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벳자타 못가 병자치유(요한5,1-16) | |||
---|---|---|---|---|
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3-16 | 조회수1,42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1년 3월 16일 화요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베찌다 못가 병자치유 (요한5,1-16)
제1독서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보았네.> (에제 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화답송 시편 46(45),2-3.5-6.8-9(◎ 8)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
복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요한5,1-16) 1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5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6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8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9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에제47,1-9.12)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8)
에제키엘서 47장 8절은 주님의 집(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서 그 바다를 살릴 것이라고 천사가 에제키엘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천사는 그냥 '물'이라고 하지 않고 '이 물'이라고 표현했다. '이 물'에 해당하는 '함마임 하엘레'(hammaim haelleh)에서 정관사와 지시대명사가 결합된 '하엘레'(haelleh; These)와 더불어 '함마임'(hammaim; water)에도 정관사 '하'(ha)가 있다.
이것은 사해 바다를 살릴 물이 에제키엘서 47장 1절에서 묘사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고, 또한 에제키엘서 49장 7절에서 묘사된 강가에 수많은 매우 질이 좋은 나무들을 만들어낸 물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즉 천사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죽은 바다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적을 일으킨 그 물이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사실에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이 물'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회복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할 땅을 하느님의 첫 창조와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의 축복을 모두 향유할 수 있는 낙원으로 탈바꿈시킬 물이라는 두 가지 사실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드러내는 '이 물'은 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백성들이 하느님을 떠나게 했던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났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회복시킬 것을 상징하는 '화해의 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물은 백성들이 돌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먹기에 좋은 열매와 약재료가 될 만한 푸른 잎과 풍부한 고기(수자원)을 보장하는 축복의 물이요, 생명의 물이다. 즉 에제키엘은 '이 물'이 축복과 풍요를 상징한다는 구약 성경의 일반적인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공존하는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강조한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이 물'은 창세기 2장 9-17절에서 묘사된 에덴에서 발원하여 생명 나무를 비롯한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한, 첫 창조의 동산에서 흘러나온는 물의 개념과 관련된다. 또한 에제키엘서에서 제시되는 '이 물'은 요한 묵시록 22장 1-5절에서 '새 예루살렘'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으로 표현된다.
에제키엘서의 물이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회복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처럼 요한 묵시록의 물도 하느님과 어린 양의 어좌로부터 나와서 흘렀다. 그리고 에제키엘서의 물이 강가에 무성하고 풍성한 나무를 자라게 한 것처럼 요한 묵시록의 물도 강 이쪽 저쪽에서 생명 나무를 자라게 하고 다달이 열두번 열매를 맺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게 한다. 또한 이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하느님만이 영원토록 왕으로 다스리시는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가 유지된다.
요한 묵시록에서 에제키엘서의 '이 물'을 종말론적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에제키엘서에서 사용된 '이 물'에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물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에제키엘서의 '이 물'은 하느님과 관계의 회복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첫 창조사업을 회복하는 물이면서 동시에 재창조 사업을 완성하는 즉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물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지 옛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치적 해방이나 민족적 회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무너진 성전 건물을 다시 지어 옛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다시 이루려는 외형적 번영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에제키엘서 47장의 8절의 '이 물'의 개념을 통해 새로운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앞으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나 외형적 발전과 성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영광 회복과 그 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온 세상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풍요와 즐거움을 맛보고 체험하며 살도록 하는, 하느님 나라의 건립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간다' 에제키엘서 47장 1-5절은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일반 성인(成人)의 키를 훨씬 넘길 정도록 깊고 넓은 강을 이루었다는 내용이었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은 그 물이 동쪽으로 계속 흘러가 아라바를 지나 사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라바'(arabah; 구약에서 평지, 사막, 나룻터로 번역)는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 남북 방향으로 가로질러 형성되어 있는 저지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아라바는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뻗은 모양을 하며, 60% 이상이 지중해 해면보다 더 낮은 극저지대를 형성하였다. 예루살렘의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자연스럽게 고지대인 서쪽의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동쪽의 요르단 계곡 쪽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다시 사해 인근의 아라바 저지대를 지나 사해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상반절은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고, 후반절은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로 인해 그 바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한편 '되살아난다'에 해당하는 '웨니르페우'(wenirpheu)의 원형 '라파'(rapha)는 '고치다' 혹은 '치료하다'의 의미이다.
특히 '라파'가 창세기 20장 17절에서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했다가 그의 가문의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였는데,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한 뒤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가 열려 다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고쳐 주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은 죽은 바다가 되살아났다는 즉 무생물이 생물이 되었다는 뜻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생명체가 잉태되거나 번식되지 못하는 바다가 생명이 살 수 있는 바다로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라파'(rapha)의 이런 의미를 살려 본문을 의역하면, '그러자 그 물이 고침을 받아 생물이 살게 되었다'가 된다.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나온 물이 염분이 많아 생물이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죽음의 바다를 고쳐서 생물이 살 수 있는 생명의 바다로 변화시킨 것이다.
여기서 요한 복음 4장 13~14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벳자타 못가 병자치유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전하는 거짓의 입을 막읍시다. (요한5,1-16) 1 그 뒤에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 하느님께서 싫다 하신 그 축제(이사1,14)에 예수님은 왜 가셨을까요?
2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 벳자타- ‘자비의 집’ 이라는 뜻입니다.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 하느님의 뜻에 사람(세상)의 생각 그 뜻을 섞어 만들어 낸 변절된 이야기입니다.
5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6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 하느님의 자비를 뜻하는 물이 당시에 유다를 지배했던 로마(세상)의 잡신이 들어와~ 사람의 뜻, 육의 건강을 비는 구원에 헛된 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비의 말씀 앞에 그 사람의 말, 자신의 말을 앞세웁니다.
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8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9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 사람이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얻은 건강(용서)입니다. 벳자타(자비의집)는 안식을 주는 곳,그 자비의 집으로의 회복입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 법으로 지키는 안식을 요구합니다. 사람의 생각 그 규정과 교리를 앞세워 안식을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 예수님께서 괜찮다, 용서하신 그 자비의 안식인데~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 하느님의 자비의 안식, 그 쉼을 계속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거짓 가르침이 계속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 거짓, 사람의 규정과 교리를 받아들이면 처음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 오시어 성전에서, 성전의 의미로 다시 말씀을 주십니다. *성전- 하느님의 자비, 진리이신 예수님 이십니다.(요한2,21)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로마3,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 하느님의 자비로 얻은 안식은 믿음으로 이어져야 계속 지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받은 용서, 구원, 그 진리의 깨달음, 그 믿음만이(요한14,6) 사람의 규정과 교리, 그 거짓 가르침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오늘 그 거짓 가르침을 따라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호세4,6-9) 6 나의 백성은 예지가 없어 망하리라. 네가 예지를 배척하니 나도 너를 배척하여 사제직을 수행하지 못하게 하리라. 네가 네 하느님의 가르침을 잊었으니 나도 너의 자녀들을 잊으리라. 7 그들이 많아질수록 이렇듯 나에게 죄를 지었으니 나도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어 버리리라. 8 그들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살며 내 백성이 죄짓기만 간절히 바란다. 9 백성도 사제도 똑같이 되리라. 나는 그들이 걸어온 길에 따라 벌하고 그들의 행실에 따라 갚으리라. = 성경을 도덕과 윤리로 보고 행하면 심판을 받을 것이고 하늘의 대속, 그 진리로 깨달아 따랐다면 십자가로 용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 예수님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 그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박해를 견디어 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눈물도 슬픔도 미움도 원망이 없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 , 그 하늘의 삶이 기다랍니다. ♡ 아멘 오늘 호세아서의 말씀을 꼭 알아들읍시다.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5,1-16)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4ㄴ)
병의 치유를 받은 사람이 성전에 들어간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요한 복음 5장 14절의 '만나시자'에 해당하는 '휴리스케이'(heuriskei; found)는 3인칭 현재 능동태인데, 이 동사의 주체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 만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만나신 이유는 주님께서 그에게 자신을 비로소 나타내시고, 그 사람에게 다시 죄를 짓지 말도록 경고하시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3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병으로 고생하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죄였음을 알게 한다.
'다시는 ~마라'에 해당하는 '메케티'(meketi; no more)는 '이제는~아니'(no longer), '이제부터는~아니'(not from now on)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명령법과 함께 쓰여 금지를 나타낸다.
또한 '죄를 짓지'로 번역된 '하마르타네'(hamartane; sin)는 '하마르타노'(hamartano)의 현재 명령형이며,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동작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하거나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원래 '하마르타노'(hamartano)동사의 기본 뜻은 '과녁을 맞히지 못하다'인데, 하느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어긴 것을 가리키는데 쓰인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타'(hata)인데, '하마르타노'(hamartano)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행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목적 혹은 표준을 놓쳐버리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38년동안 앓아오던 병을 치유받은 사람에게 하신 것은 과거의 죄는 용서받았으니, 앞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만일 죄짓는 일을 반복한다면, 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고받았다. 여기서 '더 나쁜 일'로 번역된 '케이론~티'(cheiron~ti)는 '더 나쁜 어떤 것', '더 못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즉 38년동안 그를 지배하던 질병보다 더한 질병이나 어떤 더 나쁜 상태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경고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