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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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5 | 조회수1,137 | 추천수3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주해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일 무엇보다도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는 19.27절에 주로 이 주제와 관련이 있는 단절어를 보았다. 19.21절은 말씀을 듣는 태도를 말하고, 19.20절은 분노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20절 20절은 본디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말(단절어)인데, 필자가 19ㄷ절의 “분노한다”와 관련시켜 이 자리에 삽입했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의는 바오로가 말하는 이와 다르며, 오히려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의와 비슷하다. 야고보가 말하는 하느님의 의는 뜻이 담긴 계명,특히 사랑의 계명과 그 계명을 따르는 생활을 가리킨다(3. 18 참조) 21절 21절은 영세자들을 위한 훈계를 연상시킨다. 더러움과 사악은 이방인으로서의 과거를 말하는 것 같다. “뿌리내린 말씀”은 18ㅈ러의 “진리의 말씀”과 같은 것으로 사도들의 전통교리를 가리킨다. 히브리어의 “영혼”은 생명체인 인간 전체를 뜻한다. 22절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반드시 실천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실천이 야고보의 최대 관심사다. 25절 “자유의 완전한 법”이란 모세와 법을 완성하는 예수의 교사, 특히 사랑의 계명이다. 이것은 사람을 억압하는 법률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과 목표에 걸맞은 참된 자유로 이끄는 법이다. 26절 야고보서가 집필될 무렵 교회 공동체에서는 종교에 관한 논쟁이 많이 벌어진 것 같다. 27절 “고아와 과부들”은 곤란한 처지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대표적 존재다. 이런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이미 구약의 대표적 존재다. 이런 사람들을 돕는 것은 이미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가장 절실한 윤리적.종교적 요구였고 또한 예수께서 말씀하신 심판의 평가기준이 된다. 야고보가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실제적이며 평범한 신앙생활이다. “세속”이란 이방인들의 사고방식과 개인적인 “욕심”을 의미한다(4.4 참조). 복음 <눈먼 이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다.> 주해 벳사이다의 소경을 고치시다 여기 이적사화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신 이적사화와 매우 닮았는데 두드러진 공통점을 지적하면. 사람들이 예수께 병자를 데려오고, 예수께서 병자를 따로 데려나가서,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 그런 까닭에 두 이적사화는 전승과정에서 짝지어 전해온 이중이적사화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는데 예를 들면, 여기서는 단계적으로 고쳐주신다. 단계적 치유는 그리스 이적사화에 더러 나오는 소재다. 치유이적 사화 끝에 으레 나오는 “목격자들의 반응”이 안 보인다. 시몬의 장모를 고치신 이적사화에도 경탄이나 경탄사가 생략되었다. 22절 벳사이다는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하구 동쪽 호숫가에 자리잡은 어촌이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그곳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벳사이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셨다. 26절 눈을 뜨게 된 사람을 보내시며 집으로 갈 것이지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 마을 밖에 있는 외딴집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은 마르코가 메시아 비밀사상과 관련하여 자주 내세우는 함구령의 일종이다. 예수께서는 별난 기적쟁이로 소문나는 것을 싫어하시고 다만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인정받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레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사건을 소문내지 말도록 명하셨다는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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