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10.2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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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1-10-22 | 조회수1,559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땅과 하늘의 징조를 풀이하듯,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2021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2,54-59 그때에 54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5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56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57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59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UC 버클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1만 원을 나눠주고 익명의 낯선 이와 원하는 만큼 나눠 가지라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부유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인심을 후하게 쓰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소득 최하위권에 있는 사람들은 수입의 3%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반면, 상위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1%만을 기부했습니다 (물론 이 1%가 전체 기부금의 70%를 상회합니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더 베푸는 경향이 많다는 실험이었습니다. 이들이 비록 돈은 적지만 사랑을 많이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보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예수님 말씀의 이유를 찾게 됩니다. 부자가 더 많은 액수를 나누기는 하지만 여유 있는 데서 조금 나누는 것으로, 진정한 사랑 실천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실천을 많이 해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왜 이렇게 판단력을 잃게 되었을까요? 사실 우리 삶의 방식을 잘 살펴보면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좋은 일이라도 하기 싫은 일이 있고, 반대로 나쁜 일이라도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이럴 때면 묘한 핑계를 붙여서 꼭 내 마음대로 하고 마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히 세상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이득이 더 많은 쪽을 선택하는 우리였습니다. 이런 점은 우리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있었던 모습이지요. 최초의 사람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와 핑계를 댔었고, 또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모습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해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올바른 판단은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표징을 볼 수 있고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주실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뜻인 사랑을 철저하게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끝없이 반복하고 실패하고 헤매는 시간을 겪어낼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정옥희) 감사할 일이 왜 없는가? 독일의 재무부 장관을 지낸 마티 바덴(Marty bade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국가를 위해서도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게 된 하나의 계기는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 여행 중에 싸구려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생겼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났는데 자신의 낡은 신발이 없어진 것입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께 “하느님도 정말 너무 하십니다. 저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훔쳐 가게 하십니까?”라며 외쳤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라 여관집 주인이 헌 신발을 건네며 미사에 같이 참석하자고 권했습니다. 마지못해 끌려갔지만, 신발을 잃어버린 생각으로 미사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옆에서 눈물을 흘리며 감사기도를 바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두 다리가 없었습니다. 바덴은 생각했습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두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신발이 있어도 신을 수가 없겠구나. 그런데 나는 겨우 신발이 없어졌다고 하느님께 원망까지 하고 있으니….’ 이 체험이 그를 긍정적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했습니다. 우리도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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