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 사순 제5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04 | 조회수2,06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물린 자는 누구든지 구리 뱀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백성이 죽는다.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구리 뱀을 매달게 하시고, 그것을 보면 살아나게 하신다. 복음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주해 예수의 신원과 사명 이 대목은 예수와 믿지 않는 “유다인들”(22절), 곧 예수의 적수들이 나눈 대화다. 유다인들의 불신과 몰이해로인한 팽팽한 대립 가운데서도 예수의 자기계시는 더욱 심화하고 고조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믿었다”(30절)라는 말은 문맥상 모순이다. 하지만 다음 단락(31-절) 서두의 거의 비슷한 언급을 미루어볼 때, 이 두 단락을 연결하는 저자의 문학적 기교로 볼 수 있다. 21절 내용상(21ㄴ절), 7,33-34에 언급된 예수의 말을 반복하기 위한 도입구다. 전체 문맥상으로는 12절과 병행하는 구절로서 앞 단락(19-20절)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예수가 떠나간 다음에 예수를 찾게 되면 이미 늦다는 뜻이다. “당신들은 ...(나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입니다”(7.34)대신 표현된 내용이다. 즉, 예수 없이는 죽음의 멸망에 빠진다는 뜻으로 유다인들에게는 위협적이다. 이런 위협적인 말은 “세상의 빛인 예수를 따라오는 자만이 어둠과 죽음의 영역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에서도 이미 전제된 셈이다. 이와 관련지어, “죄”는 어둠과 죽음의 영역으로 들어감을 뜻하고,“죽는다”란 그런 영역으로 영원히 빠져버림을 가리킨다. 특히 “죄”(24절; “죄들”)는 구원을 안겨다주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일체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16.9 참조). 따라서 “죄 가운데서”란 비구원의 상태나 그 영역을 뜻한다. 이런 상태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죽게 마련이다. 하느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3.36). 그러나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빛의 아들들”이 되어 빛 안에서 살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12,35-36; 참조; 3.16-21). 그러므로 이 구절의 핵심적 의도는 믿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는 데 있다. 믿지 않는 자는 죽음으로 이끄는 멸망의 세력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는 “예수가 가는”(14.1-2 참조) 하느님의 영역(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한다. 22절 예수의 경고를 경청하지 않고 악의로 곡해한다. 자살은 지옥행인데 지옥으로 가겠다는 것인가라는 조롱이다. “생명의 빛”을 약속한 예수를 이렇게 경멸함으로써 그들은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고 있음을 드러낸다. 23절 예수와 “유다인들”의 대립관계가 이원론적 용어, 곧 “위에서”(천상적 세계)와 “아래에서”(지상적 세계)라는 강도 높은 표현으로 언급된다, 이 관계는 장애 따위가 가로놓여 조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시사된다. 예수의 이 격조높은 말은 유다인들의 조롱과 경멸섞인 말(22절)에 대한 역습이다. 즉, “유다인들”은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ㅇ르 의도적으로 곡해함으로써 자기네 스스로가 “아래에서 ”났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다(44-47절 참조). 24절 예수는 유다인들에게 더욱 분명히 경고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길을 다시 한번 제시한다. 유다인들이 “죄들 가운데서”벗어날 유일한 길은 “내가 그이다”라고 계시하는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이다”란 표현은 구약성서의 신적 계시의 말로서 예수의 계시말씀과 계시사건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13.19 참조). 하느님은 인간에게 종말론적 구원을 계시하고 또 주기위해 예수 안에 현존하시고, 예수는 계시자로서 그런 자기 자신을 드러내면서 증언한다. 예수의 이런 권위 주장과 증언의 표현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세상의 증인들로 내세우신 대목(이사 43.10)과 매우 흡사하다. 25절 유다인들은 예수의 말. 특히 신적 계시자로서의 권위 주장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으나,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원문이 명확하지 않아 번역상 어려움이 많은 구절이다. 가장 가능한 직역은 “(나는) 내가 당신들에게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바 (그대로입니다)”, 또는 “도대체 왜 내가 당신들에게 또 이야기해야 합니까?”등이다, 그러나 문맥상 이 구절의 뜻은 마음의 문을 닫고 원래부터 거절만 일삼는 불신자들에게 계속 더 설명해 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26절 예수가 더 말을 해야 한다면,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대해 엄격한 심판밖에 없다는 뜻이다(5.30;8.16 참조). 예수의 사명은 심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소식을 세상에 올바르게 알리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27절 유다인들이 예수의 말을 깨닫지 못함을 강조하기 위한 저자의 설명이다. 28절 “들어올리다”는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 대해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책임을 뜻한다. 그러나 “들어올려지다”는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예수의 죽음을 가리킨다. 이 경우에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성과 함께 수동태로 언급된다. “사람의 아들은 들어올려져야 합니다.” 29절 예수가 십자가상 죽음을 거쳐 아버지께로 간 후에 유다인들은 예수가 하느님을 계시했고 하느님의 뜻에 따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 말은 믿지 않은 유다인들의 죄와 심판보다는 구원의 전망에 역점이 있다. 즉, 누가 예수 안에서 말하고 행동하는지 그리고 예수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은 모를지라도 나중에는 알게 되어 구원을 얻으 리라는 긍정적 의미다. 사실상 예수 십자가사건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시사건이고(12.24 참조). 그 구원은 많은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것이다(12.24 참조). 따라서 당시 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둔 저자의 신학사상이 다소나마 반영된 구절로 볼 수 있다. 즉, 예수 십자가사건 이후에도 유다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 늦니는 않았음을 강조한다. 이런 의도는 많은 유다인이 예수를 믿었다는 저자의 신학적 설명(30-31절)에서도 재확인된다. 파견하신 하느님과 파견된 예수의 결속관계가 십자가사건의 관점에서 언급된다. 하느님을 위한 증언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 넘겨지면,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떠나가겠지만, 아버지께서는 버려두시지 않는다는 것이다(16.32 참조).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사건을 통해 오히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고, 세상에 대한 승리를 주실 것이란 의미도 함께 시사된다. 십자가사건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행하는 계시의 일치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예수가 홀로 있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근거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십자가사건에서 분명히 드러나고(10.18 참조). 이 사건은 아버지께 대한 아들의 사랑 표시이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아버지의 의도를 계시하는 행위다(14.31 참조). 30절 당시 상황의 보도라기보다는 저자의 신학적 설명이다. 즉, 기적에 바탕을 둔 믿음과는 달리 말씀에 바탕을 둔 믿음을 언급하면서 예수의 계시 말씀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동시에 31절이하의 내용과 연결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