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 연중 제7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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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19 | 조회수1,01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 주셨지만, 저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26,2.7-9.12-13.22-23 -. 다윗은 사울에게, 주님께서 사울을 자기 손에 넘겨주셨지만, 자신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제2독서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해 45절 “자연적 생명체”를 직역하면 “살아 있는 프쉬케”또는 간단히 “살아 있는 혼”,“살아 있는 존재”. 이 표현은 창세 1장에서 사람뿐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적용된다. 바오로는 프쉬케를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데, 하나는 히브리어 네페쉬에 해당하는 뜻으로 생명을 뜻하거나 해당하는 사람 자신을 뜻한다. 다른 한편, 바오로는 프쉬케를 여기 45절에서처럼 “생명을 주는 원리”라고 볼 수 있는 “영”에 대조시켜 “사멸할 생명(체)”라고 볼 수 있는 “영”에 대조시켜 “사멸할 생명(체)”의 의미로도 드물게 사용한다. “마지막 아담”, 즉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는 그리스도론적 언표다. 바오로에게서도 “영”과 “생명”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49절 원어는 에이콘. “성. 모습. 모사” 등을 의미한다.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주해 원수를 사랑하라 27ㄴ-28절에는 원수 사랑의 세 가지 사례가 있다. “미워하는 사람들. 저주하는 사람들. 헐뜯는 사람들” 따위 원수들을 위해서 선행을 축복하며 기도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형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 하니 그분은 원수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29절 앞뒤 문맥은 “여러분에게”하신 말씀인 데 비해서 29-30절은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 내용인즉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악을 감수하여 악순환을 차단하라는 것인데, 그 세 가지 사례는 한결같이 충격적이다. 성현이 아닌 이상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구체적인 요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지켜야만 하는 법규가 아닐 것이다. 그 이유인 즉, 예수님은 법규를 제정하는 입법자가 아니셨기 때문이다. 사실 그분은 율사들 계열에 속하기보다는 예언자 계열에 속했던 것이다. 또한 대제관의 경비병이 예수님의 뺨을 때렸을 때 그분은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고 오히려 항의하신 사실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인 지침을 업신여겨도 좋다는 말인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여기 구체적 지침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유다교의 동태복수법을 넘어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는 반복수법으로 환원되고, 또한 반복수법은 마침내 ”이웃 사랑”으로 환원된다. 또한 29-30절의 구체적인 지침은 결국 이웃 사랑을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라 하겠다. 29절의 병행문이 마태 5,39ㄴ-40에 있는데 그 표현과 내용이 약간 다르다. “오히려 누가 당신한데 당신의 당신의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쪽 뺨마저 돌려대시오. 당신을 재판에 걸어 당신의 속옷을 가리려는 사람에게는 겉옷마저 내주시오.” 30절 30절의 병행문이 마태 5.42에 있는데 그 표현과 내용이 조금 다르다.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은 물리치지 마시오.” 31절 31절은 매우 값진 훈계인 까닭에 황금률이라 한다. 황금률은 이미 예수 이전에 이스라엘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예로, 힐렐은 “너에게 기껍지 않은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자공과 공자 사이의 이런 대담이 논어에 전해온다. “자공이 ‘남이 나에게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나도 남에게 그것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하고 말하자, 공자는 ‘자공아, 네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예수께서 가르치신 윤리규범 중 가장 포괄적인 원칙이다. 32절 비록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반대급부가 있는 경우에는 상대방을 돌보는 법. 그러나 제자들은 반대급부를 바라지 말고 상대방을 돌봐야 한다는 사례 세 가지가 32-34절에 있다. 이 가운데서 32-33절의 변체가 마태 5,46-47에 있다. ”사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보수를 받겠습니까? 세관원들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넘치는 일을 한단 말입니까?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앉습니까? 그러나 34절은 마태오에 없는데, 루카는 어록에 있던 마태 5.42를 참작하여 34절을 만들어 덧붙였을 것이다. 35절 루카는 27ㄱ. 33.34절을 합쳐서 36ㄱ절을 만들었으리라. “그러니 여러분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잘해 주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시오(34절).” 35ㄴ절에서는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동기를 두 가지 제시한다. 우선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 되는” 종말론적 보상을 받기 위함이지만, 종국적으로는 하느님의 가이없는 인자하신 처사를 본받기 위함이다. 35ㄴ절의 변체가 마채 5,45에 전해온다.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여러분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36절 36절은 본디 단절어. 내용인즉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처사를 본받으라는 것인데. 공관복음의 경우 35.36절에만 “하느님의 모방”사상이 명백히 드러난다. 36절의 변체가 마태 5.48에 있다. “그러니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하게 되시오.” 36절은 어록을 고스란히 옮겼고 마태 5,48은 어록을 고쳤다. 현재의 문맥에서는 원수 사랑 집성문을 끝맺고 자비에 관한 집성문(37-42절)을 유도한다. 판단하지 말라 37.38ㄱ.38ㄴ.39.40절에 다섯 가지 단절어가 있고 41-42절에 한 가지 비유를 덧붙였다. 37절 어느 누가 지금 이웃을 대하는 그대로 종말에 하느님께서도 그를 대하시리라는 종말론적 인과율이다. 37절의 변체가 마태 7,1-2ㄱ에 있다. “판단하지 마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판단받지 않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판단하는 그대로 여러분도 판단받을 것입니다.” 38절 38ㄱ절은 어느 누가 지금 이웃에게 베풀면 종말에 더 후하게 받으리라는 단절어. 종말론적 은총률이다. 마르 4.24 끝에도 간략하게나마 종말론적 은총률이 있다. 마태 20,1-15에도 같은 사상이 있다. 38ㄴ절은 종말론적 인과율. 같은 단절어 변체가 마태 7,2ㄴ에도 있고 마르 4.24에도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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