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란도란글방 / 반용부봉(攀龍附鳳) (창세50,18-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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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7-10 | 조회수8,256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공동번역성서) 2021. 7. 10 [연중 제14주간 토요일] 도란도란글방 반용부봉(攀龍附鳳) (창세50,18-21) 18 형들도 울며 그 앞에 조아렸다. '이제 우리를 종으로 삼아 다오. 19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싶습니까?' 20 하면서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21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반용부봉(攀龍附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이 승천을 할 때 용의 등에 착 달라붙어 어부지리로 승천을 하는 봉황의 모습을 가리켜 반용부봉이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권세 자에게 아첨을 하여 떡고물을 챙기는 아부꾼의 모습을 빗대어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단어를 볼 때마다 우리 성도의 구원의 현실이 바로 반용부봉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업적도 없는 무력한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등에 착 달라붙어 예수님의 승천에 어부지리로 동행하여 하느님 나라로 올라가는 것이 구원이니까요. 성도는 그렇게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에 의해 반용부봉의 모습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창세기 50장에는 바로 그 반용부봉의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창세기의 마지막 장인 50장의 내용은 어떻게 보면 조금 허탈하고, 모자라고, 어중띠어 보입니다. ‘한 처음(太初)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멋지게 시작한 창세기가 허무하게 어떤 결론도 없이 야곱과 요셉의 죽음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 창세기 50장이 담고 있는 하느님의 메시지를 잘 이해하게 되면 이보다 더 희망 있고, 확실하며, 명쾌하고, 명료한 결론이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50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➀첫 번째 부분이 1절에서 14절까지로 야곱의 죽음과 장사에 관한 내용이고, ②두 번째 부분이 15절에서 21절까지의 요셉과 형제들의 화해의 장면입니다. 그리고 ③세 번째 부분이 22절부터 마지막 26절까지의 요셉의 죽음 장면입니다. 이렇게 ‘한 처음(太初)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는 희망찬 선포로 시작된 창세기가 하느님 백성들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은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하느님의 창조가 인간의 불순종과 교만이라는 죄로 말미암아 죽음(死亡)으로 결론이 나게 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을 바울로가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로마5:12) 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 속에서 복음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야곱과 요셉의 죽음 사건 중간에 예수를 상징하는 요셉과 그 형제들의 화해 사건이 끼어 들어가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다 사망에 빠져 죽어야 하는데 하느님께서 어떤 이들을 택하여 당신의 아들의 중재로 그들과 화해를 하실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도 똑같이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적인 은혜와 주권과 권능으로 그들의 죄와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그들을 살려내시는 일이 있을 것임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 20절과 2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창세50:20~21) 20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21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웅덩이로 밀어 넣었다가 결국 이방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형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요셉에게 해꼬지를 당할까 하여 요셉을 찾아가 ‘아버지가 당신한테 전하라 하시기를 당신의 형제들이 당신에게 악을 행했다 할지라도 다 잊고 용서하라’고 하셨다고 거짓말까지 하며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정말 인간은 악하기 짝이 없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 하려 하였으나 하느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 만민의 생명을 구하는 사건으로 선용하셨다, 그러니 걱정마라’하면서 심지어 자신이 그 악한 형들과 그 형들의 후손까지 책임지고 보호하며 기르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던 인물이라 했지요? 따라서 그 장면은 자기들의 욕심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하늘의 장자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림으로 말미암아 모두 사망에 던져져 죽어야 할 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찾아오셔서 ‘걱정마라, 내가 너희의 죄와 악을 선으로 바꾸어 너희를 살려 내었으니 이제부터 걱정마라’고 하시는 하느님의 복음이 우리 성도들에게 선포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 죽음과 화해의 사건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 죄와 악과 타락, 그리고 거기에 쏟아 부어지는 하느님의 은혜, 그리고 그 하느님의 은혜의 방편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창세기 50장의 복음의 메시지는 창세기 1장에서부터 이미 계시가 되어 있던 것이었지요? 창세기 50장의 결론과 창세기 1장의 서론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세 번째 날까지의 창조 기사 속에는 하느님의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라 했습니다.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하시고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지요? 거기에는 어떤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인가요? ‘내가 반드시 어둠을 몰아내고 빛으로만 충만한 내 나라를 완성할 것 다’라는 언약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날은 창공을 가운데에 두고 창공 위의 물과 창창 아래의 물이 갈라졌습니다. 거기에는 그렇게 창공(휘장)으로 갈라진 하늘과 땅이 창창의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합이 되는 날이 분명이 올 것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날은 물과 뭍을 나누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저주의 바다, 물을 모두 몰아내심으로 마침내 마른 땅으로 상징이 되는, 뭍만 남은 하느님 나라를 반드시 당신의 열심으로 완성해 내실 것임을 언약으로 담고 있는 사건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 들어진 셋째 날까지의 틀 속에 넷째 날과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내용물로 채우십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가득 채울 새로운 피 조물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심으로,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완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신 것이 창세 기 1장의 첫 창조 기사가 담고 있는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완성이 될 것이며 하느님은 그 나라를 당신의 새로운 창조물들로 풍성하게 채워서 마침내 안식의 현실을 성취해 내실 것임을 첫 창조 속에서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둠이 물러가고, 하느님과 죄인 사이를 가르는 휘장이 찢어지고, 저주의 바다가 물러가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제 육시(낮12시)부터 구시(오후3시)까지 깔려 있던 깜깜한 어둠이 단번에 물러가고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그 때 저주의 바다가 물러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할 때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 1장부터 예시가 되었던 하느님의 열심에 의한 당신 백성들의 구원의 현실이 오늘 본문인 창세기 50장에서 조금 더 선명한 그림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는, 인간들은 그렇게 모두 죽음으로 죽어야 할 처지였지만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즉 당신의 열심으로 그들 중 얼마를 살려 내시겠다는 그 은혜의 메시지로 일관성 있게 서론과 결론을 장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 속에서 사망으로 모두 멸해져야 하는데 그 중 어떤 이들에게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참으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이 창세기만 보더라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고들어가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보면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인 ‘야곱의 죽음과 장사’의 내용과 세 번째 부분인 ‘요셉의 죽음’의 내용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의 죽음과 장사의 내용을 잘 보면 그 곳에는 애곡과 애통과 슬픔이 있습니다. (창세50:10~11) 10 그들은 요르단강 건너편에 있는 아닷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 성대하고 장중하게 장례식을 올렸는데 요셉은 아버지를 생각하고 칠일 동안 곡했다. 11 그 지방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아닷의 타작 마당에서 그들이 곡하는 것을 보고 '에집트인들이 중대한 喪事를 당했나 보다.' 하며 그 곳을 아벨미스라임 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곳은 요르단강 건너편이다. 그렇지요? 애곡과 애통, 이것이 바로 모든 인류의 결국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세 번째 부분에는 애통과 애곡이 없습니다. 심지어 요셉의 죽음은 입관으로 끝이 나 버립니다. 창세기 전체의 마지막 절인 50장 26절을 보겠습니다. (창세50:26) 26 요셉이 백십(110) 세에 죽자 사람들이 그를 썩지 않게 만들어 관에 넣어 에집트에 모셨다. 이게 창세기의 끝입니다. 왜 창세기가 요셉의 장사를 끝까지 묘사를 하지 않고 이렇게 입관에서 어정쩡하게 끝내고 있는 것일까요? 棺에 넣었으면 어디에 매장을 했다든지 장사를 지냈다든지 등의 이야기가 나와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냥 입관에서 끝이 납니다. 그것은 창세기는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의 죽음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가 입관으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죽음으로 끝이나야 하지만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대로 당신의 백성들을 세상에서 꺼내어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 내시고야 마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언약이 있기에 창세기는 죽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본문 24절과 25절을 보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창세50:24-25) 24 요셉이 일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을 터이지만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너희를 찾아 오시어 이 땅에서 *이끌어 내시고 아브라함과 이사악, 야곱에게 주시마고 맹세하신 땅으로 올라가게 하실 것이다.' 25 다시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서약을 시켰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반드시 찾아오실 것이다. 너희는 그 때 여기에서 내 뼈를 가지고 *그리로 올라가거라.' 성경은 지금 요셉의 장사를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요셉의 장사는 가나안 땅에서 치러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 요셉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증조할아버지인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통해 이르시기를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430년 만에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입성을 하게 될 것이라고 명확히 말씀을 하셨으므로 그 가나안 땅은 반드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것이고, 자신은 해골이 되어서라도 그 하느님의 언약에 동참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그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고 자기 유골을 반드시 가나안으로 가지고 올라가라고 유언을 남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죽는 순간에도 그 하느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임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 마지막 장에서 우리에게 바로 그 요셉의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11:22) 22 요셉도 죽을 때 *믿음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에집트를 빠져 나갈 일을 말하고 자기 뼈의 처리를 일러 주었습니다. 실제로 요셉의 장사가 어디에서 치러집니까? (여호수24:32) 32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에서 모셔 온 요셉의 유해를 *세겜에 묻었다. 그 곳은 야곱이 백 냥을 주고 세겜의 조상 하몰의 후손에게서 산 밭, 요셉 후손의 유산이 된 곳이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그 약속의 땅에서 요셉의 장사가 치러집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50장의 야곱의 입관은 여호수아 24장의 장사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며 그들의 장사는 하느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에서 잔치로 치러지게 될 것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땅을 다 나누어 가진 뒤 기쁨과 찬송과 희열 속에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요셉의 장사가 치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 번째 부분인 야곱의 장사에서는 애곡과 애통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장사에는 기쁨과 찬송과 희열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들의 화해 사건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닙니까? 그게 창세기 50장입니다. 역시 창세기 50장도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성경은 인간의 무력함과 하느님의 은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열심으로 그렇게 죽음으로 끝이 나야할 애곡과 애통의 우리의 장례식을 기쁨과 찬송이 있는 천국잔치로 바꾸어 주시겠다는 것을 이렇게 창세기부터 반복하여 계시하고 계십니다. 요한묵시록으로 가면 우리의 장사(葬事)가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될 것인지가 잘 그려 져 있습니다. (묵시21:3~4) 3 그 때 나는 옥좌로부터 울려 나오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집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바로 이 결론을 향하여 창세기가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의 권능이 가시화 되어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십자가 앞에서 애곡(哀哭)과 애통(哀慟)의 ‘死亡’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시는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나 아픈 것이 없는 하느님 나라가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희망하고 기대하며 오늘을 밟고 서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 무시무시한 죽음까지도 이기고 감히 ‘죽음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고 죽음을 조롱하며 살 수 있는 이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의 권세에 짓눌려 사는 분들이 아니라 죽음을 밟고 이기며 살 수 있는 분들이 된 것입니다. 죽음이 여러분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난이나, 질병이나, 멸시, 천대, 억 지, 슬픔, 고통, 눈물, 천재지변 등의 죽음의 증상들이 여러분을 절망하게하고, 분노하게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이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죽음을 소유한 주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창세기 마지막 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고전3:21~23) 21 그러므로 아무도 인간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2 바울로도 아폴로도 베드로도 이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도 미래도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23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죽음이 누구 것이라고요? 바로 우리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의 증상들인 가난이나, 질병이나, 비천이나, 슬픔, 고통, 억지 등에 휘둘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러한 것들이 모두 사라진 하느님 나라를 약속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지금 잠시 겪는 그러한 죽음의 증상들을 겪으면서 오히려 그러한 것들로부터 영원히 자유하게 만들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성도는 우리가 영원히 겪어야 할 죽음과 그 증상들을 우리 인생 속에서 조금씩 겪어내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하느님의 은혜와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배워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거기에 짓눌려 자포자기하고 절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영원한 안식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 그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 죽음에게 삼켜져 그 죽음과 함께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기에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육신의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에 그 죽음에게 ‘어서 문 열어라’하고 호통을 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육신의 죽음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죽음은 죄의 代價가 아니라 오히려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인 것입니다. 10여년전 세상을 떠난 최정미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이제 38살밖에 안 된 젊은 아낙입니다. 그 분에게는 당시 7살 난 딸 은서와 4 살배기 아들 승현이라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분은 나면서부터 척추 장애와 소아마비를 앓았던 1급 장애인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둘째가 태어나던 해에 가출을 해 버렸습니다. 그 분은 아이들을 데리고 풀빵 장사를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 가고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풀빵 장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 불 수 없었던 최정미씨는 일주일중 5일은 아이들을 탁아소에 맡기고 금요일 밤이나 되어서야 아이들을 찾아오는 그런 삶을 수년간 살아 왔습니다. 아이들은 주중에는 그야말로 고아아닌 고아처럼 살았습니다. 그런 고단한 인생 속에 1년전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최정미씨에게 위암 말기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지만 최정미씨는 아직도 어린, 아이들을 위해 자신이 죽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열심히 치료를 했습니다. 정말 이를 악물고 모든 치료를 감내해 냅니다. 어떠세요? 지독하게 불행한 인생이지요? 위의 70%를 잘라낸 최정미씨는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그 와중에 풀빵장사를 계속해야 했습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말기 암 환자가 한겨울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서서 풀빵을 팝니다. 그게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아이들이 엄마의 풀빵 리어카로 달려옵니다. 두 아이는 일주일간 못 본 엄마에게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릅니다. 설날 최정미씨는 떡국을 끓여 아이들과 함께 밥상에 앉았습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하는 식사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합니다. 그런데 최정미씨는 세 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고, 이미 암이 임파선과 다른 장기로 확대 퍼져있었으며, 복수가 다차 있었기 때문에 그 떡국을 목으로 넘길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린 딸 은서와 승현이가, 맛있으니까 ‘엄마도 어서 먹어 엄마’ 하면서 엄마의 입에 떡국을 한 숟갈을 떠서 넣어줍니다. 최정미씨는 아이들이 떠 먹여준 떡국을 씹으며 그만 눈물을 터 뜨렸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둔 엄마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며 펑펑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들이 너무나 소중한데 먼저 떠나면 아무도 그 아이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그런 엄마를 끌어안고 함께 엉엉 웁니다. 참으로 기특한 것이, 7살짜리 딸 아이 은서가 탁아소의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들 때를 기다렸다가 모두 다 잠이 든 것이 확인이 되면 늘 일어나 엄마를 위해 기도를 합니다. ‘하느님, 우리 엄마, 이제 더 이상 병원에 다니지 않게 해 달라고, 하루속히 엄마가 나아서 우리 세 식구 함께 모여서 살게 해달라’고 울면서 기도를 합니다. 그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과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 아이가 너무 일찍 자라버린 것입니다. 최정미씨도 하느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제가 살아야 하는 것은 제 욕심이 아닙니다. 제가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하느님, 암으로 인한 이 고통을 평생 지고 가도 좋으니까 아이들과 함께 만 있게 해 주세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해 7월 31일 최정미씨를 불러 가셨습니다. 지지리 복도 없는 인생이 하느님의 침묵 속에서 결국 죽어 버린 것입니다.(MBC 휴먼다큐 ‘사랑’) 하느님이 좀 매몰차다 싶지 않으세요?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그런 어린 아이와 병든 어미의 처절한 기도를 들으시고도 그냥 무시 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보다도 정이 없는 그런 차가운 분이신가요?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이 땅에서의 행복과 풍요와 평안과 치유가 아님을 그 사건을 통해 또 한 번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느님께서 최정미씨와 7살짜리 딸 은서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녀의 병을 고쳐주셔서 행복하게 한 평생 살게 하시는 것이 하느님다운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봐야 가난한 풀빵장수, 척추장애, 소아마비 환자인 최정미씨가 몇 년이나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앞으로 40년? 50년?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 건강하게 자식들과 40년, 50년 해로하신 분들 계시지요? 정말 그 기간 이 행복하기만 하셨나요? 그렇게 살아있는 것만이 복입니까? 이 땅에서 그 자녀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이 제 곧 헤어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고자 하는 행복은 40년, 50년 정도의 그런 유한한 행복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행복은 영원토록 유효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질 또한 이 세상의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찾아볼 수도 없는 완벽한 것입니다. 그것과 척추장애, 소아마비, 풀빵장수로서의 50년간의 행복과 비교를 해 보세요. 만일 하느님께서 후자를 포기하면 전자를 주겠다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최정미씨의 병을 고쳐주어 앞으로 한 50년간 그녀가 그녀의 자녀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없는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안식을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선물하시기 위해 죽음과 죽음의 증상들을 그녀의 가정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들은 그러한 무시무시한 죽음과 죽음의 증상 속에서도 하느님의 은혜의 권능으로 하느님을 저주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분을 떠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 어떤 것도 하느님 백성들의 천국 입성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암이 내 백성을 빼앗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그까짓 죽음이 내 백성을 나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하느님은 당신의 권능과 당신의 열심,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당신 백성들의 믿음을 온 세상에 자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저는 병원에 근무하는 한 지인으로부터 그 최정미씨가 임종 때 의사에게 한 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최정미씨가 거의 임종 직전에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러 들어와 자신을 위로하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예수 믿으세요? 안 믿으시지요? 큰 일 났네요. 내가 이 암에서 낫는 것보다 선생님이 회개하는 것이 더 급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죽으면 하느님께로 갈 것이지만 선생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예수를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는 자주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나는 하느님으로 충만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내 영혼을 가득 채웁니다.’라고 말씀을 하셨답니다. 최정미씨는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분은 의사와 간호사들 앞에서 ‘죽음아, 어서 문 열어 라. 내가 우리 아버지 집으로 들어간다’하고 외치고 가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까? 그 무시무시한 죽음 앞에서 오히려 다른 이들의 구원을 걱정하며 ‘죽음아, 문을 열어라’하고 외칠 수 있는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어떻게 그 애곡과 애통의 죽음의 현장이 희망과 기대와 환희의 자리가 될 수 있었습니까? 우리에게 임해야 할 애곡과 애통과 슬픔과 저주를 하느님의 아들이 모두 받아버리심으로 하느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사실은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10절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창세49:10) 10 왕의 지팡이(홀)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지휘봉이 다리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참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분(실로)이 와서 만백성이 그에게 순종하게 되리라. 이건 야곱이 유다에게 준 축복의 유언입니다. 여기에서 ‘실로’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그 실로를 마치 인격체처럼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로 가면 실로가 어디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예레7:12) 12 내가 너희의 *살 곳으로 예전에 지명했던 *실로에 가 보아라. 내 백성 이스라엘이 못되게 굴다가 나에게 어떤 벌을 받았는지 가 보아라. 실로는 보다시피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처음 두고 지으신 하느님의 장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첫 장막을 떠나십니다. (시편78:56~60) 56 그러나 이 백성은 지존하신 하느님을 시험하고 거역하여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며 57 선조들처럼 엇나가서 배신하였고 말 안 듣는 활처럼 변절하였다. 58 산당에 모여서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우상을 섬겨 그의 질시를 받았다. 59 이것을 보시고 하느님은 크게 진노하시어 이스라엘을 아예 버리셨으니 60 인간들과 지내시던 장막 *실로의 거처를 버려두고 가셨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 처음 장막에서 떠나시는데 그 이유가 당신 백성들의 패역(敗易)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 아담이라는 존재가 타락을 하자 하느님께서 그를 떠나셨지요? 그 그림과 비교해서 이해를 해 보세요. 그런데 이 시편 78편을 잘 읽어 보면 거기에 요셉과 유다의 이름이 거명이 됩니다. (시편78:67~72) 67 그러나 요셉 가문은 아예 *버리셨고 에브라임 지파를 뽑지 않으셨으며 68 유다 지파를 뽑으셨으니 곧 사랑하시는 시온산이었다. 69 거기에, 당신께서 머물 거룩한 집을, 땅처럼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터 위에 하늘처럼 드높이 세우셨다. 70 양우리에서 일하던 다윗을 뽑으시어 당신의 종으로 삼으셨으니 71 어미양을 보살피던 그를 데려다가 당신의 백성, 야곱과 당신 소유인 이스라엘의 목자로 삼으셨다. 72 다윗은 이 백성을 한 마음으로 보살피며 슬기로운 손으로 인도하였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싫어 버리시고 유다 지파를 선택하십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유다의 축복 사건에 미리 예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자기의 서모인 빌하를 강간하는 바람에 장자권을 잃었습니다. 차자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자기 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겜의 족장과 그 땅 남자들을 모조리 도륙을 하고 약탈한 관계로 장자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야곱의 첫세 아들은 모두 타락한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는 모형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럼 장자의 명분은 누구에게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넷째 유다에게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상에 보면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갔다고 나옵니다. (역대상5:1-2) 1 이스라엘의 맏아들 르우벤의 계보. 그는 아버지의 소실을 범한 탓으로 맏아들의 상속권을 동생 요셉의 두 아들에게 넘겨 주고 맏아들이면서도 족보에 맏아들로 오르지 못했다. 2 유다가 동기들 가운데서는 세력이 컸으므로 그의 혈통에서 영도자가 났으나 장자권만은 요셉에게 있었다. 그렇지요? 그런데 진정한 하늘의 장자,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의 족보에서 나옵니다. 장자의 대가 유다로부터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장자입니까? 요셉입니까? 유다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성경에서 장자라 함은, 진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이들을 장자라 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요셉은 무죄한 자로서 모함을 받고 수난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부모 형제들을 살려내는 예수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 예수의 모형인 요셉 앞에 하느님의 백성들의 상징인 나머지 형제들과 부모들이 엎드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그 현실을 미리 모형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78편에 보면 그 요셉의 지파를 하느님이 버리셨다고 하지요? 그것은 요셉이 아무리 예수님의 모형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었다 할지라도 그 역시 진짜 메시아는 아님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가 하느님에 의해 유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는 왜 장자의 대를 잇게 된 것인가?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서 순서상으로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예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창세43:8~9) 8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다짐하였다. '그 애를 저에게 맡겨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곧 떠나 가겠습니다. 아버지나 우리 자식들이나 우리나 다 살아야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9 제가 그 애를 책임지겠습니다. 그 애를 저에게서 찾으십시오. 만일 그 애를 다시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세우지 못하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제 평생에 아버지께 죄인이 될 것입니다. 유다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려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유다는 애굽에서 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당당하게 애굽 총리 앞에서 자신이 종으로 남을 테니 동생을 보내달라고 간청을 합니다.(창세44:32~34) 어떻게 유다가 이런 희생과 헌신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유다는 원래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리며 자기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며느리 다말이 약속의 후손의 탄생을 위해 자신이 창녀가 되는 희생과 헌신의 사람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 다말이 창녀가 되어 망해버려야 하는 유다의 집안에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 그 집안이 축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유다는 십자가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수가 축복을 받는 그 하늘의 축복의 원리를 유다가 터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배운 유다가 아버지와 애굽 총리 앞에서 바로 그 하느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메시아 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도 유다도 모두 실로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그 어떤 탁월한 인재도 메시아 일 수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메시아의 사역을 대신 할 수 없음을 메시아의 모형인 그 두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하느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실로에 진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살펴본 것처럼 실로는 처음으로 하느님의 이름이 두어진 장막입니다. 쉬운 말로 구약의 옛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옛 성전은 다른 말로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셉과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 실체로서의 예수는 아닌 구약의 성전과 율법과 제사의 모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요셉과 유다가 희생과 헌신과 낮아짐의 모형으로 등장은 했지만 그들의 그것이 사람을 축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둘 다 장자의 역할은 했지만 장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밟고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진짜 장자이신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약의 옛 성전을 가리키면서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모형으로서의 실로는 축복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실로에서는 이미 하느님이 떠나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 성전이 상징하던 진짜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옛 성전이 되셔서, 즉 율법이 되셔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을 하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지켜 내셨습니다. (요한2:19-21) 19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20 그들이 예수께 '이 성전을 짓는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는데, 그래 당신은 그것을 사흘이면 다시 세우겠단 말이오?' 하고 또 대들었다. 21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지금 이 구절에 나오는 성전을 오늘 본문의 ‘실로’로 바꾸어서 읽어보세요. 예수는 하느님의 이름이 처음 두어졌던 실로를 허무시러 오신 진짜 실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라는 지명이 마치 인격체인 것처럼 ‘실로가 오실 때까지’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49장의 유다에게 주어진 축복에 요한복음 2장 19절, 20절의 내용이 이미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지명인 실로가 의인화 되어 기록이 되어 있는지 아시겠지요? 구약의 옛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제사가 수천 년간 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가 인간의 구원에 유효하지 못했던 것처럼 요셉과 유다의 희생으로 형제들과 집안사람 들이 살아나고 축복을 받는 일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진정한 왕 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를 향한 유언에서 진짜 왕이 오게 될 것임이 告知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실로가 되셔서 죽으시고 葬事된바 되셨으며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죽음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이나 죽은 나자로의 애곡의 현장에서 그들을 살려내시는 표징을 보여주셨는지 아시겠지요? 우리 성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죽음의 증상들은 다 뭡니까? 교육용 교보재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영원히 처하게 될 죽음과 멸망의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지를 몸으로 조금 체험하라고 그러한 죽음의 증상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 죽음의 증상들이 여러분을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죽음을 종으로 부리며 당당히 일어나십시오. 그 건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아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들이 지금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늘의 왕들입니다. 그까짓 죽음과 죽음의 증상들에게 짓눌리지 마세요. 반용부봉(攀龍附鳳), 우리는 그렇게 면목 없이 예수님의 등에 업혀 하느님 나라에 입성을 하게 된 수지(收支)맞은 성도(聖徒)들입니다. 그 애곡(哀哭)과 애통(哀慟)의 죽음을 잔치로 바꾸어 주신 하느님의 은혜(恩惠)와 사랑을 굳게 믿고 잠시 여러분에게 닥쳐온 고난(苦難)과 고통(苦痛)의 시간들 잘 이겨내십시오. ~이로서 창세기를 모두 마칩니다. 수고했네요. 작은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찬미 받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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