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福者 김기량 펠릭스 님 (순교일; 1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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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태욱 | 작성일2021-01-04 | 조회수84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Felix Petrus)는, 1816년 제주 섬 함덕리(현, 제주도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김 선달’이라고 불렀다. 그는 배를 타고 다니면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동료들과 함께 무역을 하려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였다. 동료들은 이미 탈진하여 죽은 상태였다.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들과 조선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는 당시 그곳에서 휴양 중이었다. 그러자 김기량은 여기에 마음이 쏠려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하였고, 그의 신앙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깊어졌다. 그런 다음 그는 1857년 5월 31일에 홍콩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1858년 3-4월에 페롱(S. Feron, 權) 신부와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신부들은 그가 ‘제주의 사도’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제로 그는 가족과 그의 사공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1865년에는 두 번째로 난파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고 다음 해에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육지로 다시 나와 리델(F. Ridel) 신부를 방문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사공 2명을 세례 받도록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다음과 같은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여느 때처럼 무역을 하러 경상도 통영으로 나갔다가 그곳의 게섬(현, 경남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굳게 신앙을 지켰다. 더욱이 옥에 갇혀서는 함께 있던 교우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러자 감사는 ‘그들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김 펠릭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다시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목숨이 붙어 있자, 관장은 그들 모두를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가 1867년 1월(음력 18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나이는 51세였다. 이때 관장은 특별히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 자료집에서 발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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