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아버님께서 먼저 가신 어머님을 뒤따라 선종하셨다. 생전에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위하시며 16년 간 식물인간 상태로 병원에 누워 계시던 어머님을 간병하셨다. 결국 같은 병원에 두 달 정도 입원하셨다가 94세를 일기로 떠나셨다.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가 제한되어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야 병원 측 배려로 마지막 임종면회가 허락되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탓에 명확한 의사표현은 할 수 없었지만, 우리 내외와 손자의 손을 힘껏 잡으셨다. 사랑이 넘치는 간절한 눈빛으로 그동안 당신을 모시느라 고맙고 수고했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 같았다.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신 은혜에 비하면 자식으로서 아무리 힘든 일이었더라도 내세울 공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평소 한국 남자의 전형처럼 말수 없고 무뚝뚝해 살가운 맛이 부족하셨지만, 가족이 아닌 주변에는 속 깊은 마음을 깨달아 늘 감사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남은 우리 2남1녀의 자식도 서로 자기가 아버님께 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실례를 기억하며 자랑했다. 이제야 듣고 보니 장남인 내가 잘 몰랐던 사연이 있었다는 게 부럽고 샘이 날 정도였다. 사실 나도 아버님을 닮아 오사바사한 성격이 못 된다. 아버님은 주견은 있으되 부드럽지 못하셨다.
많은 식구가 매일 밥을 지어 먹고 반찬을 마련하는 일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 먹을 양식과 땔감을 준비하는 게 주부가 처리해야 할 걱정 중에 첫 번째였다. [사진 Pixabay]
우리 부모님 세대는 정말 힘든 고난의 시기를 몸으로 부닥치며 살아내신 세대다. 28년 용띠 생으로 왜정시대에 태어나 중고등학교를 마쳤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한국전쟁 내내 참전하여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그러고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온갖 잡일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야만 했다. 비록 지금 N포 세대도 힘들고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그래도 굶는 걸 당연시 하지는 않는다. 당시엔 하루하루 생존이 급선무였다. 지금에 생각하니 내가 태어나고도 아주 오랫동안 아버님은 뚜렷한 직업이 없으셨다. 인생의 초기와 황금기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견뎌야 했으며 또 그 힘든 시기를 어떻게 살아내셨는지 정말 존경스럽다. 부모님과 자식 세대에 비하면 우리 연령의 세대는 복을 많이 받은 게 틀림없다. 감사하고 미안하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당시엔 모든 가정이 거의 그렇게 살았다. 한 집에 조부모와 삼촌들이 함께 사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던 때다. 핵가족이란 말도 아주 뒤에 생겼다. 그러니 많은 식구가 하루하루 밥을 지어 먹고 반찬을 마련하는 일이 보통 큰 문제가 아니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우내 먹을 양식과 땔감을 준비하는 게 주부들이 처리해야 할 걱정 중에 첫 번째였다. 늦가을이 되면 수백 포기 김장을 담아 땅에 파묻고, 여기저기 구멍이 나서 황소바람이 술술 들어올 문창호지를 새로 바르는 일이 급선무였다.
또 각 가정은 음력 정월에 집에서 쓸 간장을 담갔다. 간장이 맛있어야 모든 음식이 맛깔스러워 진다. 거기에 쓸 메주를 100일 전에는 쑤어 만들어야 했다. 간장과 메주를 사다 쓴다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아주 나중에야 장에서 사다 썼다. 메주콩은 일반 콩과 달랐다. 백태라고 부른다. 아주 둥글게 생겼다. 연한 노란 색인데도 검은 콩과 비교해 흰콩 즉 백태라고 불렀다. 메주를 쑤는 날이면 어린 나는 구수한 콩 삶는 냄새에 흥분 되었다. 삶은 콩 한 주먹을 얻어먹을 요량으로 가마솥 근처를 계속 맴돌았다. 충분히 익어 절구에 넣고 찧기 전에 어머니께서 내게 한 줌을 건네주셨다. 아주 맛있었다. 지금도 그 구수한 콩 맛이 입안에서 맴돌아 군침이 돈다. 콩이 어느 정도 잘게 찧어지면 큰 벽돌 모양으로 메주를 성형하여 마루에 널어논다. 그리고 알맞게 굳으면 새끼줄로 엮어 방에 걸어 말린다. 방바닥의 뜨거운 온도와 웃풍이 부는 방 상부의 차가운 온도가 대류를 일으켜 메주를 띄우는데 최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다가 메주곰팡이가 피면 밖으로 내다 넌다. 한 백일이 지난 정월 말날(午日)에 간장을 담근다. 말날에는 잡귀가 붙는 손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구멍 난 문창호지를 떼 내고 새로 문창호지를 바르는 것도 가을에 온 가족이 나서서 하는 일이다. 또 몇 년에 한 번 장판도 새로 도배를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모두 가장이 나서서 직접 해야 했다. 격자무늬 창에 문창호지를 바르는 일은 경험이 필요한 일이다. 먼저 오래 된 창호지를 물에 불려 깨끗하게 제거한다. 이때 어린아이들은 평소에는 함부로 뚫을 수 없었던 구멍을 마음껏 낼 수 있어 아주 기쁘게 동참한다. 주먹으로 마음껏 구멍을 내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문살에 뿌리고 깨끗하게 문창호지를 제거하는 건 일이라기보다 물싸움도 할 수 있어 큰 재미도 주었다.
맏이라서, 막내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각자가 특별한 기억을 평생 지니고 살 수 있게 마련하고 배려하신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사진 PIXNIO]
밀가루 풀을 쑤어 한지에 고루 바르고 미닫이, 여닫이문 전체에 꼭 맞게 붙이는 건 세심한 솜씨가 필요하다. 문창호지를 붙이고 나서 입안에 물을 머금은 후 훅하고 물을 골고루 뿜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수분이 증발하면서 종이가 들뜨지 않고 팽팽하게 마른다. 요즘 같으면 분무기로 뿜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입으로 뿜어 골고루 뿌리는 솜씨는 잊지 못하겠다. 또 손길이 자주 가는 문 꼬리에는 튼튼하라고 일부러 두 겹의 종이를 붙여 질기게 보호했다. 이왕 두 겹으로 덧붙일 때 멋있으라고 그 사이에 은행잎이나 국화잎, 코스모스 잎사귀를 정성껏 말렸다가 모양대로 잎을 떼어 붙였다. 이때 각 집안의 전통과 품위, 디자인 솜씨가 그대로 드러났다. 디자인이 멋있을수록 사용하는 사람이 조심히 문을 열게 된다. 한마디로 말없는 가정교육의 현장이 된다.
장판지 바르는 일은 더 세심한 기술과 주의가 필요하다. 먼저 얇은 한지로 초벌을 붙인다. 이때도 아무렇게 붙이는 게 아니다. 방바닥에 붙인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기에 모서리를 잘 마름질하고 적당한 간격으로 덧대어 씨줄과 날줄을 맞추어 나갔다. 마치 피륙을 짜는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약간 질기고 두툼한 닥종이로 만든 장판지를 그 위에 덧붙인다. 그러면 저절로 두께 차이가 생겨 방안에 요철 무늬가 생긴다. 이 무늬를 보면 그 집안의 솜씨와 정성을 가름할 수 있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이젠 콩기름을 먹일 차례이다. 베보자기에 곱게 간 콩물을 담고 들기름을 섞어 콩기름을 만든다. 방에 군불을 때 뜨끈하게 가열한 뒤 정말 구석구석 꼼꼼하게 콩기름을 먹인다. 이때도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어느 한 곳도 손길이 빠지면 안 된다. 바로 표시가 난다. 아마 수 십 차례 손길이 가야만 했다. 또 이음새 부분이 들뜨면 장판이 쉽게 망가지므로 들뜨지 않도록 처음부터 조심하고, 접착제 역할을 하도록 특별히 기름을 더 먹어야 했다.
방바닥 도배를 하는 건 정말로 정성과 온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돌아가신 아버님을 회상하며 동생들이 서로 내가 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자랑하고 생각하는 것처럼 남이 모르게 구석구석에 손길을 주어야 하는 작업이다. 맏이라서, 막내라서, 여자라서가 아니라 각자가 특별한 기억을 평생 지니고 살 수 있게 마련하고 배려하신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감사의 작별인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