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김호열 신부
교리 교육 9. 엘리야의 기도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그동안 피조물 돌봄에 대한 교리 교육으로 인해 중단됐던 기도에 대한 교리 교육을 재개하겠습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인물 중 한 명을 만나보겠습니다. 바로 엘리야 예언자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경계를 뛰어 넘은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존재를 복음의 일부 사화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셨을 때 모세와 함께 예수님 곁에 나타났습니다(마태 17,3 참조).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인정하시려고 엘리야를 언급하시기도 했습니다(마태 17,10-13 참조).
성경에서 엘리야 예언자는 그야말로 변방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갑자기 신비로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1열왕 17,1 참조). 그리고 마지막에는 제자 엘리사가 바라보는 가운데 자신을 하늘로 데려가는 불 병거를 타고 사라집니다(2열왕 2,11-12). 그러므로 그는 정확한 시작도 없고, 특별한 마지막도 없습니다. 엘리야는 하늘로 실려 올라 갔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람들은 그가 선구자로서 메시아가 출현하기 전에 되돌아올 것이라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같이 엘리야가 되돌아오리라고 기다렸습니다.
성경은 엘리야를 수정처럼 빛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야훼는 하느님이시다(Jahvè è Dio)”라는 뜻의 이름 안에 그의 사명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는 평생 그러했습니다. 정직했으며, 저급한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상징은 하느님 정화의 능력을 나타내는 불꽃입니다. 그는 혹독한 시험을 받았으나 충실했습니다. 유혹과 고통 가운데 있음에도 자신이 태어난 이상을 저버리지 않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입니다.
기도는 그의 존재에 끊임없이 공급되는 림프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수도원 전통 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여겨진 이유이자, 일부 사람들이 그를 하느님께 축성된 사람들의 영적 아버지로 택한 이유입니다. 엘리야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우월성을 수호하는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약점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유용했던 경험이 카르멜 산에서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친 것이었는지(1열왕 18,20-40 참조), 아니면 “자신의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느끼고 실망했던 것이었는지(1열왕 19,4 참조) 말하기란 어렵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인생이 마치 승리와 성공을 오가는 것처럼 보이는 영광의 순간보다 자기 자신의 약함의 의미가 더 소중합니다. 이는 기도 안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가 들어 올려지고 열정으로 가득한 기도의 순간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건조함과 시련으로 가득한 기도의 순간도 있습니다. 기도는 그러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길 때도 있고, 나쁜 상황과 유혹 때문에 질책받도록 자기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 나오는 부르심을 받은 많은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현실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경우도 생각해봅시다. 그들의 삶 역시 그러했습니다. 환희의 순간, 그리고 낮아지는 순간, 고통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관상적인 삶의 사람이며, 동시에 동시대의 사건들을 우려하고,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나봇을 죽인 왕과 왕비를 비판할 수 있었던 활동적인 삶의 사람입니다(1열왕 21,1-24 참조). 엘리야의 용기를 갖고 책임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열정적인 신앙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살인입니다!”라고요. 우리에게는 엘리야의 영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기도하는 사람의 삶에 이중성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 있으며, 하느님께서 보낸 형제들을 만나러 갑니다. 기도는 영혼을 치장하기 위해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면입니다.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파견되도록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의 시험대는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들은 먼저 침묵하고 기도한 다음 세상에서 행동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행동은 충동적이고, 식별력이 없고, 목표 없이 미친 듯 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신앙인들은 많은 불의를 저지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혹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식별하기 위해 먼저 주님께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대목은 엘리야의 믿음 또한 발전했음을 암시합니다. 그 또한 기도 안에서 자라났으며, 조금씩 다듬어졌습니다. 이 여정 중에 하느님의 얼굴이 그에게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호렙 산 위에서 당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셨을 때의 놀라운 경험의 절정에 이를 때까지 말입니다(1열왕 19,9-13 참조). 하느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 같은 불 속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12절) 안에서 나타나셨습니다. 그 체험을 잘 반영하는 다음의 번역이 좋은 것 같습니다. ‘가느다란 침묵 소리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겸손한 표징으로 평화를 잃고 도망친 예언자 엘리야와 소통하십니다. 하느님은 모든 면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지친 그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 ‘부드러운 소리’와 그 ‘가느다란 침묵의 소리’로 그의 마음에 평온과 평화를 되찾아 주십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이야기지만, 우리 모두를 위해 쓰여진 이야기 같습니다. 어떤 저녁 시간에는 우리 자신이 쓸모 없으며 외롭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바로 기도가 와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릴 것입니다. 제자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의 절반을 집어 든 것처럼, 우리 모두도 엘리야의 겉옷 조각을 집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잘못했거나 위협과 두려움을 느꼈더라도, 기도로 하느님께 돌아오면 기적처럼 우리에게 평온과 평화가 되돌아올 것입니다.
출처: https://www.vaticannews.va/ko/pope/news/2020-10/papa-francesco-udienza-generale-preghiera-elia.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