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도란도란글방 / 왜 못 알아들을까 1 (루가 16;19-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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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 | 작성일2021-09-18 | 조회수2,248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공동번역성서) 2021. 9. 18. 도란도란글방
왜 못 알아들을까 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루가 16;19-31)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비유 속에는 거지 나자로와 부자라는 등장인물이 나와요. 우리는 너무 서둘러서 부자는 다 지옥 가고 가난한 거지는 모두 다 천국 간다는 유치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됩니다. 그게 민중신학이에요. 쓰레기입니다. 그거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자는 지옥(地獄) 가고 가난한 자는 천국(天國) 간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 메시지가 맞아요. 그러나 세상이 규정하고 분류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정의는 성경이 말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정의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제가 그러한 문자적 결론을 서둘러 내리지 말라고 말씀을 드린 거예요. 성경이 말하는 부자는 단순히 이 세상의 재화를 많이 쌓아두고 소유한 자를 말하는게 아니라 나라는 존재에 대한 기대와 가능성을 여전히 품은 채 그 나라는 우상의 유익과 발전과 성공을 위해 사는 모든 존재가 다 부자라 그랬죠. 그래서 평생 개뿔도 하나도 재산도 못 모은 부자가 있을 수 있어요. 그 사람 지옥 갑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는 그의 소유에 다소에 관계없이 돈이 만튼 적든 그런거에 관계없이 나는 하느님의 은혜가 없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사는 자기부인의 삶을 사는 자를 가난한 자라한다고 그랬어요.
오늘 본문의 비유는 바로 그러한 부자와 가난한 거지의 결국과 그들의 실체를 폭로하는 비유인 거예요. 이런 비유들을 읽으면서 '부자들아 너희들은 경각심을 갖고 회개해라' 이런 말씀을 하면 안 돼요. 그건 질투(嫉妬)에요. 유치한 질투. 지가 없으니까 괜히 유치한 질투하는 거지 성경은 그렇게 보는게 아닙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알렉산드리아의 구전 이야기를 약간 변형시킨 거예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 알고 있던 이야기였단 말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기 전에... 당시 애굽의 한 지방이었던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많이 살고 있었어요. 거기서 LXX 70인 역이 나온 거예요. 그들에게서 만들어져 전해진 이야기가 팔레스타인 유대 땅에 랍비들의 예화로 자주 쓰이고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이 다른 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자주 쓰던 예화였단 말이에요. 이게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어떤 가난한 율법사와 부자 세리가 살고 있었는데 율법사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잘 지키고 하느님을 잘 섬겨서 천국에 갔다. 그러나 부자 세리는 돈 밖에 모르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아서 결국 지옥에 가게 되었다. 가난한 율법사는 이 세상에서 못 먹고 못 입고 불쌍하게 살았지만 천국에 가서 천국의 맑은 시냇물을 마음껏 마실 수 있었으나 부자인 세리는 이 세상에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지옥에 가서는 그 천국의 샘에서 물을 한 방울도 얻어 마실 수 없었다. 가 그 이야기에요. 대략적인 이야기. 예수님의 비유와 비슷한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걸 뒤집어엎으시는 거예요. 선하고 착한 사람은 그들의 행위를 근거로 하여 천국에 가고, 못되고 악한 사람은 그 들의 행위에 의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완전히 뒤집어 엎어서 인간은 아무리 착한 일을 내어 놓아도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으면 지옥 가고, 아무리 한 일이 없다 해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입으면 천국에 간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게 이 비유의 주(主)된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를 이미 알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번형시킨 비유 이야기를 듣고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었겠죠? 주님이 당신의 비유 속에서 자기들을 지옥에 갈 부자, 율법사로 바꾸어 버린 거예요. 가난한 율법사로 자기들은 자기들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금 자기들을 부자 율법사로 뒤집어엎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는 훌륭하고 가난한 율법사라고 우기고 있었던 그들에게 있어서는 정말 자존심 상하고 불쾌한 비유가 아닐 수가 없어요. 그러니 예수님이 이들에게 맞아 죽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禁食)을 하고 구제(救濟)에 힘을 썼으며 힘에 지나는 연보(捐補)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그러한 자신들의 행위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 아님을 자신들의 삶으로 애써 보여주려고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 그 알렉산드리아의 가난한 율법사의 이야기를 예화로 자주 썼던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에게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위에요.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가 어떤 배경하에서 주어진 것인지를 밝히는 구절이 나와요. 바로 고 위에 구절 한번 볼게요.
(루가16,13-14) 13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14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
모든 바리새인들을 뭉뚱그려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을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비웃었어요. 왜 비웃었다고요?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웃었다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나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를 증명(證明)하기 위해 행했던 구제(救濟)와 선행(善行)과 율법(律法) 지킴이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행위(行爲)였다라는 거예요. 우리가 지는 번에 공부했던 부자 관원의 이야기에서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킨 행위가 사실은 돈을 좋아하는 행위였음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는 그에게 그럼 '니 돈 한번 버려봐'라고 했더니 못 버린 거잖아요. 그러니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킨게 그게 지금 돈을 의지하고 있는 그 행위와 똑같은 행위였다라는걸 보여주는 거예요. 거기에서.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나 부자 관원이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키고 구제에 힘쓰고 착하게 산건, 전부 자기 자신의 만족과 인기와 명성을 위한 것이였다라는 거예요. 그게 부자(富者)인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거지 나자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바리새인들에게 주었던 그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그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은 자기가 부인되어서 다른 말로 나는 예수라는 친구의 죽음에 의해 예수의 친구가 된 거지, 내가 친구를 위해 내 몸을 불살라 죽여 친구가 된게 아닙니다라는 올바른 자각! 은혜의 필연성! 자기부인! 그러한 자기 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로 낮아져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친구 삼는 그런 성도의 삶과 교제를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불의한 재물이 뭐였어요? 예수님에게 있어서 불의(不義)한 재물(財物). 죄인이 되셔서 불의한 자리에 내려가셔서 죽은 예수님의 삶이 불의한 재물이란 말입니다. 이 세상의 돈이 불의한 재물이 아니라... 그러한 구리뱀이 되셔서 죽어버린 저주의 구리뱀이 되셔서 죽어버린, 창녀 다말이 되어서 죽어버린, 예수 그리스도의 부정한 그 삶이 바로 불의한 재물이고 그게 교회라는 친구를 만들어 낸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땅에서 그렇게 부인되어져 가는 자로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는게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거예요. 고지(高地)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느님에게 쓰이는게 아니라 그건 굉장히 고귀한 재물이잖아요. 우린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이고 율법주의자들이에요. 그게 인본주의라 그랬어요. 그들은 절대 자기 자신을 부인(否認)할 수가 없어요. 자신들의 행위와 가능성을 굳게 신뢰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들은요... 따라서 자신의 소유와 힘을 진심으로 남에게 양도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오히려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나라는 이 국가를 부강하게 살찌우는 데에 목적을 두고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방법의 하나로 자기 것을 털어서 남들에게 주어 인기와 명성을 챙기는 것도 사용했던 사람이에요. 이게 열마나 교활한 것입니까? 그건 진짜 준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들이 부자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성경에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기록해 놓은 거예요.
역사의 기록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실제로 아주 검소(儉素)하고 청빈(淸貧)하게 사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요. 실제로 자기걸 다 털어서 자기는 최소한의 생필품만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요. 바리세인 중에도요. 그런데 성경이 모든 바리새인들을 뭉뚱그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라고 이야기를 해 놓는건 부자가 돈을 좋아한다라는 그것이 단순히 세상의 재화나 가치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그걸 끌어당겨 쌓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주는 거예요. 그래서 그 가난하게 살았던 바리새인들을 돈을 좋아하는 자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뭉뚱그려 다 율법주의자 인본주의자들을 그게 부자라는 거예요. 그렇게 돈을 좋아하는... 다른 말로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위상을 뽐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사는 이들에게 지옥에 간 부자의 이야기가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평생을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어떤 스님에게 이 부자의 이야기가 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평생을 무소유를 살면서 사람들의 존경과 인기를 한 몸에 받고 갔어요. 죽으면서까지 챙겨 갔어요. 그거... 그런데 성경이 '넌 부자야'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장삼 하나 고무신 한 짝 밖에 없었는데 넌 부자야라고 이야기하는 거라 말입니다. 그러니 속 터질 수밖에 없는 거죠. 나는 죽으라고 열심히 살았는데 나보고 부자라니 이게 무슨 소리냐 말이에요. 그런데 지옥에 간 부자의 처신이 참 멋지지 않습니까? 먼저 그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불러요. 이로써 그 부자가 유대인이며 유대교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그들은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던 사람들이에요.
(요한8,39)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브라함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주님이 바로 그 바리새인들에게 이 비유를 주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부자가 아브라함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는 장면을 딱 등장시키는 거예요. 왜 하필 아브라함일까요? 모세면 안 돼요? 모세를 더 좋아했었는데 그들이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한다고 말씀하세요. 그 아브라함의 행사가 뭡니까? 아브라함을 뭐라고 부르죠? 믿음의 조상. 믿음의 조상이라는건 뭐예요? 그는 믿음에 의해서 구원받은 자이지 아무 것도 하느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한 적이 없는자다라는 의미에서 믿음의 조상이에요. 그러니까 "나는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게 아브라함의 행사에요. 그런데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은 어땠습니까? 나는 제사 지내고 있고 율법 지키고 있어요. 착한 일 하고 있어요. 이렇게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나에게 더 많은 상을 줄 거예요. 이게 마귀(魔鬼)의 행사란 말이에요. 이것이...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이걸 굉장히 기특한 것으로 부추겨 주고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자기들의 행위와 업적과 공로를 내세워서 자신들의 유익과 만족과 명성과 가치를 챙기려 하는 자들을 예수님께서 뭐라고 부르시는지 바로 고 밑의 구절 한번 보자고요.
(요한8,43)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의 비유에서 나온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자들이 나오죠? 못 알아듣는 자들이 나오고 그들이 왜 못 알아듣냐 하면 그들이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요한복음의 이 내용을 알면 오늘 비유는 그냥 거저 알 수 있는 거예요. 똑같은 이야기하는 거예요. 주님은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는 유대주의 자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는 저주를 퍼부으세요. 요한묵시록에도 나오죠? 그들이 유대인이라 하나 사탄의 무리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마귀새끼들이다 그러잖아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너희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세요. 고린도 전서에서의 바오로의 표현으로 바꾸면 그래서 부자들에게는 복음이 방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마귀(魔鬼)의 자식은 하느님의 은혜의 필연성, 십자가 복음의 필연성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말하는 거고, 그들에 행사는 율법적이며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열심을 동반하게 되는데 하느님은 그러한 열심을 전혀 카운트하지 않으시고 지옥불에 던져 버린다라는 뜻이에요. 반면에 진짜 아브라함의 자식은 어떤 자식일까요?
(로마9,7-8)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8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너무 일관성 있게 연결이 되어 있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다 똑같은 얘기하고 있잖아요. 약속의 자녀가 진짜 아브라함의 씨라는 거예요. 약속의 자녀의 모형인 이사악이 어떻게 약속의 자녀가 되었어요? 마른 막대기 같은 도저히 불가능한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할머니 사라,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그 태(胎)에서는 사람이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자 생명이 잉태되고 출산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약속의 자녀에요. 인간의 힘으로는 단 한 가지도 거기다 보탤 수 없는, 그러나 은혜에 의해서만 창조가 되는 그게 약속의 자손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진짜 아브라함의 자식은 율법과 제사와 선행 등으로 자신의 가능성을 챙기는 자여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아무리 아브라함을 아버지 아버지 불러도 너희들은 아니라는 거예요. 진짜 아브라함의 자식은 "난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이사악과 같은 자여야 하는 거예요. 없음에서 있음이 된 거 아니에요?. 하느님에 은혜가 아니었으면 그 말라빠진 아브라함과 사라의 태는 그대로 마른 채 죽어 없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 없음에서 하느님의 은혜가 가입하니까 있음이 나오는 거예요. 이게 성도(聖徒)입니다. 그런데 거기다 우리가 뭘 보태냐고요. 근데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예요. 자신을 우상 삼아 사는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敎會)들과 똑같아요.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子孫), 교회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주님은 지금 그런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자아(自我)의식을 폭파시켜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에 비유에서는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가 지옥에 가 있는 것입니다. 지옥에... 그러니까 아브라함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던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기분 나뻣겠어요. 아무리 비유지만... 속셈이 읽히고 있잖아요. 우리보고 하는 말이구나 이렇게 그 착한, 자칭 아브라함의 자녀가 지옥에 가 있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 지옥에 부자는 살아생전 거지 나자로가 자기의 대문에 누워서 냄새를 풍기고 심지어 자기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걸 강제로 금하지 않았던 사람이에요. 상 밑에까지 오는걸 허락했단 말입니다. 거지가... 여러분은 그렇게 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위생이나 미관을 고려해서 절대 허락할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반응이에요. 그 지린내와 그 더러운 병균이 득실거리는 그 사람들의 접근을 여러분 과연 허락하실 수 있냐고요. 그런데 이 부자가 허락했다니깐요. 밥 먹는데 상 밑에 와서 그 냄새나는 거지가 뭐 좀 떨어지는거 없나 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밥맛이 나겠습니까? 그 부자는 그 착한 부자는 그걸 허락했어요. 성경은 그 거지 나자로가 어떤 지경에 있던 사람인지를 잘 그려주는데, 그게 헌데를 앓았다라고 그러죠? 그가 헌데를 앓았다 그래요. 그 헌데라고 번역이 된 헬코라는 단어는 궤양을 앓다란 뜻이에요. 궤양이라는 것은 몸이 여기저기 염증이 생겨서 곪아 터졌단 뜻이에요. 그게 얼마나 심했던지 자기 몸하나 추스르지 못해서 개들이 그 고름을 핥아 먹었다 그러죠. 그런데 그 개를 쫓아낼 힘이 없었어요. 그런 더러운 거지가 여러분 문 앞에서 숙식(宿食)을 하고 심지어 밥 먹는 상에까지 접근을 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중에 한 사람도 허락할 사람 없어요. 그런데 그 부자는 했단 말입니다. 왜? 바리새인이거든요. 착한 바리새인이거든요. 게다가 그는 지옥에서도 땅에 남아 있는 자기 가족을 전도하고 싶다는 아주 기특한 고백을 합니다. 어디서? 지옥에서...
(루가16,27-28)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전도하고 있잖아요. 그죠? 선교사 파송해 달라는 겁니다. 지옥의 불속에서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 걱정해요. 어디를 봐서 부자가 지옥에 갈 사람으로 보입니까? 날마다 잔치 벌이고 연락하면 그게 죄가 되는 건가요? 심지어 그는 회개의 중요성도 알아요.
(루가16,30)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도 알아요. 회개와 전도와 구제 그는 모든 면에서 아주 기특한 면모를 보여요. 그런데 왜 그는 지옥에 가 있는 겁니까? 하느님은 그러한 사건(事件)화된 인간의 행위를 근거로 착한 행위를 근거로 천국과 지옥을 가르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부자의 이런 기특한 행위들을 기록해 놓는 것입니다. 일부러. 그러니까 함부로 도덕과 윤리 등을 근거로 해서 선함과 악함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거예요. 지금부터 제가 왜 부자가 지옥에 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오셨다 그랬죠? 칼(劍)을 가지고 오셨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칼(劍)로 무얼 짤라낸다 그랬어요?
(마태10,34-39)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여기 보면 인간이 그 관계를 가족관계(家族關係)라는 걸 내 목숨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게 마지막 절이에요. 자기 목숨이란 단어가 나오잖아요. 거기에 인간은 그걸 자기 목숨으로 삼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게 틀렸다라고 이야기를 해요. 마치 주님께서 가족관계를 해체해 버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말씀하세요. 하느님의 은혜를 떠난 타락한 인간은요. 가족관계를 ‘나’ 라는 나라에 그 울타리 속으로 끌어들여서 그 가족들 조차 내 존재의 확장 선상에 올려놔요. 주님은 고걸 깨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인간들의 가족 관계를 해체하시겠다는게 아니라 그 가족들 진짜 사랑하는 건 그들과 천국의 가족관계를 맺는 것이다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거예요. 가족관계가 중요하지 않다라는 게 아니에요. 왜? 가장 나에게 가까이 준 이웃인데 어떻게 이게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합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重要)한건 그들과 천국의 가족관계를 맺고 있느냐? 이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따라서 내 것으로 갖고 있는 관계는 예수의 복음에 의해서 끊어지는 거고, 그 복음에 의해 진짜 새로운 가족관계가 탄생하게 되는데 거기서 진짜 사랑이 있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다 하느님 나라에 올라가면 영원속으로 올라가면 다 깨지는 관계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허락한 귀한 가족들에게 참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 비록 그와 내가 사이가 멀어질지라도... 우리가 참 복음(福音)을 전하면 반드시 여러분은 가족들한테 배척받게 돼있습니다. 욕먹어요. 싸움이 일어나요. 그렇다고 해서 '에이 그냥 친하게 지내는게 왔다지. 뭐 괜히 여기서 평지풍파(平地風波) 일으킬게 있어?' 그게 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걸 사랑이라고 합니까? 그게 날 위한 거예요. 평지풍파 일으키지 않겠다는 건 내가 편안(便安)하겠다는 거거든요. 고게 부자(富者)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에 의해서, 복음의 칼로 관계가 깨진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들 사이에서 새로운 가족관계가 형성되는데 그게 진짜 중요한 가족관계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돈을 좋아하는 부자는 여전히 자기 존재의 확장에 머물러 있는 자기 가족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 내 형제 다섯에게만 보내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그게 나거든요. 그래서 지옥 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까지 가서도 내 식구 내 가족 내 것에만 관심이 있는 거예요. 이게 이 세상 부자들의 특징입니다. 지옥까지 가서도 나의 유익만 챙기는 거예요. 성도(聖徒)는 이 땅에서 이걸 공격(攻擊)당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오만한 부자 행각은 회개의 은혜성을 완전히 무시해 버려요. 죽은 자가 살아 내려가서 회개를 전파하면 인간의 지성과 의지로 회개가 가능한 것으로 인식하는 거예요. 이게 알매니안 주의입니다. 이 부자가...이게 하느님의 주권과 하느님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의 모습인 거예요. 쉬운 말로 부자는 기적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된다라는 무식한 사고를 하고 있는 거예요. 죽은 자가 살아 내려가면 분명히 그들이 회개할 겁니다. 기적이 복음 전파에 도움된다는 거 아닙니까? 천만의 말씀. 주님이 뭐라 그래요? 안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안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회개는 전적인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생산되거나 발휘되는게 아니에요. 여러분 앞에서 태평양이 갈라진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선택한 백성이 아닌 자는 예수 안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서 전부 주인이 찾아 나서서 찾은 거죠. 그거... 그런데 뭐라 그래요? 그들이 회개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회개(悔改)는 찾아 나서는 분에 의해 주도(主導)되는 거란 말입니다. 내가 하는게 아니라니깐요. 믿음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나 그걸 내 것으로 인정해 주는 거예요. 수년간 우리와 함께 같이 설교를 들었던 사람중에도 이걸 못 알아듣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제 온 지 한달도 안된 사람들이 이걸 다 알아듣고 '그렇지 그게 예수 믿는 거지 그게 복음이지'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그럴때마다 깜짝 깜짝 놀래거든요. 회개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다라는 것을, 하느님이 우리에게 경험케 해주시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부자는 지옥에서도 거지 나자로를 거지 취급합니다. 그건 부자가 지옥에 가서도 부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이에요. 자기 목이 마르니까 거지 나자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 배달시켜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지 주제를 모르는 거예요. 여전히 자기는 거지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율법주의(律法主義)에 빠진 부자(富者)들의 착각입니다. 유대주의와 인본주의는 반드시 자기의 잘남과 우월감을 챙겨 갖기 때문에 지옥에서도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그 차별의식을 갖고 있는걸 들켜버리는 거예요. 지금요. 지가 뭔데 나자로를 시켜서 물을 배달 시켜요? 이게 지옥에 갈 부자들의 모습이에요.
성경지식, 자기가 한 종교행위, 이런 걸로 자기의 우월감을 챙겨요. 나는 너보다 괜찮아. 왜? 성경 더 많이 알거든... 나는 너보다 괜찮아. 왜? 너보다 기도 많이 하거든... 나는 너보다 괜찮아. 왜? 내가 너보다 착한 일 많이 하니까... 요게 부자라니깐요. 그렇다면 나자로는 도대체 뭘 했다고 천국에 간 걸까요? 무조건 가난하게 살면 다 천국 가나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랬다고 가난하면 다 천국가는줄 알고 있는데, 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잘 써먹는 거예요. 민중 신학자들도 잘 써먹고... 아닙니다. 거기서 가난하다라는 건 시편 51편의 상한 심령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느님 아버지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존재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니까 하느님 나를 구원해 주세요." 이게 가난한 거예요. 이게 상한 심령이에요. 근데 여기에서 나자로가 그러한 마음이 가난한 자의 모습을 보여줬냐고요. 상한 심령을 가진 자의 삶을 보여 줬냐고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럼 나자로는 왜 천국 갔습니까? 이유 없습니다. 그걸 ‘언 컨디셔널 일렉션’이라고 하는 거예요.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이리지스터블 그레이스!’ 이걸 모르면 부자, 율법주의자가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 되는 거예요. 나자로가 천국간 거 아무 이유 없어요. 하느님이 은혜 베풀어서 간 거예요. 거지로 살아서 간 것도 아니고, 착한 일해서 간 것도 아니에요. 나자로가 착한 일 했다라는 말이 한 구절이라도 쓰여 있습니까? 없어요. 그냥 하느님께서 살라는 대로 다 털리고 비워진 그런 거지로 살았더니 빈 그릇으로 살았더니 때가 차서 하느님께서 천국에 들여보내주신 거예요. 그건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가 바로 그렇게 하느님에 의해 털리고 비워진 거지로 살게 된다라는 것을 교훈해 주는 거예요. 그걸 자기부인이라 그래요. 그게 거지에요. 가끔 우리의 인생(人生)을 돌아보면서 '뭐 이런 거지같은 삶이 다 있어' 그렇게 탄식(歎息)이 나올 때 있죠? 잘사시는 거예요. 거지같은 삶. 그게 성도(聖徒)의 삶이라니깐요. 털리는 삶. 비워지는 삶. 그건 저의 추론이 아니에요. 거지 나자로의 천국행이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나자로라는 이름의 의미부터 알아봐야 돼요. 왜냐면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사람의 이름을 말씀하신 곳이 딱 여기 하나예요.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비유인데 거기에 왜 사람의 이름이 필요해요? 비유인데. 그런데 여기에는 나자로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단 말입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거지 나자로의 이야기에서 나오는 나자로라는 인물이 진짜로 무덤에서 살아난 나자로와 연관이 있다는걸 암시하시는 거예요. 죽은 자가 살아난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선택 밖에 있는 자들은 안 믿는다. 실지로 죽은 나자로가 살아났더니 바리새인들 그 부자들, 부자의 형제들이 어떻게 했어요? 그때부터 예수님과 나자로를 죽이려고 했어요. 그때부터... 그러니까 실지로 죽은 나자로가 살아서 내려갔다고 하더라도 이 부자의 형제들은 어떻게 한다? 그 나자로 죽인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 안 믿어, 그 나자로 죽여. 구원은 오직 하느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을 명쾌하게 보여주는 거예요.
‘나자로’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느님이 도우신다’라는 뜻이에요. 나자로라는 이름 자체가... 그러니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해서 나자로가 천국에 갔다라는 것을 이름 하나로 설명해내는 거예요. 하느님이 도우셔서 간 거라는 거예요. 그는 뭘 잘해서 간게 아니라... 근데 재미있는건 하느님이 도우시는 자 그 나자로는 이 땅에서 거지로 헌데를 앓는 자로, 개보다 못한 자로 살아가고, 그래서 그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온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예 저는 개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개라니깐요. 우리는요. 하느님 앞에서 "예 맞습니다. 하느님 저는 개예요. 없음이에요. 티끌이에요." 이 고백 우리가 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예 개보다 못한 자로 살아가요. 개가 고름을 빨아 먹는데 그걸 못치운다니깐요. 개가 내꺼를 탈취해 가고 있어요. 하느님은 은혜 밖에 있는 부자는 호화로운 옷을 입고 날마다 연락(宴樂)하며 이 세상을 즐기는 삶을 산다라고 거꾸로 이야기를 해주세요. 이게 뭐였어요 시편 73편에 이야기인 거예요. 아삽의 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이부분을 놓치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하느님이 도우시는 삶은 만사형통, 일사천리, 문제해결, 질병치유, 승승장구의 삶으로 점철이 될거처럼 착각을 하죠? 그런데 하느님이 도우신 나자로는 어떻게 됐어요? 그것과 정 반대의 삶을 살았단 말입니다. 하느님이 그까짓 헌데 그 궤양도 안고쳐줬어요. 그 거지 인생을 탈출시켜주지도 안았다니깐요. 평생 하느님이 도우셨는데 하느님의 도우심은 사망(死亡)에서의 건짐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땅에서의 여러분의 문제에서의 탈출이 아니라 사망에서의 탈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도우심이에요. 그런데 그 하느님의 도우심을 입은 자들은 이 땅에서 털리고 비워지는 거지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이 많고 적고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게 나의 힘의 근원이 될 수 없구나. 내가 이걸 의지해서는 안되는 거야!를 깨닫게 해주는게 거지란 말입니다. 그게 그에게는 그 자체가 그 소유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거지인 거예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억만 장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면 그거에 내 삶을 의지 안한다 말입니다. 그게 거지예요. 그런데 개뿔이나 몇백만불 고거 갖고 있으면서 이게 나의 힘이지 고게 부자입니다. 몇백만불은 좀 많네요. 그건 진짜 부자인데. 그건... 몇만불... 아 그것도 많은데. 저한테는 매달 빵구가 나갖고... 하느님이 도우시는 인생은 하느님만 의지하는 자로 내려가는 인생인거에요.그게 하느님의 도우심이라니깐요. 헌데를 앓으며 자신의 헌데를 핥는 그 개하나 쫓아낼 힘도 없이 남의 집 대문 앞에서 숙식을 해야 했던 거지 나자로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 수 있었을거 같으세요? 돈 건강 명예 자식 뭐가 있어요? 아무것도 없죠? 그에게 의지의 대상은 하느님 밖에 없는 거예요. 거지기 때문에... 그게 복 받은 인생이란 말입니다. 그게 성도라는 거지들의 삶인 거예요. 세상것은 다 털리는 삶. 반면에 하느님의 은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즐길것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날마다 잔치를 벌리면서 살아요. 재산 늘리는 재미, 자식 출세하는거 보는 재미, 남들에게 칭찬받는 재미 등등... 즐길게 너무 많죠? 고게 잔치입니다. 날마다 이 세상에서 잔치하는 거예요.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은 성도들은 점점 그러한 재미들에 힘들어 하게 되고 예수 믿는 재미로만 살게 되는 자로 지어져 가는 거예요. 고게 거지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 세상의 힘을 쌓고 모아서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그러죠? 자기 이외의 다른 대상을 정복하여 '내가 신이다!'라는 것을 순간순간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라고 하신 건 그런 다스림과 정복이 아니에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들의 선악기준에 의해서... 하느님이 말씀하신 정복의 정의를 왜곡시켜 버린 거예요. 그건 힘의 원리 하에서의 정복이에요.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정복은 하느님이 말씀하신 정복은 그거 아닙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셨는지 만 봐도 알잖아요. 십자가(十字架)로 정복(征服)하셨다니깐요. 그분은 하느님 나라의 다스림, 하느님 나라에 정복은 하느님만이 가치이며 하느님만이 왕이라는걸 인정하는 거예요. 그게 정복이에요.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의 가치를 전부 하느님 아래로 밀어 내는걸 정복이라 그래요.
어렵나요? 예를 들어 드릴께요. 인간들이 왜 그렇게 높은 산에 오르려고 하죠?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산에 오르고 나서 난 그 산을 정복했다라는 표현을 써요. 에베레스트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한 5천고지 6천고지 이상은 전부 정복의 대상이 돼요. 심지어 남극과 북극도 정복의 대상이 됩니다. 그 정복하면 누가 뭐 줍니까? 스포츠 용품 회사에서 보너스 조금 주는거 밖에 없어요. 그리고 명예에요.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가요. 히말라야 같은데는 산악은들의 공동묘지가 됐어요. 지금요... 그런데도 매년 가요. 정복하겠다고... 저는 그러한 시도들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연에게 조롱당하는 현장이라고 생각해요. 여러분 히말라야가 웃을 거 같지 않으세요? 조그만 인간 몇명이 산소통 매고 올라가서 낑낑대고 올라가서 깃발하나 꼽고 발자국 몇개 찍어 놓고는 '내가 널 정복했다'그러고 내려가는 거예요. 히말라야가 되려 막 웃을 거 같애. 배꼽을 쥐고. 니가 그게 날 정복한거야? 어떤 의미에서 정복이니? 그게 웃을거 같애요. 안그래요? 그게 어떤 의미의 정복입니까? 극한의 추위를 견디면서 남극과 북극의 극점에 깃발을 꽃으면 그게 정복입니까? 개고생이지. 그건 모두 신(神)이 되고 싶어하는 욕망(慾望)하는 인간들의 유희(遊戱)에 불과한 거예요. 끊임없이 뭔가를 정복하여 내 가치를 챙기려고 하는 욕망하는 인간들의 유희. 실제로 인간들은 자연에게 정복당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이 온도를 높이고 낮출 때마다 인간들은 요렇게 옷을 갈아 입습니다. 왜 반팔 입고 계세요? 자연이 여러분을 정복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철따라 여러분은 옷을 갈아 입어야 돼요. 그러니 인간들이 산소통 하나 매고 올라가서 산에 올라가서 깃발 꼽고 내려가서는 산을 정복했다라고 그러는 소리를 듣고 이 자연이 여러분을 얼마나 비웃겠습니까? 인간이 정말 히말라야를 정복할 수 있는 방법이 뭔줄 아세요? 히말라야 꼭대기에 올라가는게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걸 알고 무시하는 거예요. 그게 희말라야를 정복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 정말 산이 놀래요. 왜 나를 무시하지? 내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저놈들이 왜 나를 무시해? 왜 나에게 신경써주지 않아? 이걸 진짜 정복이라고 하는 거예요.
진정한 가치(價値)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나라를 희망(希望)하며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러한 세상의 가치를 쓰레기처럼 여겨 버리는거 그게 진정한 정복이에요. 히말라야가 가치 없다는게 아니라 거기에 올라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는 인간의 욕망의 가치없음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세상의 유행(流行)에 휩쓸리지 않고 그냥 잠잠하게 살아가는거 역시 자연을 정복(征服)하는 행위인 거예요. 왜 빨간게 유행이면은 다 빨간거 입어야 돼요? 그게 자연에게 정복당하는 거예요. 짧은 치마 유행일 때 긴치마 입고 다니는거 변태일수도 있지만, 그런거에 그냥 무관하게 사는거 그게 자연을 정복하는 거예요. 한국에 가면 여자애들이 전부 엄마 아빠가 똑같은 사람같아요. 그죠? 다 한 아빠 엄마한테 나온애들처럼 얼굴이 다 똑같아... 한 성형외과에 가서 그런건지... 그런데 그 와중에 있는 그대로를 자랑스럽게 무기삼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자연을 정복하는 거예요. 다 정복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도 레이저를 많이 맞아가지고 뭐 잡티 주근깨 기미 이런거 레이저 많이 맞으면 없어진다면서요? 그 사람들은 좋겠어요. 나중에 3차 대전이 일어나서 레이져 무기가 나오면 '어이 여기좀 쏴주세요' 그럴거 같애. 무서워서 도망가는게 아니라 '아저씨 저 여기좀 쏴 주세요' 군인들이 깜짝 놀랄 거예요. 고게 정복당하는 거예요. 여러분 돈을 정복하는게 뭔줄 아세요? 많이 끌어 모아서 창고에 쌓는게 정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돈이 그러죠. '너는 내가 굉장히 가치 있는 존재인줄 알고 있구나. 그러니 이렇게 덜덜 떨면서 모으지. 너는 나에게 정복 당한거야.' 그러나 그 돈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곳에 마구 한번 줘보세요. 그때 돈이 뭐라 그럴까요? '너는 왜 나를 왜 가치없게 대하니. 남들은 거기에 목숨 걸고 벌벌 떠는데. 너는 왜 나를 그렇게 가치 없이 대해?' 이게 돈을 정복한 것입니다. 자끄엘룰이 이야기한 거예요. 월드컵에 광분하는거, 월드컵에 정복 당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무신경하게 진짜 가치있는거 쫓아 사는 사람이 그걸 정복한 거예요? 그냥 이 세상은 온통 엉뚱한 정복하면서 살아요. 이 세상에서는 그런 것들을 얻어내고 성취하는 것이 정복하는 거고 성공하는 것이다라는 엉터리 정복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자기의 힘과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서 자신의 가치와 위상을 챙기려 하는 모든 자들이 바로 부자입니다. 부자.
저는 성경을 사랑하고 예수를 사랑했다고 하는 반 고흐가 왜 그렇게 고통과 고뇌의 삶을 살다가 머리에 총을 쏘았는지 이제는 잘 알 수 있을거 같애요. 고흐는 성경속에서 진짜 예수를 발견하지 못했던거 같아요. 그가 동생 떼오에게 보낸 많은 편지들이 있는데 그걸 읽어 보면 정말 고흐는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도 천재였어요. 저는 미술하는 사람들 예술하는 사람들 존경합니다. 함부로 그런 작품이 나오는게 아니에요. 그거는 그냥 기술로 그리는게 아니에요. 정말 천재 였어요. 쓰는 어휘나 단어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요. 그런데 이 사람이 동양사상에도 아주 심취해 있었다라는 것을 알수 있어요.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적 경향이 아주 짙어요.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범신론적 종교관도 나타나요. 그러니까 고흐에게 있어서는 어떤 절대자를 하나 그려놓고 그 절대자에게 순종하는 길은 이 세상에서 착하고 순결한 삶을 살고 공평한 삶을 만드는거 정도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삶이 안 따라 주는 거예요. 그러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귀가 아니라 모가지라도 짜르고 싶었을 거예요. 안되거든요. 그런데 하느님은 그 안 되는걸 덮는 분이 하느님인데. 유다처럼 내가 안되니까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고흐가 귀떼기도 짜르고 일부러 창녀하고 동침도 하고 동거도 하고 자기를 막 학대해 버려요. 벌을 주는 거예요. 심판을 주는 거예요. 결국 나중에는 권총으로 사살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이게 가리옷유다의 인생이였잖아요. 내죄는 내가 책임진다. 멋있는거 같지만 하느님 앞에서는 그게 마귀(魔鬼)란 말입니다. 그게 죄(罪)인 거예요. 고게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니 그 성경과 에밀 졸라의 책을 늘 같이 그렇게 그려 놓은 거예요.
예수님은 개혁자가 아닙니다. 여러분 혁명가가 아니에요.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예전에 예수는 혁명가다 라는 프로를 방영해서 봤더니 말도 안되는 무슨 뭐 필립복음 도마복음 유다복음 이런거 갖다가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나와서 예수는 그냥 혁명가에 불과한 사람이다라고 이렇게 방송하는걸 봤는데 참 불쌍합니다. 그 좋은 머리들을 갖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걸 이렇게 증명하는데만 쓰고 있으니 인간의 이 인본주의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면 모든 인간은 거기서 머물 수밖에 없어요. ‘예수는 그냥 혁명가이다, 예수는 그냥 좋은 롤모델이다, 우리의 본보기다, 쫒아서 살자’ 아니요. 우리 쫒아서 못살아요. 예수님도 그 길(道) 가기 싫어하셨는데 겟세마니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는데 우리가 뭐라고 그 삶을 쫒아 삽니까? 하느님이 끌고 가시는 거예요. 성도는 그렇게 자연이든 인간이든 누구를 정복하는 자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성도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될 때, 그 하느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들이 성도를 위해 존재하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정복하는거 아니에요.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너는 이 모든걸 다스리고 정복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선악과 먹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신 건, 다스리고 정복하는건 선악과 먹지 말라는 내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되는 거다라는걸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비워지고 털리는 거지로 지어져 갈 때, 우리는 다른 것들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까짓 돈에 정복되지 않고 그까짓 미모에 정복되지 않고 그까짓 세상에 명예에 정복되지 않는 거예요. 그게 하느님의 말을 듣는 자들의 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정복들을 하고 있다니깐요. 교회에서도 큰 교회에 만들어야 되고, 사람들 많이 모아야 되고, 헌금 많이 쌓아서 세를 과시해야 되고 이걸 정복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에요. 비워지고 털려야 돼요. 교회도 마찬가지라니깐요. 우리 성당교회도 계속 하느님 앞에서 털리는 교회가 돼야지 우리가 세운 목적과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져 가는 교회되면 안됩니다. 잘 새겨 들으셔야 돼요. (요즘은 코로나19로 좀 털렸나 모르겠네)
그분 앞에서 사망이 이 세상의 죽음의 증상 고통이 벌벌 떠는 듯한 모습 안보이세요? 성도의 정복은 사망의 정복입니다. 그까짓 이 세상의 가치와 힘들 그까짓 것들 정복하는거 아니에요. 성도(聖徒)는. 복음(福音)이라는건 죽음 앞에서 위력을 발휘해야 복음이에요. 죽음 앞에서 위력(威力)을 발휘(發揮)하지 못하는 복음(福音)은 사기(詐欺)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계시는 동안 아무리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아도 다 꽝이에요. 매 설교가 여러분의 죽음 앞에서 던져지는 설교라고 생각해 보세요. 나의 죽음 앞에서 이게 과연 나에게 난파되는 내 인생에서 내가 붙드는 구명보트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시란 말입니다. 그걸 복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내가 붙들게 아무것도 없어졌어요. 죽음 앞에서 내 손에 붙들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는데 복음(福音)이라는 십자가(十字架) 복음(福音)이 내 눈앞에 떡 나타나는 거예요. 그걸 붙들 수 있어야 성도(聖徒)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는 도대체 뭘 주겠다는 거예요? 교회(敎會)에서 여러분이 살아 생전에 여러분을 기쁘게 해주고 여러분을 자랑하게 해주고 증명하게 해주는 그런 건 아무나 다 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사기(詐欺)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주 내가 지금 죽음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그 말씀을 들으셔야 돼요. 여러분이 언제 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오늘 강사(講士)가 살아있는 나를 위로해 주는구나. 그러면 와서 저를 끌어 내리셔야 된다니깐요. '내가 지금 죽음 앞에 있는데 니가 나한테 그따우 소리를 하니? 자식 교육 잘시키고 부자로 잘 살아라 와서 안수줄테니까. 머리 디밀어 니가 내 죽음 앞에서 나에게 그따우 소리를 할 수 있어?' 제가 지금 직장암으로 죽어가는 그 분 앞에서 '힘내세요 하느님은 당신을 도우시니까 잘 먹고 잘살거에요. 하느님만 붙들어 보세요' 그 사람 조롱하는 겁니다. 지금 숨이 넘어가는데 그 사람에게 그 얘기 해요? 예수 이야기 해야죠! 십자가 이야기 해야죠! 마찬가지인거에요. 여러분은 '선생이여 나에게 예수를 들려 주십시오. 선생이여 내가 예수를 뵈옵고자 원하나이다!'라고 이야기를 하셔야지. 너는 뭔데 설교를 그렇게 길게 하니? 그리고 맨날 똑같은 설교 맨날 예수와 십자가 이야기만 하니? 안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난파되는 배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시고 설교 들으셔야 돼요. 그리고 이 설교 붙들고 난 천국갈 수 있다 그렇게 되셔야 되는 거예요. 복음은 죽음 앞에서 위력을 발휘해야 돼요. 그들이 진짜 가난한 거지입니다. 마지막에 말씀만 붙들고 가는 자들... 남겨둔게 너무 많아서 똥싸고 오줌싸고 가는 그들이 부자(富者)인 거예요.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떠나나... 여러분 사망(死亡)을 이기셔야죠. 뭘 정복하시겠다는 거예요? 어디 고지 꼭대기에 올라가시겠다는 것입니까? 부자들은 절대 복음 못 알아듣습니다.
*내일 후편이 계속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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