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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녹)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 독서,복음서 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06 조회수5,002 추천수1 반대(0) 신고

1독서<주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2,6-15

형제 여러분,

6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7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아네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8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럿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9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10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와 권력들의 머리이십니다.

11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화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대 버리셨습니다.

15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고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1독서 주해(해제.역주 신교선)

6

두 언사,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조심하십시오, ...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가 편지 전체를 특징짓는다. 전자는 3.5-4.6에서 여러 형태의 권고로 구체화한다. 후자는 2,9-23에서 상세히 언급한다.

 

주문은 명령형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이다. 의미론상 그리스도 예수를”(6) “그분 안에서”(6-7) 등이 중심축을 이룬다. 6-7절에서 네 번 나오는 분사(“뿌리를 내려”,“세워지고”,“굳건해져”,“넘치도록”)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충설명한다.

 

그러므로”; 앞의 내용과 대조나 대립을 나타내지 않고 결론으로 이끄는 표현이다.(16;3.1.12참조).

 

그리스도 예수를”; 수신인들이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음을 뜻한다. 수신인들은 할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될 콜로새 공동체 구성원들이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임. 곧 세례를 받음은 그에 걸맞은 결과를 낳아야 함을 전제한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한가운데 모시고 그분을 표본으로 하는 삶을 의미한다. 이 기본원리가 콜로새서에서 구체화한다.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 삶을 말한다. 어떤 사물에 의한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란 인격체에 기초한 삶을 요청한다. “살아가다동사는 바오로 친서나 후기 서간에서 자주 발견되지만 이곳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더 근본적으로 곧 주제식 또는 표제와 같은 성격으로 사용된다.

 

7

뿌리를 내려와 뒤따르는 튼튼히 세워지고굳건해져등 세 분사는 살아가십시오의 구체적 방법을 밝힌다. 은유적인 표현은 확고함과 바탕을 강조하며 다시금 그분 안에서에 직결된다.

 

믿음으로 굳건해져”;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말하며 이는 1.2.4에서도 함축적으로 표명된다. 이 믿음은 사도적 복음선포에서 유래한 것이다.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시오”; 감사의 필요성을 절실히 나타내는 말이다. 3.17에서는 감사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요소다. 감사에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 삶이 바로 하느님 선물이라는 데 대한 반성이 전제되어 있다. 나아가 감사는 믿음이 하느님의 선사임을 전제한다.

 

8

명령문으로 시작되는 이 구절은 단순하면서도 긴급한 상황을 전제하며 그 요점을 잘 제시한다.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8절은 5-7절까지와는 현저하게 다른 분위기다. 지금까지의 호의적 입장이 돌연 바뀐다.

 

철학이란 용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단 한번 이곳에 등장한다. 여기서는 엄밀한 의미에서 철학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부정적 또는 경멸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생활방식을 말한다. “어리석은 철학에 대해 4마카 5,10-11참조.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로”; 수신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다. 내용도 의미도 없으므로 따를 가치 또한 없다.

 

동사 호리다는 신양성서 전체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정확한 의미는 빼앗다, 갈취하다이다. 이 구절에서는 진리를 왜곡하여 잘못으로 이끈다는 의미로 쓰였다. 오류의 위험성을 알리고자 하는 이 단호한 표현에서 콜로새서 저자가 처한 입장이 엿보인다.

 

조심하십시오”;동사 보다-살피다의 명령형이다. 공동체를 향한 이같은 형태의 명령형은 바오로 찬사에서도 낯설지 않은 표현이다. 바오로 후기 문헌으로는 에페5.15와 콜로새서의 이 구절을 들 수 있다. 이 명령형은 매우 뚜렷하고도 강한 표현으로 아주 중요하면서도 지금까지 매우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바를 가리킨다. 저자는 조심하십시오로써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매사에 끊임없이 새삼 점검할 것을 요청한다.

 

전통”;여기서는 사도적 전통, 사도전승과 같은 의미의 신학용어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유래하는, 그 뿌리가 사람 안에 있는 인간적 전통을 의미한다. 이같은 부정적 의미의 인간 전통과 대조적ㅇ니 차원에서의 전승에 대해 참조;“여러분에게 전파된 복음”,“에바프라를 통하여바오로를 통하여 전파된”; “하느님이 계시하시는 신비”;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2.3)

 

세상의 원리”; 우주론적 개념으로서 본디 , , 공기, 등 세상 구성의 네 원소를 청하는 헬라적 사고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저자는 세상 권세를 우상으로 숭배하며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태도를 비판한다.

 

앞에 열거한 우리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따르는이들만이 올바른 길을 걷고 있음을 강조한다. 마땅히 따라야 할 분을 따르니 안고 엉뚱한 것을 쫓는 이들 때문에 공동체가 위험에 처하게 됨을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 안에뿌리내리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이는 그분을 뒤따르는데 방해되는 다른 모든 것을 끊음ㅇ르 뜻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 곧 그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구체적 삶이 무엇인지는 뒤따르는 구절(9-23)에서 상세히 밝혀진다.

 

9

그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실존 전체를 가장 간결하게 표명하는 용어디.

신성”; 이 단어는 신약성서 전체에서 여기만 나온다.“사람들의 전통”(8)과 대조되는 말로서 인간적 진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을 가리킨다.

충만함이”; 1.19에 제시되었던 생각을 다시 한번 연상한다. 여기서 충만함이 더 구체화된다.

 

몸으로”; “육체적으로로 옮길 수 있다. 참으로 또 전적으로 함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9절에서는 아직 그리스도의 몸의로서의 교회와 직접 연관이 없어 보인다. 이 퐌련성은 10,11절에서 10,11에ㅓ 더 뚜렷이 드러난다.

 

10

충만하기 되었기”; 1.28에서 말한 완전함과 사도가 가르치고 선포하는 목표 달성은 염두에 둔 표현이다. 수신인들은 오로지 그리스도를 통ㅎ서충만해질 수 있다.

 

그분은 ...어리이십니다”; “그분은 몸의 머리, 교회의 머리시로다를 회상시키면서 진정으로 세상의 원리가 무엇(누구)인지를 다시금 밝힌다. 세상의 참 원리는 모든 창조물, 몸의 머리교회의 머리이시 그리스도라고 밝힌 다 있다. 다만 10ㄴ절에서 세상의 참 원리는 모든 권력과 권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라고 더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이같은 내용은 이미 1.16에서 포괄적으로 언급되었다. 2,10ㄴ엣 새로운 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리스도가 바로 에상 모든 권력과 권세의 참 지배자시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11

하례는 이미 잘 알려진 예식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다.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 ”손으로 행하지 않는이란 표현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은유와 착안점이 제시된다. 즉 진술되는 내용의 구원론적 차원이 드러난다. 나아가 손으로 행해지는 모든 우상적인 것들과 대립되는 신성한 차원이 시사된다.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 곧 육체와 상관없는 마음의 할례란 표현은 이미 유다교에서도 발견된다. 구약의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기를 외적 행위보다 내면화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스도의 할례”; 신학적 측면을 가리킨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이루신다. 이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체 안에서 절정에 이른다.

 

12

세례로”; 이 말로써 은유는 끈탄다. “손으로 행하지 않는 할례. ”그리스도의 할례“,”세례등 세 표현 모두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는 육체와 상관없이 그 굴레를 벗어나서 행해진다. 세례는 새로운 할례로서 손으로 거행하지 않는,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하례따. 이는 3.5.9에서 다시금 언급된다. 이 새로운 할례는 회개이며 옛것의 속박에서 해방됨을 의미한다. 마치 구약에서 할례가 야훼 백성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표지였듯이 이제는 그리스도의 세례가 그리스도에게 속함을 타나내는 구원의 표지다.

 

함께 묻혔고“; 함께는 세례를 특징짓는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함께 묻혔고”; 함께는 세례를 특징짓는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

 

죽은 이 가운데서 일으키신”; 이미 바오로 전부터 전승되는 예수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 양식이다.

 

믿음으로”; “믿음을 통하여로 직역할 수 있다. 우연은 없으며 예수 부활을 이룩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근거로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그분이란 :그리스도.

 

함께 일으켜졌습니다.”; “함게 묻혔으며와 더불어 세례를 특징짓는 표현이다. “함께 일으켜졌습니다.는 이미 성취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는 그분과 함께 살 것으로 표현된 로마 6.4.5.8의 경우와 사뭇 다르다. 로마서와 달리 콜로새서에서는 세례 안에서, 세례를 통하여 이미 성취된 구원사건이 강조된다. 곧 예수 부활을 통해 선사되는 인류 구원사건이 개인의 세례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된다.

13

또한“; 이로써 13절은 앞 구절과 병렬관계에 있다. 이제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내용을 구 체화시킨다. 9절에서 호티(”왜냐하면 ... 때문입니다)와 관련된 근거짓는 것은12절에서 끝난다. 13절에서는 1,21.22-23에서처럼 대조적인 장면이 펼쳐진다.(“한때...이제”)

 

죽었지만”: “묻혔고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느님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고 생명력을 불어넣으신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전화 후의 처지를 대조시킨다. 이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다.

 

14

빚문서는 하느님의 부기에 대한 표산으로서 그분의 의로우심과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로써 하느님과의 평화를 이룩하게 된다.

 

세례를 통해 구성된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결과적으로 빚을 탕감받고 죄의 용서를 받음으로써 하느님과의 평화를 이룩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죄의 용서 차원에서 바라본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모든 죄를 구했다고 본다.

 

15

15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인간이 죄의 용서를 받음에 따라온 결과를 이야기한다. 그 첫째 결과는 권력과 권세의 무력화다.

 

권력들과 권세들의 무력화의 동기에 대해 루카 22.53참조. 나아가 바오로의 경우 십자가의 역설적 측면에 대해 1코린 1.18-24참조.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로 옮길 수 있다. 그분은 그리스도.

그들 위에”; “그들을 제물삼아로 옮길 수 있다.

 

인간이 죄의 용서를받고 하느님과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말은 결국 세상의 모든 권력들이 허위성과 덧없음이 폭로됨을 의미한다.

 

인간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느님과의 평화를 이룩한다는 말은 결국 세상의 모든 권력과 권세들의 허위성과 덧없음이 폭로됨을 의미한다.

 

 

 

 

복음<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세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딛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서 주해(해제,역주 정양모)

12

12절은 산으로 떠나가만 빼고 죄다 가필

 

13

원래 제자사도는 다른 개념이다. 이승의 예수를 따라다니던 이들이 제자들이요, 부활한 예수를 뵙고 그분에게서 부활선포의 사명을 받은 이들이 사도들이다. 그런데 루카는 종종 열두 제자를 사도들이라 한다.

 

14

여기 야고보와 요한은 제베대오의 아들들. 이어 나오는 명단은 마르 3,18-19와 같다. 다만 타대오대신 야고보의 유다라는 것이 다른데 야고보의 유다가 어떤 사람인지 밝힐 길이 없다.

 

17

평지에서 가르치셨다하여 평지설교”,“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산상설교라 한다.

 

열두 제자의 명단을 보면 시몬 베드로와 야고와 요한이 맨 처음에 나온다. 예수께서는 이 세 제자들을 매우 아끼셨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맨 끝에 나오는데 그는 예수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시몬은 예수님한테서 게파라는 별명을 받았다고 한다. 게파는 아람어로서 바위라는 뜻이다. 바위를 그리스어로는 페트라라 한다. 그런데 페트라는 여성명사인지라 남자인 시몬에게 부적합하므로 페트로스라는 남성명사로 고쳤다. 이 페트로스를 음역하여 우리말로는 베드로라 한다. 게파. 페트로스. 베드로는 예수 생전에 제자단의 대표자 구실을 했고 제자들 가운데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뵙고 나서부터 예루살렘 목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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