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10.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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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중애 | 작성일2021-10-28 | 조회수1,218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성 시몬과 성 유다) 2021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복음 루카 6,12-19 12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13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15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17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18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19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종종 예민한 반응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봅니다. 예민한 것이 나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 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박사는 다섯 명 중 한 명은 예민한 기질을 ’ 타고났다고 말합니다. 만나는 사람 중 20%는 예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민함을 나쁜 것처럼 생각하면, 세상 사람의 20%를 나쁜 사람 취급하는 것이 됩니다. 바른 판단이 아닌 잘못된 판단입니다. 예민함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를 물으면, 그들이 별것 아닌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런 예민함이 있기에 깊이 생각하고 사려 깊으며 남의 아픔에 공감하며 그 어려움에 함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민함이 있기에 어렵고 힘든 사람들이 커다란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민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점이 더 많습니다. 어떤 모습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른 이를 보고서 틀렸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만이 분명히 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12명의 제자. 그들 중에서 잘난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부, 세리, 열혈당원 등….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기준으로 볼 때 부족함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를 뽑기 위해서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 중에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 역시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기준에서 훨씬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들을 제쳐두고서 형편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신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는 단순함과 굳은 믿음이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세상의 기준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은 실제로 주님을 증거하는 커다란 일꾼이 됨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주님도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받아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도 판단을 내려놓고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어떻게 말해야 할까? “너, 도대체 언제 공부할 거야?” 공부하지 않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먼저 갖게 되는 반응은 ‘짜증’일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공부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아이와 적대적 감정만 생길 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심리학자 김경일 박사는 대화에 물리적 위치를 포함하면 이야기가 한층 더 진행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공부 안 하는 아이에게 “너, 도대체 언제 공부할 거야?”가 아니라, “너, 어디서 공부할 거야?”라고 물으면 ’아이는 짜증보다 ‘어디서’ 공부할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종종 기도하지 않는 가족의 모습에 힘들다는 분을 만납니다. 그들 역시 배우자나 자녀에게 “언제 기도할 거야?”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것은 짜증뿐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요? “어디서 기도할 거야?” 기도할 생각이라도 갖게 할 것입니다. (성 시몬과 성 유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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