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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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4 | 조회수1,53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1,12-18 주해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는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이다. 시련과 유혹과 하느님의 선물 12-18절은 느슨하게 연괼되는 새 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12절은 1,2-24의 내용을 다시 다루고,13-18절은 하느님을 옹호하는 변신론적 내용이다. 12절 12절은 이른바 행복선언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시련을 참고 견디는 사람이 종말에 받을 영생이다. 13절 원문에서는 12절의 “시련”과 13절의 “유혹”이 같은 낱말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사람을 유혹한다는 말이 가끔 나온다. 이런 표현은 아직 신개념이 미숙했던 탓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유혹하여 악으로 이끌 리는 없다. 따라서 죄의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는 없다. 야고보는 집회 15,11-20처럼 인간의 자유와 책임, 도덕적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여기서 마귀는 역할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주목할 만하다. 14절 “욕심” 혹은 “욕구”는 죄로 이끄는 내재걱 힘이다. 이 힘 자체는 시련의 계기가 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지만, 사람이 각기 육신에 동의하면 죄를 짓게 되고 죄의 무서운 결과는 죽음이다. 로마서 5,12; 6.23에서 말하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과 대조적이다. 요컨대 올마른 길을 택하라는 힘찬 훈계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자들에게 약속하신 영생과 상반되는 종말론적 죽음이다. 16절 16-17절은 13절에서 언급한 자기기만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쁜 것이 나올 수는 없다. 오히려 그분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다. 하느님은 빛의 근원으로서 해와 달, 그밖의 별들도 그분이 만드셨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런 천체들은 그 운행에 따라 수시로 변하며 밝아졌다가는 어두워지곤 하지만, 하느님은 변함없는 빛 자체이시며 오직 선을 내리신다. 18절 가장 훌륭하고 완전한 선물에 관한 말이다. “진리의 말씀”은 신자들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복음이다. 복음을 믿음오로써 신자들은 새 생명을 얻고 새 창조의 첫 열매가 되었다. 복음<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주해 군중을 먹이신 기적에 대한 대답 마르코는 오천 명,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사화, 귀먹은 반정어리를 고쳐주신 이적사화, 그리고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 이적사화를 참작하여 8,14-21을 엮었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몰이해를 강조한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백성을 가르치고 특히 제제들을 교육하셨으나 백성은 가르치고 특히 제자들을 교육하셨으나 백성은 물론이고 제자들조차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기 대목은 대부분 마르코가 앞뒤 문맥을 참작하여 창작한 것이지만 한두 가지 전승요소도 실었다. 우선 15절은 전해온 단절어를 수록한 것이다. 비슷한 단절어가 루카 12.1ㄴ에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4,16.17ㄱ절은 전승된 상황어일 가능성이 없지 않다. 상황어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겠다.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되었을 때는 빵을 갖고 가지 않았지만 평소 그분을 따라다닐 때는 빵이나 물고기 따위를 마련해 갖고 다녔다. 그런데 언젠인가 빵을 한 개밖에 가져가지 않아 끼니 걱정을 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나무라시고 하늘의 새와 들의 꽃까지 돌보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라고 하셨으리라. 15절 15절 단절어의 변체 루카 12.1ㄴ: “무엇보다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위선을 경계하시오.” 그러니까 루카 12.1ㄴ에 비해 여기에는 “헤로데의 누룩”이 덧붙여 있다. 이는 마르코가 추가한 것이다. 앞서 마르코는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사람들을 나란히 열거한 바 있고, 또한 헤로데에 관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 “누룩”은 흔히 악영향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무슨 악영향인지 밝히지 않는다. 17절 17ㄴ절부터 21절까지는 마르코가 앞뒤 문맥을 참고하여 전적으로 창작한 것인데, 한결같이 제자들의 무지를 탓하시는 말씀이다. 18절 “여러분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까”는 예레 5.21을 옮긴 인용문이다. 마르코는 그것을 인용하면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이적사화와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 이적사화을 연상했을 것이다. 21절 제자들의 몰이해를 탓하는 이 말씀은 현재 문맥을 따라 풀이하면, 오천 또는 사천 명을 먹이고도 많은 빵이 남는 이적을 행한 당신이 함께 계신데 빵이 한 개밖에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지각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다음 대목으로 옮겨가기 전에 이제까지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예수께서 하느님의 선정을 선포의 주제로 삼고 그 위력을 여러 가지 행적으로 드러내셨건만 사람들은 도무지 그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백성도,종교계와 정계 지도자들도 아니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모두 눈먼 소경들이다. 예수 친히 이 소경들을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그들 스스로는 예수님의 정체를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는 뜻으로 이제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시는 것이다. 그 소경처럼 시력을 되찾은 제자들이 비로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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