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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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8 | 조회수1,058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3,1-10 주해 혀의 위험 중심 부분의 샛째 주제는 말의 절제다. 여기서는 1,26에서 언급한 문제를 다시 정열적으로 거론한다. 혀로 죄짓지 말라는 훈계는 실천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보는 야고보의 깊은 염려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여기서는 특히 예배 모임을 두고 훈계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선 설교와 토의 때 말조심하라는 셈이다. 1절 당시 교회에서 교사들은 응분의 은사를 받은 신분에 속했다. “우리”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필자도 한 교사다. 교사들의 책임은 무겁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남보다 잘 알고 있으니, 그 의무를 게을리한 경우,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야고보가 특히 염려하는 것은 교사들의 말실수다. 이것은 교사뿐 아니라 교사인 양 자기 의견을 너무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에게도 해당한다. 2절 말실수를 피하고 혀를 잘 다스리는 것은 구약 지혜사상의 중요한 주제다. 3-8절에서 야고보는 두 비유를 들어, 혀라는 작은 지체가 대단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다. 3절 비유에 나오는 재갈과 키는 주로 좋은 효과를 내는 것이지만, 주로 좋지 않은 점을 생각한다. “사랑만은 대단합니다”는 직역하면 “큰 일들을 자랑합니다”. 6절 “인생”대신 “생김” 또는 “현존”이랄 번역할 수도 있다. “인생의 수레바퀴”라는 표현은 유회론을 연상시킨다. 잘 다스려지지 않는 혀는 온 인간세계를 불처럼 태운다. 또한 혀는 거짓말로 세상을 더립히니, “불의의 세계” 지체라고 한다. 혀의 불은 지옥에서 나오는 불이란다. 디 부분의 좀더 구체적인 배경을 집회 28,10-26같은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필자의 관점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설교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필자도 자극적인 표현을 쓰면서 웅변조로 말하는 것이다. 8절 시편 140.4에서 악한 말을 독약이라 한다. 9절 9-10절에서 혀의 이중적인 역할을 공박한 나머지 11-12절의 비유 이야기는 균형을 잃게 된다. 복음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다.> 주해 영광스러운 변모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야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심을 명백히 깨달았다. 그러면서 평소 자기들이 스승을 따라다닐 무렵 그분의 인품과 언행에 비범한 면이 있었음을 상기하고 하느님의 외아들이셨기에 그러셨구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도 하느님의 외아들이셨음을 밝히려고 변모사화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자기들이 3년 가까이 예수님을 모시고 다니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체를 그처럼 못 알아보았을까 하고 스스로 묻기도 했다. 이 물음에 마르코는 자기 나름대로 이렇게 답변했다. 일찍이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와는 달리 사람들은 둔갑해서 그분이 심문을 받으시고 돌아가기 이전에는 도무지 그분의 신분을 파악할 수 없었다. 부활하실 때까지 그것을 비밀로 간작하라는 스승의 함구령 때문에 발설할 수 없었다. 이것이 마르코 나름의 풀이다. 이제 변모사화에 들어 있는 소재들을 보면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원사화에 나오는 소재와 비슷한 데 많다. 이는 예수께서 하느님 같은 초월적 존재라는 셈이다. 또한 묵시문학의 종말서술에서 빌려온 소재도 현저하다. 이는 예수께서 종말을 앞당겨 사신 종말론적 존재라는 것이다. 2절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레째 날에 나타나셨다(출애 24.16). 세 제자는 5.37; 24.33에도 나온다. 출애 24.1.9에도 모세를 동반한 사람 셋이 명기되어 있다. 출애 24.15에서는 시나이 산. 묵시문학계에서는 하느님과 천사들이 흰옷을 입고 있으며,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도 빛나는 옷을 입으리라고 한다. 3절 묵시문학계에서는 종말에 부활할 의인들의 모습이 변하리라고 보았다. 4절 유다교에서는 에녹과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하여 하늘에 산다고 보았다. 모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 모세와 엘리야는 천상적 존재로서 변모하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5절 사람들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는데 선생이라는 뜻이다. 예수시대에는 율사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런 존칭을 사용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들 교직자 아닌 사람을 보고도 “선생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1세기 말엽부터 랍비는 율사만을 가리키는 존칭으로 국한되었다. 변모하신 예수님,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는 천상 존재들이다. 이런 이들은 마땅히 “영원한 초막에”거처하게 마련인데, 베드로는 현세적 초막을 지어드리려 한다. 여기 초막은 초막절의 초막을 연상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수를 하고 나서 온 민족이 예루살렘에 모여 나뭇가지로 초막을 세우고 이렛동안 그 안에서 지냈다. 이는 시나이 사막에서의 천막생활을 회상하는 축제였다. 6절 베드로의 몰이해는 마르코가 덧붙인 구절일 것이다. 그럼 마르코는 베드로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았을까? 베드로는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과 함께 되도록 오래 지내려 할 뿐 그분이 고난을 당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천상 존재가 나타나면 인간은 으레 두려워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종교학계에서는 초자연계를 전율의 신비라 일컫는다. 출애 24.16에도 구름에서 소리가 난다. 세례 때에는 하느님이 예수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는데,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정체를 밝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신다. 신명 18.15를 연상케 한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들 동족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명심해서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7ㄴ절을 이해했다. 9절 9-10절은 마르코가 변모사화와 엘리야 재림논쟁을 연걸하면서 덧붙인 것이다. 9절은 복음서의 맨 마지막 함구령이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날 때까지”라 하여 함구시한이 명시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십자가의 부활 사건을 겪고 난 다음에 비로소 이승의 예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의 선포문을 보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주제로 삼았다. 10절은 제자들의 몰이해를 내용으로 한다. 11절 종말인 “애훼의 날”이 닥치기 전에 엘리야가 재림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화해시킨다느니 화해시킬 뿐더러 열두 부족을 재건한다느니 하는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데 거족적 화해도 재건도 실현되지 않았으니 종말의 선구자 엘리야가 재림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예수는 종말의 인물일 수 없다. 이것이 유다교인들의 반론이었다. 12절 12-13절은 그 반론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답변이다. 우선 12절의 뜻을 풀이하면, 종말의 선구자 엘리야에 관한 예언도 있지만 종말의 인물 인자에 관한 예언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야가 먼저 와서 거족적 화해와 재건을 이룩하리라는 예언과 인자가 나중에 와서 많은 고난과 멸시를 당하리라는 예언은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예언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인자의 수난에 관한 예언으로 구약성경 어느 대목을 내세웠는지 아무런 말이 없다. “자로잡아 놓은다구요?”(의문문) 대신 “바로잡아 놓습니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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