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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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3-24 | 조회수94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제1독서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할 것입니다.> -.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한다. 제2독서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주해 4절 짐승을 바치던 옛 제사는 해마다 반복하여 거행했지만 죄를 깨끗이 씻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죄의식을 새롭게 갖게 했다. 옛 제사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예언자들도 자주 이야기했다. 5절 5-7절은 시편 (LXX) 40.7-9의 인용이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몸을 마련하다” 대신 “귀를 마련하다”로 되어 있다. 후기 유다이즘에서는 이 시편을 미래의 새로운 다윗왕에 관한 예언으로 해석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보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시편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느님과 나눈 대화다. 그리스도께서는 옛 계약의 제사가 하느님의 뜻에 들지 않았음을 보시고, 이 세상에 오실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다운 제사를 바치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약속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들어오시는 것과 천상 성소에 들어가시는 것이 서로 비슷하게 표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전자가 제관직을 수행하는 출발점이라면, 후자는 그 종착점으로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들어오시는 첫순간부터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참다운 제사를 자치신 완전한 대제관이셨다. 8절 8-10절에서는 위의 인용문을 반복하면서 그 의미를 설명한다. 율법에 따라 거행된 옜 제사는 하느님의 뜻을 체워 드리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친히 이 세상에 오셨으며, 자신의 몸을 바침으로써 옛 제사를 폐기하고 참된 구원과 성화를 이루는 새 계약의 제제사를 제정하셨다. 그분은 단 한 번 자신을 희생제물로 하는 제사를 바치시어 인류를 거룩하게 만드셨다. 복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주해 예수 탄생 예고 1세기 교회의 신조 또는 시가를 보면 예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할 뿐 탄생과 성장과정을 80년도에 기록된 루카와 마태오 복음 1-2장에 처음으로 나온다. 루카와 마태오는 각기 구전들을 모아서 이 설화들을 꾸몄다. 이설화들은 객관적 사실을 전하는 사건보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과 업적을 밝히는 사상적 서술이라고 보겠다. 곧, 전승자들과 복음사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면서 그분의 인품과 업적을 믿게 되었으며, 그러한 믿음을 예수 사생활에까지 투사했던 것이다. 무릇 위인과 현자들의 수태. 탄생. 성장을 남달리 꾸미는 것은 동서고금의 관습이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식이다. 요컨데 예수의 사생활에 관한 설화들은 근본적으로 사건사가 아니라 의미사라 하겠다. 루카는 예수 탄생을 예고하는 설화에서도 구약성서 소재를 많이 원용했다. 26절 엘리사벳이 수태한 지 여섯째 달(24절 참조). 나자렛은 구약성서에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지명이고, 예수시대에도 하찮은 마을이었다.(요한 1.46). 원문에는 “나자렛이라는 동네” 대신 “나자렛이라는 도시”. 27절 이스라엘에서는 처녀가 결혼한 다음에도 성관계를 맺지 않은 채 1년 남짓 친정에 눌러살았다. 27절의 “정혼”은 이런 상태를 가리킨다. 한 해쯤 지나고 나면 신랑이 신부를 시집으로 데려가서 비로소 성관계를 맺었다. 28절 “기뻐하소서”는 그리스인들의 인사말. 루카는 그리스사람인지라 이런 인사말을 택했다. 유다인들은 예나 이제나 인사할 때 “평화”를 빈다(10.5; 24.36; 요한 20,19.26). 히에르니무수의 라틴어 역본에서는 “은총을 받은 이여” 대신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29절 마리아는 신비에 접할 때마다 곰곰이 생각하곤 한다(2.19.51). 31절 “예수”는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뜻. 마태 1.21에 그 뜻을 풀이했다. 32절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은 그리스인들의 어투. 칠십인역에서도 이방인들만이 그런 표현을 쓴다. 신약성서에는 마르 5.7; 루카 1.32.35.76; 6.35; 8.28; 사도 7.48; 16.17; 히브 7.1 이렇게 아홉 번 나온다. 여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은 32-33절을 고려할 때 다윗이 어좌를 물려받은 임금, 곧 메시아라는 뜻이다. 33절 “야곱의 가문”은 이스라엘 백성. 여기서는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시고, 2.32에서는 이방인들의 메시아도 되신다. 34절 즈가리야처럼 마리아도 질문을 던지는데 그 자세가 사뭇 다르다. 즈가리야는 천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마리아는 일단 믿으면서 해명을 구할 뿐이다.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했으나 성관계는 맺지 않고 지내는 처녀였다. 그런 처지에서 수태하리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해명을 구하게 된 것이다. 마리아가 처녀로서 예수를 잉태했다는 이야기는 신약성서를 통틀어 오직 루카 1,34-35와 마태 1,18-25에만 있다. 그러크로 동정녀 잉태 신앙은 일부 교회에서 그것도 비교적 늦게 생긴 셈이다. 동정녀 잉태 신앙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루카 1.34-35와 마태 1,18-25는 쓰인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는 전통적 해석이다. 동정녀 잉태 신앙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전한다고 보는 해석이다. 위의 단락을 기반으로 하여, 200년경 로마에서 만든 사도신경 전신 신조에 그리고 이것이 발전하여 6세기에 오늘날처럼 확정된 사도신경에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는 조항이 생겼는데, 이 조항르 사건사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정녀 잉태 신앙을 사건사로 보지 않고 의미사로 보는 현대적 해석이 있다. 말하자면, 마리아의 생물학적 이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아 지위, 하느님 아들 지위를 의미하는 발설이라는 해석이다. 35절 성령은 하느님의 기운. 여기 “감싸다”는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킨다(출애 40.35; 민수 9.18.22; 10.34). 본디 하느님 홀로 “거룩하시다”. 아울러 하느님의 기운을 입으신 예수님 역시 거룩하시다. 37절 37절은 창세 18.14 인용문. 38절 마리아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또한 마리아는 신앙인의 귀감이다.(45절).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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