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생명을 주는 나의 살 (요한6,44-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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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4-22 | 조회수1,12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2021년 4월 22일 목요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생명을 주는 나의 살 (요한6,44-51)
제1독서<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사도8,26-40) 그 무렵 26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27 필리포스는 일어나 길을 가다가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로서, 그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28 돌아가면서, 자기 수레에 앉아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었다. 29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가서 저 수레에 바싹 다가서라.” 하고 이르셨다. 30 필리포스가 달려가 그 사람이 이사야 예언서를 읽는 것을 듣고서,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러자 그는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서, 필리포스에게 올라와 자기 곁에 앉으라고 청하였다.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33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34 내시가 필리포스에게 물었다. “청컨대 대답해 주십시오. 이것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하는 말입니까? 자기 자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35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 36 이렇게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 내시가 말하였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37)·38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39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40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화답송 시편 66(65),8-9.16-17.20(◎1) ◎ 온 세상아,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 알렐루야. ○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찬양 노래 울려 퍼지게 하여라. 그분이 우리 영혼에 생명을 주시고, 우리 발이 흔들리지 않게 하셨네. ◎ ○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모두 와서 들어라. 그분이 나에게 하신 일을 들려주리라. 내 입으로 그분께 부르짖었으나, 내 혀 밑에는 찬미 노래 있었네. ◎ ○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당신 자애를 거두지 않으셨으니, 하느님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6,44-5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4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8,26~40)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26)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26)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선교와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기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8장 4~25절에 이어,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부터 40절까지는 필리포스의 에티오피나 내시 선교 및 서부 해안 지역 선교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리포스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는 '주님의 천사' 즉 '앙겔로스 데 퀴리우'(anggellos de kyriu)는 누구인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의 천사' 혹은 '주님의 사자'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천사'를 네 번 언급한다. 즉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5,19), 필리포스에게 지시하는 주님의 천사(사도8,26), 감옥에서 베드로를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12,7~10), 헤로데를 내리친 주님의 천사(사도12,23)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님의 천사'는 다른 곳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다. 즉 사도행전 8장 29절과 39절에 다시 '성령','주님의 성령'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절의 '주님의 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위해 도와주는 같은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등장하는 데는 특별한 선교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현재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고, 계속해서 더 큰 선교의 역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 혹은 '외딴길'이라고 일컬어지는 땅으로 보내지며,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완전한 주관하심 가운데 그분에게 이끌려 이제까지의 복음 선교의 터전 사마리아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어 보이는 광야로 가야 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일어나 ~ 가거라'
'일어나'로 번역된 '아나스테티'(anastethi)의 원형 '아니스테미'(anistemi)는 신약 성경에서 108회 사용될 정도로 매우 자주 나타나며, 그 의미도 문맥에 따라 좌우된다.
본문에서는 '준비하라'(get ready)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여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는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사람에게 보다 적당한 명령이다(마르1,35). 따라서 필리포스가 이 명령을 듣게 된 상황이 잠자는 동안의 꿈속이나 환상이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본문의 두 단어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 '일어나'는 부정(不定) 과거이며, '가거라'는 현재이다. 이것은 '일어나'동작은 일시적인 것이며, '가는 것' 즉 여행하는 것은 지속적인 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필리포스의 복음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쉼없이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제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의 행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먼저 '남'(南)으로 번역된 '메셈브리안'(mesembrian)의 기본형 '메셈브리아' (mesembria)는 '중간의', '한가운데의'를 뜻하는 '메소스'(mesos)와 '날'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쪽'이라는 뜻과 함께 '한낮의'(midday), '정오쯤'(사도22,6)이란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남쪽으로'로 번역된 '카타 메셈브리안'(kata mesembrian)는 '한낮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필리포스가 받은 지시가 매우 특이한 것이 된다. 그는 한낮에, 즉 따가운 햇볕아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벼려진 길을 가야만 했다.
또한 '외딴길'로 번역된 '에레모스'(eremos)도 '광야'나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길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버려진', '사람이 살지 않는'을 뜻하는 것으로서 '가자'(Gaza)지방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특히 사도행전 8장 36절의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를 참조할 때, '외딴길','황폐한 길'이 더 자연스럽게 보여 대다수 번역본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필리포스의 선교와 세례의 집전은 '주님의 천사'(26절), '성령'(29절), '주님의 성령'(39절)의 지시와 인도하심으로 되어졌다. 즉 필리포스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그 전(全)과정에 있어서 성령 주도적이며, 성령이 세밀하신 간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잡아채듯 데려가셨다'에서 '잡아채듯 데려'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가? 원문상으로 볼 때 '헤르파센'(herpasen)는 '데려가다', '잡아채 가다'를 뜻하는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不定) 과거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4회 쓰이는데, '빼앗아 감'(요한10,28), '파괴의 위험에서 구함'(유다23절), '신속히 잡아 데려가는 것'(요한6,15; 사도23,10), '한 사람을 신비롭게 혹은 매우 빨리 다른 장소로 옮김' (묵시12,5; 2코린12,2.4; 1테살4,17)등을 의미한다.
특히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7절의 경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동사를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필리포스는 단순히 길을 인도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붙들림에 의해 다른 장소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사가가 사도행전 8장 39절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선교에 있어서는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간섭,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에티오피아 내시는 자신에게 성경을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세례까지 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자기 길을 갔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영적 기쁨이 그의 상황을 압도할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내시는 자신의 바로 곁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세례까지 베풀어 주던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적 기쁨에 흠뻑 젖어 기쁨으로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는 삶> 놀던 물이 좋다고 사람이 자기가 살던 세상을 고집하면 그 세상과 함께 땅에 갇혀(지옥) 하늘의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요한6,41,44-51)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 앞 29절에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셨는데 사람들은 보이는 표징을 계속 요구하며 믿겠다 합니다. 그래서 35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로 답하시며 그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의 빵을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계속 육의 생명을 위한 빵으로 동문서답으로 요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수군거리기 까지 합니다. 수근 거리다- (공기죠) 불평하다 투덜거리다.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의 빵으로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그 하늘의 빵을 육을 위한 빵으로 계속하여 듣고 요구하는, 불평하는 그들이 안타까워~ 하셨던 말씀을 다시 반복하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임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발 당신을 하늘의 생명으로 알아 먹으라고~~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또 37절의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 오는 사람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더 강화하신 말씀으로~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 성경을 올바로 깨닫게 되면,입니다.
(요한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예수님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심입니다.
47 내가 진실로진실로(진짜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 40절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의 반복입니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35절 내가 생명의 빵이다.) = 부정함(빵5 물고기2)을 받아 짊어지시고 깨끗한 생명의 빵으로 돌려주신 그 빵입니다.
(이사53,4)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 우리의 부정한 고통, 병고(죄의식 두려움 불안), 그 저주를 짊어지시고 천대받은 자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 받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 주신 그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빵입니다.
(요한5,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믿는 이들에게 질병이 없어야 된다는 말리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시에 찔리는 질병, 그 고통을 달고 살았던 사도 바오로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까? 육의 고통은 고통의 우리, 곧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외아들을 대속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그 사랑으로 이끄시어 구원의 사랑과 하나 되게 하는 도구입니다.(히브12장참조)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 만나를 육을 위한 빵으로 먹었기에 죽었습니다.
(신명8,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 역시 33절의 반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결론입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생명을 주는 빵이 살인데~ 앞 신명기 8장 3절에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그 ‘말씀’이 생명을 주는 주님의 살입니다. 우리가 그 그리스도의 몸, 성체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 내 뜻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새 계약으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루기22,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만나와 하늘의 빵-‘그리스도의 몸을 하늘의 생명이 아닌 육의 생명을 위해 먹고 마시고 있음을 깨달아라’ 주신 오늘 말씀입니다. 본문 44절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 이끌어(헬피우)- 어부가 그물로 ‘끌어 올리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끌고 가시는 이끄심입니다. 물고기가 스스로 갑판 위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렇듯 하느님께서 세상 물에서 곧 육의 빵을 고집하는 그 삶에서 끌어 올리시는 그 구원으로 이끄심입니다.
(1코린15,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 육을 위한 보이는 현세만을 위한 신앙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생명, 곧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는 삶, 그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아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주실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당신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을 내비치셨다(마르10,45).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영적 지각력이 결핍된 유다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여기서 '내가 줄'에 해당하는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는 '나는', '내가'라는 뜻을 지닌 인칭 대명사 '에고'(ego)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강조 용법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51절 서두에 나오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나는~이다'의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가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복음 6장 51절 전체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유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모세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신 것이다(히브3,5.6).
모세나 다른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에고 도소'(ego doso), 즉 '내가 준다'거나 '내가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주인뿐이다.
여기서 '도소'(doso; will give)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예고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진행적인 의미도 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은 예수님만이 지금 현재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즉 영혼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사도4,12).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당신 자신의 살을 빵으로 비유하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성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의미와 같다(마태26,26).
요한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 기사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51절과 더불어 55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교훈으로 성체 성사 제정 기사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와 중복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기록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수와 신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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