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 주님 수난 성지 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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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09 | 조회수1,60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
주해 28절 28절은 “그들은 길을 걸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앞장을 서서 가셨다.를 옮겨실은 것이다. 28절로 상경기는 마무리된다. 36절 마르 11.8ㄴ에는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나무가지들을 꺾어다 팔았다”를 덧붙였는데 루카는 그것을 생략했다. 37절 37절은 “그리고 앞서가는 사람들과 뒤따라오는 사람들이 외쳤다”를 대폭 늘인 것이다. 38ㄱ절은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축복 받으소서! 우리 아버지 다윗의(이제)오는 나라는 축복 받으소서.!”를 상당히 고친 것이다. 루카는 마르코의 “호산나”와 “우리 아버지 다윗의 (이제)오는 나라는 축복받으소서!”를 빼고 “임금님”을 덧붙였다. 그뜻인즉, 예수님은 다윗의 나라를 재건함으로써 종말을 초래하는 분이 아니라 “임금님”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처형되신 임금님으로 오신다는 것이다(23.38). 38절 38ㄴ절은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사랑받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감안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고쳐쓴 것이다. 39절 39-40절은 마르코에는 없고 마태 21,15-16에는 매우 다른 변체가 수록되어 있다. 대제관들과 율사들은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과 성전에서 “다윗의 아드님께 호산나!”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언짢게 여기며 그분에게 “이들이 무어라고 하는지 듣고 있습니까?” 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철부지들과 젖먹이들의 입에 찬양울 마련하셨도다‘하신 성경 말씀을 여러분은 읽어 본 적이 없습니까?” 루카는 39-40절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전에 베드로가 예수는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은 함구령을 내라셨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아주 달라졌다. 예수님이야말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이라는 사실을 소리 높여 외칠 때라는 것이다. 만일 제자들이 함구한다면 “돌들이 외칠 것이다” 그러나 돌 위에 돌 하나도 제자리에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예루살렘이 폐허화한다는 구절들을 참고한다면 또 다른 풀이를 할 수 있다. 장차 예루살렘 폐허 위에 제멋대로 굴러다닐 돌들이, 유다인들은 예수 메시아를 배척하여 징벌을 받았다는 증거물이 되리라는 것이다. 미사 제1독서 <나는 모욕을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0,4-7 -. 이사야 예언자는 ,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습니다.> 주해 6절 “모습”을 직역하면 “형태”다. “하느님의 모습”은 하느님으로서의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 전에 신성을 지니고 선재하셨다고 한다. 2.6은 신약성서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의 선재 사상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노획물”은 아무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욕심을 품었던 아담과는 달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신으로서의 대우를 미련없이 포기하셨다. 7절 이 찬가의 작자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소박하게 표현하여, 그분은 본래의 자신을 “비웠다”고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사실 그리소도께서는 신인 또는 초인간으로 나타나지 않고 평범한 인간으로 처신하셨다. 그렇다고 신성을 떠난 것이 아니라 바로 종노릇을 함으로써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 보이신 것이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모든 영광을 성부로부터 선물로 받고자 하셨다. “사람들과 비슷하게”,“여느 사람 모양으로”는 인간의 모든 조건, 특히 그 나약함을 함께 나누었다는 뜻이다. 8절 “낮추시다”는 3절의 “겸손”과 같은 어원에 속한다. 하강의 둘째 단계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함으로써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다. 아담의 불순종과는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순종하시어 끝까지 성부의 뜻을 따르셨다. 중죄인처럼 십자가에 처형될 때 이 순종은 극도에 이르렀다. 로마인들이 노예들에게만 집행하던 십자가형을 당했으니 그것은 가장 수치스럽고 사람들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난 종말이었다. 이 사실을 바오로는 다른 데서 “십자가의 걸림돌”이라고 표현했다. 자기 비하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9-11절의 고상이 시작된다. 9절 부활과 승천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어가 하느님으로 바뀐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낮추셨지만 이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여 주신다. 이름은 한갓 명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지위를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믿으인 이름은 11절에 나오는 “주님”이라는 칭호다. 유다인들은 입에 올릴 수 없을 정도로 신성시한 “야훼”라는 말 대신에 하느님을 “주님”이라 불렀으니 예수께서 이제 신으로서 모든 피조물보다 높은 지위에 계시다는 뜻이다. 10절 우주의 총괄적 표현이다. 지하는 죽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생과 죽음과 부활, 승천을 통해 이 모든 차원을 두루 거치어 만물의 주님이 되셨다. 11절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다” 대신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의 핵심이다. “모두가 무릎을 꿇고 입으 모아 고백한다”는 말은 이사 45.23을 인용한 것이니, 여기 주님이라는 칭호가 하느님과 동등한 그리스도의 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스도 사건들의 최종목표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다. 그리스도께서 경재하는 이는 결국 성부를 존경하는 사람인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오늘은 북부시장에 동생이랑 장보러 같이 갔습니다. 이것 저것 사는데 나는 따라만 다녔습니다. 취나물을 산다고 이리저리 다니다가 어느 할머니가 취나물을 땅에 놓고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어서 가격을 물어보니 한 무더기에 3천원이고 두 무더기에는 5천원이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어떻게 하는가 보고 있었더니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얼마만큼가자 또다른 어느 할머니가 취나물을 팔고 있길래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3천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가격은 처음 들린 곳하고 같은데 양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5천원어치를 샀는데 덤으로 더 주는 것이었습니다. 내 눈에는 이제 취나물만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동생은 취나물을 다 샀어도 다른 곳은 얼마인가 물어보고 다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들린 곳의 것이 양도 많고 싱싱해서 그곳에서 사길 잘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배가 고파서 무얼 먹을까 했는데 짜장면을 먹자고 해서 들어간 어느 집에서 짜장면을 시켰더니 한그릇에 3천원인데 어찌나 맛있던지. 가격 참으로 싸지요? 그리고 집에 와서 베란다에 엎드려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묵상하고 있는데 목소리가 큰 어떤 아줌마의 말이 들려옵니다. “야 막내야 왕을 잡아” 저는 처음에 이것이 어떤 왕을 말하는가? 예수님이신가? 조금 생각하다보니 무섭기도 하더라구요. “왕을 잡아라” 하는 소리가. ‘난 지금 어떤 분이 나의 왕일까?’하며 그리고 그 아줌마는 누굴 왕이라고 하는지. 약간 떨리기에 계속 이어서 묵상을 하다보니 무서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진짜의 자기들의 왕을 좋아서 붙드는 것 같기에 말입니다. 그러나 잡아서 어찌할지는 모르지만요. 난 두렵지 않네. 우리들의 구원자 내 주님계시니. 예수님 수난기를 읽을때면 목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난 두렵지 않네. 우리들의 구원자 내 주님계시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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