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연중 제7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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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2-25 | 조회수1,40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 5,13-20 주해 13절 13-15절의 세 경우 가운데 13절의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며, 14-15절의 병환은 13절에서 말하는 고통의 한 가지다. 신자는 이전처럼 모든 상황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며 영육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그분과 나누어야 한다. 이것은 시편의 영성과 동일한 신앙태도다. 사실 13절의 “찬미의 노래를 부르십시오”는 “시편을 부르십시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14절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도유는 의학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ᄆᆞ르 6.13에 의하면 예수가 파견한 영두 사도는 “병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주었다”고 한다. 여기 기름은 기도의 입체적 표시다. 14절의 “주님”은 예수일 것이다. 야고보는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라”고 하는데,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전제한다. 즉 바오로가 세운 교회들과 달리 야고보의 교회에는 장로라는 직책이 있었다는 것 , 장로들이 치유의 은사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1디모 4.14에 의하면 교직자는 장로들의 안수로 은사를 받게 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병자성사의 근거를 이 구절에 두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병자성사의 근거를 이 구절에 두었다. “교회 장로들”이라는 복수형 때문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오늘날까지 병자성사 집행사에 일곱명의 사제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야고보는 이런 해석보다 병자를 위한 자유로운 “기도회”를 생각했을 것이다. 15절 “믿음의 기도”는 은사에 의한 특별한 효력을 가진 기도를 가리키는 것 같다.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바오로의 서간에서도 언급된다. “구하다”와 “일으켜 주시다”는 종말의 구원과 부활을 가르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문맥상 오히려 육체적 치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야고보는 병이 낫지 않는 경우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 교회 안에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야고보는 임종의 위중한 경우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경우에 병은 죄 때문에 생긱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육체적 치유와 함께 마음도 치유되고, 육체의 치유는 그 마음의 치유에 대한 표시다. 16절 16-18절은 기도에 관한 일반적 훈계다. 그러나 15절과 16절은 죄의 용서와 기도와 치유의 새 주제로 연결되어 있다.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병자는 죄를 고백했을 것이다. 이제 16절에서는 신도 상호간의 죄악 고백을 권고한다. “서로”라고 하니 이것은 고백의 성사가 아닐 기도 모음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용서함으로써 기도의 효력을 보장받으라는 것이다. 마태 5,23-26과 마르 11,25도 서로간의 화해를 전제조건으로 요구한다. “의인의 기도”는 구약시대 성인들의 기도를 연상시킨다. 그 가운데에서는 아브라함,모세, 예레미야 특히 백성을 전구자로 이름이 났다. 그러나 17-18절에 나오는 엘리야의 예를 보면, 16절은 전구에 구원되지 않고 모든 기도를 두고 하는 말이다. 야고보에 의하면,죄의 고백으로 깨끗해진 신도의 기도는 구약의 위인들의 기도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다. 17절 1열왕 17-18절에 의하면 엘리야는 예언만 했을 뿐, 기도하지는 않았다. 또한 가뭄이 3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5.17;루카 4.25에서는 가뭄 기간을 3년 반이라 한다. 야고보와 루카는 다른 전승을 사용한 것 같다. 19절 “진리를 떠난” 사람은 올바른 생활을 떠난 죄인이다. 야고보는 그릇된 이론보다 그릇된 행동을 경고하면서 교우간의 충고를 권한다. 20절 “영혼”대신 “목숨”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물론 여기서는 종말론적 생명의 죽음을 다룬다. “그의 영혼”은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는 죄인의 영혼일 것이다. “죄를 덮어 버리게 된다”고 하는데 이는 죄인을 돌아서게 하는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이리라. 아니면 두 사람 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알아 두십시오”라는 명령법의 대사인 “형제 여러분”인지 아니면 “죄인을 돌아서게 하는 사람”인지 사본상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복음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주해 어린이를 사랑하시다 이 대목은 어린이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다는 상황어와 어린이처럼 처신해야만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다는 단절어로 짜여 있다. 상황어에는 여러 어린이가 나오며 그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데 아무런 조건도 없다. 그러나 단절어를 보면 어린이처럼 처신하는 조건 아래 하느님 나라로 갈 수 있다. 13절 누가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든지 밝히지 않는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도록 어린이들을 데리고 왔다. 이스라엘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율사가 제자나 어린이를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데려온 사람들을 나무랐을 것이다. 14절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들 차지라는 말씀은, 그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차지이며 굶주리는 사람들은 배부르게 되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위로를 받게 되리라는 행복선언문과 같은 계열에 속한다. 한결같이 오늘날 못난이들에게 무조건 종말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희망의 말씀들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통치는 소외자들을 돌보시는 선정이라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 15절 15절은 본디 문맥과 상관없이 전해온 단절어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는 벌어 먹지 않고 받아 먹는다. 그처럼 아예 하느님 나라를 벌어들일 생각은 말아야 한다. 바리사이마냥 율법준수로 지금 공덕을 쌓아 장차 하느님 나라를 벌어들일 생각을 한다면 큰 잘못이다. 하느님 나라, 하느님 통치, 곧 하느님은 오늘도 은혜롭게 오시므로 그 임을 모셔들일 생각을 해야 한다. 모셔들임은 돌아섬이요 기댐이다. 지금 힘없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면 장차 “힘차게 오는” 그 나라로 들어갈 것이요, 지금 꼭꼭 숨어 계신 하느님을 모셔들이면 장차 훤히 드러나실 그 임께로 갈 것이다. 믿음의 차원에서는 언제나 은총이 공덕보다 앞서고 은혜가 선행보다 앞서는 법이다. 16절 16절은 본디 13-14절과 직결되었다. 상황어는 대체로 예수의 말씀으로 끝맺는 법인데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그렇지 않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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