이! 그런데 그 청지기의 行事가 주인의 것을 갖고, 남의 빚을 탕감해주는 거였죠? 이게 뭐예요. 아버지의 말씀을 갖고, 남의 빚을 탕감해주고 있는 ‘나!’ 진리인 ‘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거 네 거야?’ ‘아닌데요.’ ‘그런데 네가 왜 마음대로 탕감해주고 그래?’ ‘주인이 기뻐하니까요.’ 그런데 세상은 뭐라 그러죠? ‘네가 뭔데, 한만큼 상 받고, 한만큼 벌 받는 건데, 네가 뭔데 다 공평하게 아무나 진리로 용서해? 왜 주인 거 네가 함부로 써?’ 이게 세상! 호 코스모스예요. 그런데 ‘호 큐리오스’는 ‘잘 했다! 잘 했다! 내 것 갖고 그렇게 용서하라고, 빚 탕감하라고 준 거야. 내 것이 네 거잖아?’ 이게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대사의 한 부분이에요. ‘네가 진짜 나를 알았더라면, 내 것이 네 것인데…’ 큰 아들에게 그러잖아요? ‘그런데 넌 모르잖아? 내 것이 네 것인 줄을.’ 그러니까 엉뚱한 걸 받으려고 하는 거죠. 자, 여기에서 이 청지기가, 빚쟁이의 빚을 탕감해주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주인의 것. 이걸 ‘불의한 재물’이라 하고, ‘작은 것’이라 그래요. 그리고 ‘남의 것’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불의한 재물이 뭔지, 작은 게 뭔지, 남의 것이 뭔지를 알면, 그 율법의 일점일획을 진리로 완성하지 못한 자! 그걸 헐고 다시 세우지 못한 자가 어떤 자인지를 알게 될 게 아녜요? 같은 단어니까, 여기의 ‘불의한 재물’은 헬라어로, ‘호 맘모나스, 호 아디키아’예요. 직역을 하면, ‘공의롭지 못한 재물!’ 그런데 두 군데 다 관사가 붙어 있어요. 맘모나스에 관사가 붙으면, 돈이라는 말 맞아요. 돈이에요. 돈! 그런데 그 돈은 단순히 화폐를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돈이 뭐냐면,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중에, 팔아서 화폐화 시킬 수 있는 모든 걸, ‘맘모나스’ 그걸 ‘돈’이라 그래요. 거기에는 내 노동력도 들어가고, 내 아이디어, 내 생각까지도 들어가요. 팔 수 있죠, 이거? 이게 다 돈이에요. 이것이 다 ‘맘모나스’예요. 내 것! 누구에게 받은 것 말고, 내 것 중에, 이걸 가치 있게 팔아서, 화폐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걸, ‘호 맘모나스’ 그래요. 그걸 돈이라 그래요. 우리가 좋아하는 그 돈이 아니고, 돈! 그래요. 재물이라 그래요. 그래서 구약에서 희생제사와 율법지킴의 행위로 그 성전에 묶여 있는 자들에게, ‘너희들이 맘몬 신을 섬긴다.’ 그러죠. 그들이 성전에서 다른 걸 섬긴 게 아니라, 열심히 제사를 드린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걸 맘몬 신이라 그래요. 왜? 내가 가지고 있는 걸 가치로 내어놓아, 이건 가치니까 ‘받아주세요!’하고 낸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성전을 전부 금으로 덮으라고 한 거예요. 왜? 하느님이 그걸 돈을 상징(象徵)하려고. 요게 맘모나스야! 이렇게 너희들이 너희들 거 내놓고, ‘하느님, 이거 가치 있는 거니까 받으세요.’라고 하는 이게, ‘호 맘모나스’예요. 재물이에요. 그건 불의한 재물이죠? 의로운 재물이 아니잖아요? 그걸 상징하던 게 예수 그리스도였는데, 그걸 그냥 ‘호 맘모나스’의 상태로, 이게 가치 있는 거야. 율법으로 가지고 있으면, 그게 불의한 재물이잖아요?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걸 ‘작은 것’이라고 한다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나쁜 가요? 아뇨. 그걸 통하여 진짜 가치! 진짜 재물이 뭔지 알라고 준 거니까. 그건 나쁜 게 아니란 말예요. 그걸 진리로 보지 못하고, 그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그것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게, 맘몬 신을 섬기는 거예요. 그러면 율법! 그 맘몬 신! 이것을 진리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이것에 묶여 있을 때 진짜 하느님을 섬길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섬겨요. 그래서 종이 두 주인 못 섬긴다. 그러는 거요. 둘 중에하나예요. 율법에 묶여 있던가, 하느님! 진리를 깨달았던가. 둘 중에 하나. 그래서 두 주인 못 섬기는 거예요. 그게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주인이라니까요. 진리(眞理)냐? 율법(律法)이냐? 아무튼, 그 불의한 재물! 옳지 못한 맘모나스로, 뭘 하라 그래요? ‘친구를 사귀라!’ 그러죠? 친구는 뭐라 그랬어요? 형제가 위급한 상황에 있을 때, 어떤 대상이 위급한 상황에 있을 때, 그가 필요한 걸, 진짜 그가 살아날 수 있는 걸 주는 자! 줄 수 있는 자를 형제라고 하고, 그걸 받아서 준 자의 반열로 올라왔을 때 이걸 친구라 해요. 그러면, ‘죄’에 빠져 죽어 있는 자를, 진리로 용서하여, 아들의 자리로 끌어올리라는 뜻이에요. 그건 주인의 것으로 밖에는 할 수 없어요. 청지기의 것이 뭐가 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 것이 뭐가 있냐고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거 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용서(容恕)는, 뭘 저거 그냥 속으로 벼르고 있으면서, ‘저거, 아 성경이 용서하라니까. 그래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고, 491 번째는 너 죽여 버린다. 진짜!’ 이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이 뭐예요. 칠십 이레죠? 칠십! 칠이 뭐예요? 이래! 하루, 이틀, … 닷새, 엿새, 이래! 칠십 이래가 뭐죠? 성경에 나오잖아요? 이 역사! 여러분의 인생! 그걸 칠십 이래로 정해주잖아요? 그 기간 동안에 용서는 늘 있다. 이게 칠십! 일흔 번씩 일곱 번이지, 490번까지는 꼭 용서해! 이거 아니란 말예요.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말한 용서는 그런 용서가 아냐. 그건 불교인들도 하고, 이슬람교인들도 하고 다 해. 그런 거 말고, 너는 진리를 주어 그를 진짜 용서하여, 내 아들로 만들라!’라는 거예요. 그게 용서라니까요. 되지도 않는 용서! 화나면 풀기도 하고, 그래야지 뭐 어떻게! 그렇게 계속 용서만 해주니까. 애들이 버릇이 없어요. 이렇게! 잠언에서 ‘매질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그랬는데, 그건 패라는 얘기였거든요. 그런데 몬테소리 같은 게 나와서, 애들을 그냥 선생이 몽둥이만 들면, 전부 핸드폰 꺼내서 촬영하려고, 인터넷에 올리려고 그런다잖아요? 그리니까 애들이 버릇이 없어. 애들은 패야 돼요. (하하하) 그렇게 ‘지극히 작은 거, 그 맘모나스 안에서, 믿음이 되어라!’ 그래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면. 그러죠? 그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해라는 게 아니라, ‘피스토스’란 단어예요. 믿음이란 단어예요. 그 단어가! ‘하느님은 신실하시다’ 그랬을 때, ‘하느님은 믿음이다’예요. ‘피스티스’를 신실이라고 번역해서, 난 신실이 뭔지 모르겠는데, 대단히 성실한 거란 뉘앙스로 들리는데, 그게 아니라 믿음이란 뜻이에요. 신실이란 말이! 그러니까 불의한 거! 작은 것에 충성하라는 건, ‘그것으로 믿음이 되어라!’라는 거예요. 그러면 작은 거, 불의한 재물이 뭐라 그랬어요? 성전! 율법! ‘그걸로 믿음이 되면, 네가 믿음이 되면, 진짜 지극히 큰 것 안에서 믿음이야!’예요. 그게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 충성하고, 이렇게 번역이 되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하여튼 그죠? ‘지극히 작은 거! 율법! ’호 코스모스‘로 진리를 알면, 그걸로 믿음이 되면, 오! 큰 거, 그거 안에서 네가 믿음이야. 이 땅에서의 믿음이란 것의 실체야. 네가!’ 그러는 거예요. , 믿음이라는 건, 이 땅의 사람들이, 땅의 것을 통하여, 하늘의 것을 추측하고, 추론하는 거, 믿음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내가 이렇게 붙들 수 있거나 볼 수 있는 게 아니죠. 결국 그 믿음이라는 것도, 나중에 진리를 알게 되면, 없어져야 되는 거죠? 그 믿음이라는 거 자체가,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의 실체이고, 그걸 우리는, 이 땅에서 땅의 것으로 추론하여 갖고 있는 거잖아요? 성경, 땅의 것을 갖고, 그런데 그걸, 진리를 알았어요. 그러면 그 믿음은 필요 없어요. 그래서 바오로가 ‘믿음?’ 없어질 거야. 희망? 없어질 거야. 왜? 희망이란 단어가 성경에 첫 번째로 나오는데가, 창세기 1장이에요. 셋째 날! 뭍과 물을 가르는데, 아랫물을 모았다, 그러죠? 이게 ‘미크베, 희망’이라는 단어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을, 아랫물로 설명하죠? 호 코스모스! 율법으로 설명하잖아요? 그걸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을, 보이는 것으로 이렇게! 지금 ‘그 보이지 않는 걸 설명하고 있다.’ 이걸 ‘미크베, 희망’이라고 그래요. 아랫물, 윗물을 설명하는 거니까. 그런데 이 희망으로 진짜 그 진의를 알게 됐을 때, ‘이 보이는 희망이 무슨 희소망이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바오로처럼! 보이는 ‘미크베’가 무슨 희망이야, 그게 담고 있는 진짜 진리지. 그래서 보이는 희망, 보이지 않는 희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믿음과 희망은 사라지고, 그것의 실체인 ‘아가페만 영원으로 남으리라!’가, ‘믿음과 희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산상수훈에서도, 너희가 ‘코드란테스, 마지막 넷,’ 그 넷 중에 마지막 하나, ‘에스칼로스 코드란테스’ ‘에스카톨로지! 그 마지막 하나로 완성 되지 않으면, 넷으로 완성되지 않으면, 너희들이 절대 그 감옥에서 못 빠져나와!’ 그게 사랑이잖아요? 그래서 산상수훈의 마지막이 뭐예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 네, 불의한 재물! 작은 것! 남의 것! 해결됐잖아요? 그러면 작은 것이 뭐예요? ‘작은 자가 되리라. 하느님나라에서. 율법의 일점일획, 그거까지도 진리로 이해하지 못하고, 뭐 예수 믿는다, 뭐 하는 자들은, 너희들이 어떻게 그 혼인잔치까지 올지는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여전히 그 작은 것이요. 너희들은 여전히 율법 안에 갇혀 있는 자들이야.’라는 뜻이에요. 작은 것! 그러니까 여러분이 헐고 다시 세우려면, 율법에서 벗어나야 돼요. 껍데기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예요. 보세요. 그래서 그걸, 예수님이 헐고 다시 세우는 이야기로 연결을 시켜요. 불의한 재물의 이야기를 한 번 보세요. (루가복음 16:14-18) 14 돈(맘모나스)을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다. 15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마음보를 다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6 '요한 때까지는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그 이후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데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 가려고 애쓰고 있다.' 17 '하늘과 땅은 사라져도 율법은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8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며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갑자기 결혼 이야기로 이어지죠. 이제 간음(姦淫)의 이야기, 산상수훈에서 간음의 이야기를 배웠으니까, 이런 이야기도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되는 거죠. 자, 작은 것, 불의한 맘모나스! 그 남의 것으로 진리가 되어야 돼! 그 율법으로 너희는 진리가 되어야 돼! 거기에 묶여 있으면 안 돼! 왜? 그게 맘모나스니까. 맘몬 신이니까. 예수님이 지금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그걸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돈을 좋아하는 그 맘모나스에 묶여 있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다고요? 비웃었다! ‘웃기고 있네. 그럼 너처럼 창녀들과 소주마시고 하는 그게 나은 거냐?’ 그렇게 비웃는 거예요. 지금. ‘내가 낫니? 네가 낫니?’ 바리새인들이! 감히 하느님에게. 그들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맨 앞에 나오는 부자예요. ‘너 왜 네 맘대로 허비해?’ 이거. 바리새인들 부자예요. 그래서 그 다음의 이야기가,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로 나오는 거예요. 고 부자가 요 부자다. 그 중간에 바리새인들이 들어가서, ‘이놈들이 부자야!’ 이걸 예수님이 그렇게 연결시키는 거예요. 다 비유잖아요. 혼자 열난 것 같아서, 힘이 쫙쫙 빠지는 거예요. (하하하하)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의 비유를 비웃자, 주님께서 그래요. ‘너희들 이렇게 옛 하늘과 옛 땅, 천지에 묶여, 그 상태로 존재하는 한, 율법은 너희를 묶는, 올무로 남아 있을 거야.’ 그래요. 그리고 남편 이야기를 하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우리의 남편은 예수님이죠? 그분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가실 분입니까? 아니에요. 그 분은 그럴 수가 없는 분이에요. 그러면 그분께 아내로 택함을 받아, ‘씨’를 받으면, ‘진리의 말씀’을 받으면, 씨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여자고, 그 씨를 받아 씨를 갖고 있는 자가 아들이에요. 그게. 그러면 우리는 또 아비의 역할, 남편의 역할을 또 하는 거죠. 우리가! 그런데 우리가, 그걸 그대로 전하여 아들을 만들어서, 주님과 결혼을 시켜야 하는데, 옆에 옷을 입혀 세워야 되는데, 율법으로 엉뚱하게 가르쳐서, 그 남편과 이혼하게 만들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걸 간음이라고 하잖아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렇게 너희가 그 진리! 씨를 심어, 진리를 심어, 나의 아내로 그들을 세워야 되는데, 엉뚱하게 율법을 던져서 그들과 나를 멀어지게 하면, 그게 간음하게 하는 거 아냐? 그리고 그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또 장가든다. 그걸 또 가르치게 되면, 또 간음하게 되는 거야. 네가! 똑같은 인간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계속해서 여기서, 율법을 부수고 계시는 거예요. 때려 부수고 계시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 이야기 바로 뒤에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를 붙여서, 그 부자가 이 부자인데. 그러면 그 나자로는 누구이겠어요? 세상으로부터 불의한 청지기라는 판단을 받은, ‘네가 불의한 거야! 그게! 공의가 아냐!’라고 판단을 받은 그 청지가가 나자로로 나오는 거예요. 개 취급 받았다고요. 그런데 그 부자는, ‘하데스, 음부’에 가서, 말이 없는 곳, 진리가 없는 곳이 하데스예요. 거기 가서 비로소 알아요. ‘아, 저 물이 내 생명이었구나! 한 방울만 찍어서 주세요. 한 방울만!’ 그런데 안 돼요. 거기서는 안 돼요. 끝나는 거예요. 여기서 들어야 돼요. 그러니까 ‘내 형제 다섯이 있어요.’ ‘토라’예요. 모세 오경. ‘내 형제 다섯이 저 땅에 있어요. 저 아래에 있어요. 그들에게 죽었다가 살아난 이 자를 보내주세요. 누구? 예수를 보내세요. 예수의 십자가! 그거면 살 수 있지 않나요?’ ‘안 된다’ 그래요. ‘모세와 예언자, 성경을 통하여 그게 뭔지를 모르면, 십자가는 그와 아무 상관없다.’ 그래요. 그러니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2000년 전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대. 아무리 그래봐야 그건 여러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가 부자라니까요. 그렇게 알고 있는 자가! 그래서 고 이야기 밑에 예수님이, ‘鼓子의 이야기’를 붙여놓은 거예요. 고자는 내시나 뭐 이런 거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혼자 사는 미혼자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단어 자체가 미혼자! 거세당한 자가 아녜요. 미혼자! (마태복음 19:9-12) 9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음행한 까닭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간음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10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더니 11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다. 12 처음부터 결혼하지 못할 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고 사람의 손으로 그렇게 된 사람도 있고 또 하늘 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을 받아 들일 만한 사람은 받아 들여라.' 이 ‘유노코스!’ 이건 ‘미혼자!’ 지금 주님이,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자, 홀로 사는 자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세 종류의 미혼자! 성경의 말로 하면, 고자가 있다는 거예요. 첫 번째가 어미의 태가 만든 고자. 어미의 태로부터 고자로 나온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어미의 태!(자궁)가 텅 비어서 그래요. 그 안에 뭐가 차면 빨리 병원으로 가야 되는 거죠? 텅 비어 있었대요. 아들로 채워지지 않은 텅 빈 게 뭐예요? ‘옛 성전’이에요. 진리로 채워지지 않은, 그래서 이 자궁이라는 단어를 성전이란 단어로 같이 썼단 말예요. 그러니까 어미의 태가 뭐예요? 어미는 ‘메텔’이고 이 ‘태’는 ‘코일리야’예요. 그 옛 성전, 텅 비어 있는, 말이 없는, 그 어미의 태, ‘메텔!’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죠? 은하철도 999의! (하하하) 여러분 그거 복음이 담긴 만화영화예요. (하하하) 기계인간이 아니라, 부자들이, 기계인간의 몸을 사서 영생하잖아요? 그런데 철이는 가난해서 그걸 못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메텔,’ 어미가 나타나서, 은하철도 999에 태워, 구원열차에 태워, 안드로메다라는, 영생을 거저 준다는 그곳으로 데려가는 거예요. 은하철도 999! (하하하) 그 어미의 태! 옛 성전이 만들어내는 미혼자! 고자가 있다는 거예요. 예수께로 데리고 가서, 그 남편과 중매하여, 그 옆에 세워야 되는 게 율법의 원래 역할인데, 이 옛 성전이 오히려, 이 둘을 떨어뜨려서, 미혼자, ‘유노코스’, 고자로 만들어버리더라는 거요. 그걸 사람들이 만들더라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그게 사람으로부터 된 고자죠. 그러나 ‘천국을 위하여’라는 단어가 수식을 하는 고자가 있어요. 천국! 하느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고자 된 자. 그게 뭘까요? 내가 진리를 알았어요. ‘아, 이 율법, 세상, 호 코스모스! 이건 내 남편이 아니구나! 내 안에 들어온 이 진리가 내 남편이구나!’ 세상이 볼 때는, ‘저거 왜 혼자 저렇게 살아!’ 스스로 된 고자예요. 진리를 알게 되면, 여러분은 그렇게 그냥 스스로 율법으로부터 떠나게 되어 있어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막 살게 된다는 말 아녜요. 그렇게 살지 않게 된다니까요. 그냥 자유를 누리게 되는 거지. 뭐 두렵게 막 산다는 뜻이 아니란 말예요. 그게 뭔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그 진리를 마음에 담아서, 이 세상 속에서 스스로 고자 되는 거고, 그것이 못 마땅하면, 세상과 간음하다가, 진짜 남편에게 영원히 버림받는 자가 되는 거예요. 가짜 남편! 열심히 단물 다 빨아먹고, 노예시장에 팔아버리는 ‘고멜’의 가짜 남편! 사마리아 땅에서, 그 물 없는 여자가 기대던, 다섯 율법의 남편! 그 예수가 그러죠? ‘여기 있는 이 사람도 네 남편이 아니다.’ 그러죠. 그 껍데기의 예수라는 남편! 이게 죽어야 돼요.
그 헐고 다시 세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지금 이 인생이 허물어지고 파괴되어지는 것에, 이제 점점 둔감(鈍感)해 질 수 있어요. 어차피 허물어지고 파괴되어져야 할 거, 뭐 그거. 그리고 그것 중에 좋은 거 골라서, 사울처럼 하느님께 드려봐야 뭐 그렇게 대단하겠는가? 그러니까 내가 꼭 붙들고 있던 거, 헌금도 더 많이 하게 되고, 봉사도 더 많이 하게 되는 거예요. 사실은 그렇게 되어야 맞아요. 그게 올바로 이해되었으면 풍성하게 나타나야 되는데. ‘아이고 그렇단 말이야? 그럼 그동안 괜히 냈네. 그런 거 사실 무의미해요. 의미 없어요. 그냥, 진리의 말씀 붙들고 고자로 사세요. 그리고 여러분 안에 있는 그 신랑이, 진짜 여러분을 찾아오는 그 날! 여러분은 ‘야, 이거였구나!’ 하고 쾌재를 부르며, 그때부터 영원으로 사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잠깐 참으세요. 이 세상은 눈 한 번 깜짝 감으면, 곧 끝납니다. 자유하게 누리세요! 하느님을! ‘아브라카다브라.’ 여러분이 가진 말대로 됩니다.
뭔가를 찾으셨나요? 아직도 흐릿한가요? 거울을 보듯이 환하게 보는날이 올 것입니다. 살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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