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聖박종원, 聖홍병주님 등의 순교(순교일; 1월3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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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태욱 | 작성일2021-01-31 | 조회수693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성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또는 아우구스티노)는 서울에 살던 중인 계급의 신자 집에서 태어났으며 ‘이선’이라고도 불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친절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나고 박학하였으므로 주변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극빈한 가운데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를 불평 없이 참아 받았고, 어머니께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교회의 계명도 충실히 지켜나갔다고 한다. 나이가 들자 그는 순교자의 딸인 고순이 바르바라(Barbara)를 아내로 맞이하여 열심한 신앙생활로 모범 가정을 이루는 한편, 그의 박애심과 교리 지식을 활용하여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데 전심하였다. “우리 주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셨으니 불쌍한 죄인인 나도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고 죽으셨으니, 나도 그분을 위하여 괴로움을 받고 죽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면서 순교하려는 뜻을 마음에 새겼다. 또 그는 신자들 중에서 무슨 악습이나 부당한 일이나 중대한 과실을 발견하면 상냥한 말로 그 사람을 회개시키려고 노력하였는데. 감동할 만큼 사랑으로 권고했기 때문에 그의 충고에 거역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관절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을 내는 것을 언제 보게 될까?” 하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덕과 재능을 즉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에게 알려졌다. 따라서 주교는 그를 서울의 회장직에 임명하였고, 그는 이 위험한 직책을 열성적으로 수행하여 그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자기 집을 떠나 친구의 집에 피신하였으나, 회장의 직분을 다하려는 마음에서 밤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옥에 갇힌 신자들을 찾아보고 그들을 위로하며 용기를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8개월을 지내던 중 마침내 10월 26일에 아내와 함께 체포되었다. 10일 후에 형조로 끌려간 그는 다리에 매를 맞아 살점이 떨어져 나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마침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의 죄목은 “천당과 지옥을 마치 확실한 사실같이 말하고, 제사는 헛된 예식이라 하여 저버렸으며, 천주를 충심으로 믿고 공경하여 차라리 죽을지언정 마음을 돌리지 않은 죄”였다. 그는 1840년 1월 31일, 서울에 있는 당고개에서 참수를 당하여 순교하였고, 이때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성 홍병주 베드로(Petrus)와 성 홍영주 바오로(Paulus)는 형제지간이고, 매우 유명한 가문의 자손들이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홍낙민 루카(Lucas)는 그들의 조부이고, 1840년 전주에서 참수당한 홍재영 프로타시우스는 그들의 삼촌이다. 그리고 아버지 홍빈영은 1801년의 지긋지긋한 난을 치르고 나서 충청도 내포평야에 있는 서산 고을 여사울이란 곳에 살고 있었다. 이 형제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신앙과 견실한 학식뿐이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잘 이용하여 후일 천주교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들은 남을 가르치는 일과 약한 자를 격려하는 일과 병자를 간호하는 일 그리고 자선 사업에서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므로 모방(Manbant, 羅)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도 교회의 여러 가지 증대한 일을 처리하게 했고, 또 그들은 기대에 맞게 잘 처리하여 교회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시작되어 성직자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 목숨을 잃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 형제는 선교사들을 용감하게 집에 모시고 접대하였으니, 이미 그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체포자 명단에 그들의 이름도 올려놓고 있다가 그해 9월에 홍 베드로와 바오로를 붙잡았다. 그러나 형제는 똑같이 순교자의 자손답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다른 신자들을 고발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포장은 이들 형제의 배교를 단념하고 형조로 이송하였는데, 당시 형조판서 홍명주는 이들의 친척이었다. 그는 이들 형제 때문에 자신에게 무슨 해가 미칠까 두려워한 나머지 부하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 써서 그들을 배교시키되 사형언도는 내리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그 부하들은 상관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그들을 배교시키지 위해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으니, 이 형제는 끝까지 마음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인 홍 베드로는 박종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와 같이 참수되었고, 동생인 홍 바오로는 그 이튿날에 형을 따라 당고개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는 그 당시 법에서 형제를 같은 날 죽이지 못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따로따로 형을 집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형은 42세의 나이로 1840년 1월 31일에 순교하였으며, 동생은 39세의 나이로 그 이튿날에 참수당하여 영광스런 월계관을 함께 받았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주교교회의 중앙협의회 자료에서 발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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