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3 연중 제6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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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2 | 조회수1,54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고 물가에 심긴 나무 같아 가문 해에도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5,12.16-20 주해 12절 12절부터는 본래 주재라고 할 수 있는 “죽은 이들의 부활” 문제가 다루어진다. 코린토 전서에서 “죽은 이들”이라는 단어가 언급되는 곳은 15장뿐이고 그것도 12절에서 부활과 관련되어 자주 언급된다. 앞 단락에서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 기초 신앙을 제시한 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일부 신자들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12-19절에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주장의 논리적 귀결에 대해 말한다. 17절 바오로는 “죄”를 보통 단수형으로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복수형이다. 이 현상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설할 수 있겠으나 가장 직접적인 설명은 여기 나오는 “죄”에 대한 언급이 3ㄴ절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절 “이 삶”은 흔히 “이승”으로 의역된다. “...만”에 해당되는 모논은 어디에 연결하느냐에 따라 번역이 좀 다를 수 있다. 희망과 연결하여 번역하면 “이 삶에서 그리스도께 희망만 걸고 있다면 ...” 그러나 문맥상 위에서처럼 “이 삶”에 연결하는 것이 옮다. “희망을 걸고 있다”의 원어는 현재완료 분사로 강조되어 있다. 여기 19절에서 독자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왜 그토록 중요한 문제로 다루는지를 알게 된다. 즉, 바오로에게 있어 “죽은 이들의 부활”이란 사변적 호기심 차워늬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희망으로서 현재의 신앙 태도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문제다.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주해 17절 “평지”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평지설교”, “산”에서 가르치셨다 하여 “산상설교”라 한다. 20절 60ㄴ-49와 마태 5.3-7.29에는 예수님의 중요한 가르침이 집성되어 있다. 두 복음사가는 그것을 어록에서 옮겨실었는데, 제각기 자신의 관점에 따라서 가감.수정했다. 루카는 어록을 대체로 충실히 옮겼고 마태오는 많이 고쳤다. 행복선언 마태오의 산상설교와 루카의 평지설교 모두 행복선으로 시작한다. 그렌데 마태오에는 아홉가지 행복선언, 루카는 네 가지 행복선언이 있다. 어록에는 루카의 경우처럼 네 가지 행복선언이 있었다. 그렇다면 마태오는 어록을 옮겨쓰면서 다섯 가지 행복선언을 창작. 첨가하여 아홉 가지를 만들었겠다. 어록의 네 가지 행복선언 가운데 처음 세 가지는 예수 친히 발설하셨고 마지막 한 가지는 전승자 아니면 어록작가가 가필했다는 게 신약학계의 통설이다. 예수께서 친히 발설하신 행복선언의 뜻을 밝힐 차례다. 그분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라고 외치셨다. 지금은 숨어 계신 하느님께서 곧 임금님으로 나타나 선정을 베푸실 때가 임박했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될 것이다. 못난 자들이 비록 지금은 비참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 처지가 아주 달라지겠기에 그들은 복된 것이다. 선하신 하느님의 곧 왕도를 펴시면 지금의 참상이 크나큰 축복으로 뒤바뀌겠기에 그들은 복된 것이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은 이사 61.1 참조.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아끼셨지만 루카는 예수님의 그런 면을 한결 더 강조했다. 21절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는 이사 49.10 참조.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는 이사 25,6-9 참조. 22절 마지막 행복선언은 박해받던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만들어 덧붙였다. 사실 마지막 행복선언은 그 문체나 내용이 삼중 행복선언과 사뭇 다르다. 삼중 행복선언이 운문이라면 마지막 삼중 행복선언에는 인간이 취할 자세에 대한 말이 없는 데 반해 마지막 행복선언에는 “인자 때문에”박해를 받는 자세가 요구된다. 삼중 행복선언에서는 무조건 하느님의 나라를 약속하는데 비해 마지막 행복선언에서는 정당한 보상을 약속한다. 삼중 행복선언은 선문인데 비해 마지막 행복선언은 그리스도론이다. “내쫓고”는 유다교 회당에서 추방하는 것을.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은 유다교인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을 뜻하리라. 불행선언 네 불행선언은 루카복음에만 있다. 루카는 네 행복선언과 짝을 맞추어 네 불행선언을 덧붙였으리라.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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