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목요일(백)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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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1-07-28 | 조회수4,257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복음서에서 여러 차례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8.2)로 소개되어 있다. 그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십자가 밑에(마태 27,56참조).예수님의 무덤 곁에 있었던 여인이다(마태 27,61참조). 또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첫 번째 사람으로(요한 20,11-16참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일러 주었다(요한 20.16 참조).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가 시신이나마 모셔 가려 하였던(요한 20.16 참조)그의 모습에서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에 대한 공경은 12세기부터 시작되어 널리 퍼졌다. 제1독서<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아가의 말씀입니다. 3,1-4ㄴ<또는 2코린 5,14-17> 신부가 이렇게 말한다. 1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였다네. 2 ‘나 일어나 성읍을 돌아다니리라. 거리와 광장마다 돌아다니며,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으리라.’ 그이를 찾으려 하였건만 찾아내지 못하엿다네. 3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4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아가서에서는 성읍과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사랑하는 이를 찾은 신부의 기쁨을 노래한다. 복음<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0.1-2.11-18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쪽으로 몸을 굽혀 12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네가 모셔 가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 16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18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하면서,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이영헌 신부님) 1절 예수가 부활한 날 , 곧 “주님의 날”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인들의 표현으로서 일요일에 해당한다. “아직도 어두울때에”는 예수의 부활을 아직 믿지 못한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름 아침”은 예수의 십자가형 선고가 이루어진 빌라도의 심문이 “이른 아침”에 이루어졌듯이 예수의 부활 증언도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자 한 듯하다. “막달라”는 갈릴래아 호수 남서편 지명으로서 마리아의 출생지를 가리킨다. 무덤입구를 막은 큰 돌을 가리킨다. 2절 “다른 제자”란 베드로와 함께 언급된 익명의 “다른 제자”와 관련된 듯하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빼돌렸다는 당시 유다인들의 소문과는 달리 누군가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서 가져가 버렸다는 뜻이다. 이 말은 다른 대목에서도 막달라 마리아의 입을 통해 반복된다(13.15절) 물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부활을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없다는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림으로써 급히 무덤에 가서 확인토록 했을 따름이다. “우리”라는 표현은 무덤에 찾아간 이가 막달라 마리아 혼자가 아님을 시사한다. 일부 사본에는 “우리”대신 “나는”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비판의 원칙에 따라 전자에 더 신빙성을 둔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과 달리 무덤에 찾아간 동기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관복음에서처럼 예수의 시신에 도유하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장례 때 이미 도유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슬픔 때문에 곡하러 갔을 것이다.(11.31 참조) 11절 현 문맥에서는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무덤으로 돌아왔다는 말도 없이 매끄럽지 않게 연결되어 있으나 원래는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간 내용에 직결되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리아가 “울고 있었다”는 표현은 지속적으로 오래 슬픔에 잠겨 있었다는 뜻으로서 예수의 죽음보다는 시신이 없어진 데 대한 슬픔과 걱정을 가리킨다. 12절 흰옷 입은 천사들의 발현은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시에 대한 묵시문학적 관념이나 표상으로서 많이 언급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실제적 증거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서는 부활 메시지를 전하는 공관과 달리 두 천사가 예수의 시신이 놓인 곳을 가리키면서 시신이 무덤 안에 없다는 것을 증거해줄 뿐이다. 따라서 천사의 입을 통한 빈무덤 사건의 설명이나 천사의 발현 자체와는 거리가 먼 묘사다, 두 천사를 보고 막달라 마리아가 전혀 놀라지 않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3절 천사 발현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 장면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사에 대한 두려움이나 놀라움도 없이 보통사람 대하듯이 대화를 나눈다. 천사의 물음은 상황에 알맞은 내용으로서 또한 부활한 예수의 입에서도 반복된다. 막달라 마리아의 대답도 시몬 베드로의 “애제자”에게 알린 내용의 반복이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상봉 장면을 전제로 한 서술로 볼 수 있다. 즉, 부활한 예수 자신이 부활의 신비를 계시한다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 역점을 둔 것이다. 14절 막달라 마리아와 천사의 상면에서 부활한 예수와의 상봉으로 장면이 바뀌는 일종의 서술적 기교다. 이것은 천사와의 상면 장면이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삽입되었음도 시사한다. 자기계시적 발현에 대한 부활한 예수의 주도권이 시사된 듯하다(21,4-7;루카24,13-35 참조). 15절 “여인아” 원문에 따르면 여자에 대한 자연스런 일반적 호칭이다. 없어진 예수 시신에 대한 슬픔과 걱정, 그리고 그 시신을 찾기에만 여념없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시사한다. “선생님”은 원문에 따르면 남자에 대한 정중한 호칭이다(퀴리에). 문맥에 따라 “선생님”으로 의역했다. 예수의 시신을 혹시 다른 무덤에라도 옮겼는지 묻는다. 16절 원문에는 마리아 대신 마리암으로 되어 있다. 마리아로 표기된 일부 고대 사본도 있지만, 마리암이란 셈족 계통의 표현이 더 원전에 가깝고, 랍부니라는 존칭에도 상응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이 부름은 평상시 마리아가 듣던 바로 그 음성이었을 것이다. 목자가 양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활한 예수는 믿고 찾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알아보도록 계시한다는 신학적 의미도 시사된 듯하다. “돌아서서”는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온전히 예수에게 향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다. 일부 사본에는 “그분을 알고서”. “랍부니”는 여기서 히브리어는 다른 대목에서처럼 아람어를 가리킨다. 랍부니는 아람어로서 “나의 선생님”이란 뜻이다. 랍비와 병용되지만, 좀더 정중하고 엄숙한 의미가 있다. 평상시 듣곤 했던 예수의 음성을 통해 부활한 예수를 알게 된 마리아도 이제 평상시 사용했던 존칭으로 응답한다. 양들이 자기네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라가는 것을 연상시킨다. 부활한 예수는 마리아에게 바로 지상 예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뿐이다. 마리아는 전인적으로 신뢰와 믿음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부르는 부활한 예수르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만남도 체험할 수 있었다는 신학적 의미가 시사된 셈이다. 17절 붙잡지 말고 놔두라는 이유는 우선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의 부활을 알리도록 하는 데 있다. 지체하지 말고 어서 제자들에게 가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반면에 부활 실재는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다는 것을 뜻한다. 만짐은 인간 실존 확인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부활한 예수는 현세에 맞는 인간적 방법으로 감지될 수 있는 그런 실재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신앙 안에서 만나고 체험하는 실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야 한다는 예수의 말(17ㄴ절)에서도 반증된다. 예수가 고별 때 약속한 바를 제자들에게 상기시키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한마디로 예수가 아버지께로 올라감으로 인해 제자들에게 이루어질 아버지 하느님과 일치된 공동체를 뜻한다.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이 곧 제자들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형제들”로 칭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부활한 예수는 “아버지의 집에”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이제 아버지와의 일치된 공동체를 중재함으로써 지키게 된 셈이다. 또한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한 예수는 이미 아버지께로 올라갔음을 뜻한다. 즉 예수의 죽음, 부활, 들어올려짐, 아버지께로 올라감, 영광스럽게 됨은 모두 동시사건으로서 예수의“시간”이란 말안에 함축된다. 저자는 예수의 길의 시작과 마지막만을 염두에 두고서 언급하다. 여기서 표현된 시간적 구분은 다만 신학적 내용의 관점에 따른 표현에 불과하다. 즉 제자들에게 발현한 예수는 이제 약속을 성취한 예수, 곧 아버지께로 올라간 예수라는 뜻이다. 18절 “주님을 뵈었습니다”는 예수 부활발현을 체험했다는 의미다. 예수의 부활 체험에 바탕을 둔 부활 메시지의 선포를 뜻한다. 특히 한 여자가 남자들에게 예수 부활 소식을 알렸다는 점에 유의할 만하다. 아마도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의를 지킨 대가와 관련된 듯 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는 또 다른 특혜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체험은 제자들에게 예수 부활 소식을 알리는 데 의미가 있을 뿐이다.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발현하여 성령을 주고 죄를 사할 권한과 함께 사명을 부여할 것이므로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만남은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발현한 내용을 말하기 위한 일종의 서약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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