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6 사순 제2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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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3-15 | 조회수90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어서 그를 치자.> -.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놓았다고 주님께 하소연한다. 복음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다.> 주해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20,17-19)는 마르코의 세 번째 예고를 거의 그대로 옮겨쓴 것이다. 다만, 상황묘사 부분은 간결하게 줄였다. 첫 번째 예고와 두 번째 예고에는 언급되지 않은 요소들이 있으니, 곧 사형선고, 이방인들에게 넘김, 조롱, 채찍질, 십자가형에 처함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데, 다음 단락(20-28절)에서 제자들은 몰지각하게도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 20,20-28은 마르 10,35-45를 거의 베낀 것이다. 20절 출전인 마르 10.35에선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간청한다. 마태오는 그들의 어머니가 간청했다고 고쳐썼다. 왜? 평소 예수께서 아끼신 두 제자를 보호하려고 그렇게 고쳤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수난사화를 종합해 보면 두 제자의 어머니 이름은 살로메였을 것이다. 21절 “당신의 나라”는 28절을 고려할 때 “인자의 나라”다. 인자의 나라는 예수께서 종말에 재림하여 다스리실 온 세상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나라에서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자리들을 차지하여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22절 예수님의 답변은 두 가지다. 현세에서 함께 죽어야만 종말에 함께 다스릴 수 있다는 답변이요, 종말에 자리를 배치하는 일은 아버지 하느님의 전권에 속한다는 답변이다. 출전인 마르 10.38에선 예수님의 질문이 더 길다. “그대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로써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잔은 죽음의 독배를, 세례는 익사를 연상시킨다. 두 상징은 비극적인 죽음을 뜻한다. 23절 출전인 마르 10.39를 보면 예수님의 답변도 더 길다. “그대들은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것이고, 내가 받는 세례로써 세례를 받을 것입니다”. 24절 24-28절은 본디 20-23절과는 상관없이 따로 전승된 상황어 또는 단절어였을 것이다. 그런데 후대의 어느 전술자는 따로따로 전해온 20-23절과 24-28절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놓았다. 25절 예수께서는 비정한 정치현실을 꿰뚫어보셨다. 정치, 특히 당시의 전제정치는 압제와 폭정을 일삼고 있었다. 26절 정계의 압제와 폭정과는 정반대로, 제자단과 교회에선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 마땅하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유행어다. 실상 그 변형태가 23.11; 마르 9.35; 루카 9.48에도 나온다. 26-27절의 경우에는 “크게 되다- 봉사자가 되다” 유행어와 “첫째가 되다- 종이 되다” 유행어가 짝지어 나오는 까닭에 이중유행어 또는 유행어 병행문이라 하겠다. 우리 교회가 이중유행어대로만 산다면 교회야말로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대조사회. 대인사회, 대적사회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상징을 빌려 말한다면 땅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것이다(5.13-16). 28절 봉사자와 종의 모범으로 이제 예수님을 내세운다. 28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매우 감명깊게 풀이한 그리스도론이다. 요컨대 예수님의 일생은 남을 섬기는 삶이었고, 그분의 죽음은 온 겨레와 인류의 죄를 기꺼이 대신 속죄하는 대속적행위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그러하기에 그분을 일컬어 “남을 위해 사신 분”이라 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남녀 평등이 아니라 여성상위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제 여성만을 위한 여성가족부라는 부처는 없어도 좋을 듯하다. 남과 여를 갈라치기 하지 말고 한 인간으로서 하나의 사람으로서인데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랴.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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