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7 연중 제6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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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6 | 조회수87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고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 주해 차별문제 2,1-13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를 비교적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 야고보는 가난한 사람들을 두둔하는데, 이는 1.27에서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라고 한 훈계와 상통한다. 1절 신앙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율일한 판단기준이며 그분의 영광이 유일한 영광이다. 신약성서에는 하느님의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는다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2-4절에서 필자는 대인논법을 사용하여 훈계한다. 이 논법의 어조로 미루어 야고보의 교회에서 가난하 이들을 실제로 그토록 차별했다는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다. 4절 “서로”는 “마음속으로”라고 번역하루 수도 있다. 사람을 차별하는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과 정반대이므로 악한 심판이다. 5절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두어 그들을 선택하신다. 야고보는 가난한 이을 경멸하고 부자를 두둔하는 처사의 그릇됨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지적한다. 가나한 이들은 하느님이 당신 나라의 상속자로 택한 사람들이다. 부자들은 흔히 교회를 괴롭힌다. 야고보는 여기서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고 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가난한 이들의 부자들을 두고 말하는 것 같다. 부자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더 쉽게 신앙을 받아들여 이미 이 지상에서 많은 영적 선물을 받았다. 그들은 또한 누구보다도 먼저 장차 올 하느님 나라의 부를 약속받았다. 이와같이 하느님은 모든 세속적 가치들을 전도시키신다. 6절 “모욕합니다”의 그리스 원어는 과거시제이지만 그것은 2-3절의 실례를 생각해서 택한 시제이고, 야고보의 본뜻은 일반적인 경향을 경고하려는 데 있다. 당시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이 이미 어느 정도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6-7절의 내용을 보면 역시 부자들은 교회를 반대하고 박해하는 유다인과 이방인 부유층이다. 7절 아무개 위에 어떤 이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들 그 어떤 이의 소유로 만든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위에 야훼의 이름이 불렸다는 것도 그런 뜻이다. 그리스도 신자들 위에 불린 이름은 예수의 이름이다. 세례 때 주례자는 영세자 위에 예수의 이름을 불러 예수의 소유로 선언한다. 그리스도 신자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주로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다. 8절 8-12절에서 야고보는 하느님의 계명이 차별을 금지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하느님의 계명대로 사랑해야 할 이웃은 무엇보다 먼져 가난한 사람이다. “왕도”를 직역하면 “왕다운 법”또는 “왕의 법”이다. 8-12절의 문맥이 보여주는 바와같이 여기 “법”이란 이웃사람의 계명뿐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기초를 둔 그리스도교의 윤리법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오로와 달리 야고보는 율법을 높이 평가하여 그것을 법 중의 왕자다운 법이라고 강조하며, 지키는 사람에게는 참다운 자유를 준다고 한다. 야고보의 인용문 중에는 의식법이 없고 윤리적 계명만이 나온다. 형식주의를 배척하고 예수의 율법해석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법의 중심은 사랑의 계명이다. 복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주해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전승자 혹은 마르코는 예수의 정체에 관한 군중의 여론과 베드로의 고백을 한데 묶어 스승과 제자들간의 대담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는 본디 따로 전해온 독자적 전승요소였다. 군중의 여론은 6.14ㄴ-15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두고 실제로 그런 여론들이 나돌았다. 베드로의 고백도 역사적 신빙성이 있을까? 실지로 베드로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근처에서 예수의 신분을 밝혀 “당신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했다는 설이 있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 공생활 때의 사실보도이기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인상이 짙다. 사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사건들을 특히 십자가의 부활 사건을 선포하고 믿기도 했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의 정체를 밝혀 “예수께서 주님이시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라고 환성을 질렀던 것이다. 베드로의 답변은 바로 이 환성의 변형이다. 환성이야말로 가장 깊이있는 신앙고백이다. 27절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헤로데 대왕의 아들이며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의 이복 동기인 헤로데 필립보가 헤르몬 산 아래 지하수가 펑펑 솟아나는 자리에다 기원전 2년경에 세운 도시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백리쯤 되는 곳. 지금은 “바니아스”라 한다. 지금까지는 예수께서 자주 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다니셨으나 이제부터는 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길”을 가신다. 그분이 예루살렘에서 처형된만큼 거기로 가시는 것은 죽음에의 행진이다. 30절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나 영화를 누리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실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있기 전에는 당신 정체를 알리지 못하도록 함구령을 내리신다. 31절 “가르치기 시작하다”는 전형적인 마르코 문제다. 이 복음서에 “가르치다”는 17번 “... 하기 시작하다”는 26번쯤 나온다. 고난당하는 인자 “마땅히 ... 해야 한다”에는 하늼의 뜻에 절대 복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가짐이 엿보인다. 원로들은 유지들을, 대제관들은 종전 제관들을 , 율사들은 주로 바리사이계 율법 전문가들을 뜻한다. 이들이 모여 최고의회를 구성했는데 실지로 예수 수간의 주역들이었다. 수난의 주역 열거는 사후예언이다. “사흘 후에”, “사흘 만에”는 같은 뜻이다. 31절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를 3일로 잡은 것은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선포문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제 선포문에서 그렇게 부활됨을 명시한 이유에 관해 세 가지 설이 있다. 1) 부인들이 무덤에 예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한 때가 일요일, 곧 돌아가신 지 삼일 만이었다고 보는 설, 가장 신빙성이 있는 설이다. 2) 예수께서 처음으로 발현하신 때가 돌아기신 지 사흘만이었다고 보는 설: 부인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다는 언급, 엠마오로 가고 있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발현사화에 나오는 발현 날짜를 너무 순진하게 믿는 설이다. 3) 의인들이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사흘 만에 부홀하셨다는 신조가 그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이는 꼭 사흘을 뜻하는 게 아니라 가까운 시일을 의미한다는 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부활임을 명시할 때 언제나 “사흘 후에” 또는 “사흘 만에”라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납득이 가지 않는 설이다. 32절 “명백히”는 공관복음 전부를 통틀어 여기에만 나오는 낱말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받으실 것을 “명백히”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했으나 수난하는 그리스도이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스승을 나무란 것이다. 33절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가면 스승은 앞서가고 제자는 디따라갔다. 그러므로 “내 뒤로 물러가라”하신 말씀은 베드로가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 스승을 따를 생각을 하라는 뜻이다. 사탄은 귀신들의 두목. 베드로는 사탄의 사주를 받아 예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려는 것을 만류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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