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 사순 제4주간 금요일...독서, 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3-31 | 조회수93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 -. 지혜서는, 악인들이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하며 수치스러운 죽음을 안기려 작당한다고 꾸짖는다. 복음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 주해 1절 예수가 이미 유다에서 활동한 것을 전제한 설명이다. 따라서 7장은 예수의 갈릴래아 활동을 보도한 6장보다는 예루살렘 활동을 보도한 5장에 문맥상 순조롭게 연결된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죽이려 했다는 언급은 5.18을 상기시킨다. “죽이려고 했다”란 말은 원문에 따르면 “죽일 방도를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일부 고대 사본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대신 “돌아다닐 권한이 없으셨다”로 되어 있다. 예수가 아버지의 위임에 따라 잠시 유다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삼가야 했다는 뜻으로서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6절)란 말에 잘 연결된다. 따라서 일부 고대 사본의 내용이 원전에 더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2절 초막절을 “유다인들의 축제”라고 언급함으로써 유다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 우선 거리를 둔다. 초막절은 해방절이나 오순절과 함께 유다인 순례 대축제 가운데 하나로서 티쉬리 15일부터 21일까지 1주간 거행되었다. 이 축제의 명칭은 축제를 위해 만들어 놓은 초막에서 일주일 동안 지낸 데서 유래한다. 원래 초막절은 포도나 올리브와 과일 추수에 대한 감사와 기쁨의 대축제였다. 그러나 나중에 종말 구원의 대망과 연결되었고, 나뭇잎으로 만든 움바, 즉 “초막”은 종말론적 구원의 상징이 되었다. 10절 문맥상 8절과 모순되어 보이는데,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라는 설명으로써 달리 언급한 것이다. 특히 “남몰래”는 원문에서 4절의 “숨어서”와 같은 말이다. 문맥상 “남몰래”라고 의역했을 뿐이다. 따라서 “남몰래 올라갔다”는 “드러나지 않게”와 함께 예수는 자기 형제들의 요구(4절)에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 올라가지 않겠습니다”(8절)는 다만 예수의 형제들의 요구를 거절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그들의 세속적 의도 곧 세상의 명성이나 권력을 얻으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강조된 셈이다. 26절 13절 참조. 유다 지도자들이 죽이려 하는데도 예수는 두려움 없이 공공연히 가르치는 데(14절 참조) 대한 예루살렘 주민들의 놀라움이 묘사된다. 원문에는 “지도자들”(또는 “통치자들”)로 표현되어 있으나 유다 최고의회 의원들을 가리킨다.(7.48;12.42 참조). 일부 사본에는 “대제관들 ”또는 “원로들”로 되어 있다. 예수의 메시아성이 토의 주제로 언급된다. 이 주제는 7장에서 반복된다(31.40-42.52 참조). 27절 예수의 신원은 이미 알려져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6.42ㄱㄴ 참조). 예수의 신원이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메시아일 수 없다는 생각이다(6.42ㄷ 참조). 예수는 그들의 메시아관에 어긋나므로 메시아가 아니라는 논리다. 28절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에 주의를 요하는 표현으로서 “선언하다”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1.15; 7.37; 12.44 참조). 외형적으로만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예수의 참된 신원과 정체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 자신은 파견되었고 따라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의 정체를 참으로 알 수 있다. 예수를 보내신 분의 신적 실재 또는 참된 실존을 뜻하며, 곧 하느님을 가리킨다. 예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부터 참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이 이 구절로써 명시된다. 예수를 파견한 분, 곧 하느님을 모르기 때문에 참으로 예수를 알지 못한 것으로 설명된다(8.19 참조). 29절 예수는 참으로 실존하시는 분, 곧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그분을 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원을 밝히는 예수의 자기계시적인 말이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왔고, 그분은 나를 파견하셨다”는 말로써 예수는 자기 자신과 하느님과의 상호지속적 결속관계도 시사한다. 이런 결속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일치 관계로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된다. 일부 사본에는 “나는 그분으로부터 왔고” 대신 “나는 그분과 함께 있었고”로 되어 있다. 30절 그들은 예수의 자기계시를 어느 정도 이해했으나 예수를 믿지 않고 오히려 신성모독으로 몰려 했음을 저자는 말하고자 한다. 예수에 대한 불신이 강조된다. “그분의 시간”은 성부에 의해 이루어지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의 “때”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부께서 허락하시는 그 “시간”이 예수에게 아직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예수는 계시자로서 아직 활동을 계속해야 하는 “시간”에 있고 하느님이 예수와 함께하고 계심(8.29 참조)을 저자는 설명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어느 검사는 수사기록이 배당이 되어 오면 기록을 검토하며 기록을 넘기면서 “이게 뭐지?”하는 검사가 있었습니다. 구약시대 광야생활에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온 것을 먹고 살았잖아요. 그 만나라는 말의 뜻이 “이게 뭐지?”라는 말입니다. 업무상으로는 "이게 뭐지?"라는 말은 “이게 맞나 안맞나?” 검토하는 것인데.
맛있어요? 그 수많은 업무도. 만나라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