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1 성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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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10 | 조회수3,250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그는 외치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고 한다.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주해 베다니아에서 예수께 향유를 바르다. 이 대목은 원래 예수 수난사에 속한 내용으로서 공관복음에도 보도된다. 그러나 문체상, 내용상 차이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미루어, 공관복음과 공통된 전승은 아니며 독립된 전승으로 여겨진다. 요한복음 저자는 라자로 이야기를 서두에 언급함으로써 앞서 보도된 라자로 소생사화와 이 전승을 재치있게 연결한다. 그뿐 아니라, 다음 단락에서도 라자로에 관한 언급이 계속 됨으로써 문맥상 매끄럽게 엮어진다. 특히 예수의 해명(7-8절)은이 도유사화의 절정에 이르고, 또한 도유의 깊은 의미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1절 “해방절이 다가왔다”란 표현과는 달리 전승자료에서 전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엿새”란 수난사에서 예수 공생활 마지막 주간을 가리킨다. 해방절 제정에 대해 출애 12,1-28 참조. 이 상황설명은 현 문맥상 이해하기가 어렵다. 베다니아에서 에브라임으로 피신한 예수가 다시 베다니아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도유가 베다니아에서 이루어졌다는 전승이 요한복음에 그대로 보존된 것임을 시사한다. 베다니아라는 동일 지명 때문에 이 도유사화를 라자로 소생사화와 연결했을 것이다. 2절 루카 10.40 참조. 라자로는 손님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즉, 라자로와 그의 누이들이 예수를 위해 베푼 잔치가 아님이 시사된다.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른 여인이 마리아로 소개된 것으로 미루어, 마르타와 라자로에 관한 언급은 예수 도유사화와 라자로 소생사화를 연결짓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절 “한 리트라”는 약 330그램. 나르도 향유는 인도산 나르도의 뿌리에서 채취된 것으로 왕들이 사용하는 고급 향유였다. 예수의 존엄한 인격을 드러내는 상황묘사로서 예수는 죽기 전에 이런 존경을 의당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존경은 예수의 시신을 염할 때도 표현된다(19,39-40). 5절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한다(마태 20.13 참조). 6절 저자가 전승자료를 토대로 유다 이스가리옷의 부정직한 의도를 설명한 내용이다. 유다의 이런 탐욕적인 모습은 비록 다른 대목이긴 하지만 공관복음에도 묘사되어 있다(마르 14.11// 참조) 7절 마리아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보호하는 표현이다.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예수의 장례날을 위해 그 향유를 보관해 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 향유의 용도가 별도로 있다는 뜻이다. 사실상 이 구절은 마르 14.8과 거의 같은 의미다. 따라서 마리아의 이 행위는 앞으로 곧 있게 될 예수의 죽음을 알리는 일종의 예언적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그 이면에 하느님의 뜻이 있고, 그 뜻을 예수는 이미 알았다는 것을 시사한다(8절 참조). 8절 예수는 언제까지나 그들과 함께 있지는 않는다는 데 역점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마리아의 행위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마리아는 자신의 행동으로 예수에 대한 깊은 신뢰와 믿음을 예수와 함께한 자들에게 증언해 보인다. 그뿐 아니라, 마리아의 도유행위는 예수의 장례와 관련되므로 예수의 죽음으로 드러나는 영광도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증언한다. 라자로를 죽이려는 음모 이 대목은 문맥상 예수 도유사화에 직결된다. 특히 라자로에 관한 언급은 이 도유사화의 라자로에 관한 내용과 같은 맥락이고, 또한 앞서 보도된 라자로 소생사화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음 단락을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라자로에 관한 내용이 또다시 언급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재치있는 편집 기교를 부여준다. 9절 해방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순례온 자들을 가리킨다. “그 군중”이라는 표현은 어느 특정한 군중을 뜻하기 때문이다(12 참조). “그곳”은 베다니아를 가리킨다(1절 참조). 예수에게 몰려든 군중의 동기가 시사된다. 즉, 라자로 소생 기적에 대한 감동이나 호기심이 배제되지 않은 그들의 동기가 언급된다. 이것은 저자가 가끔씩 지적한 신앙 결핍과 맥락을 같이한다. 11절 예수에 대한 유다 지도자들의 증오가 또다시 강조된다. 예수에 대한 군중들의 믿음을 방해하기 위해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결의한 것이다. 이런 설명은 역사적 보도내용이 아니라 저자의 극적 묘사에 속한다. 아마도 예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되는 제자들의 모습도 아울러 시사하고자 한 듯하다(15,18-21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먹는 것 만큼은 나눠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먹을 것을 먹고 왔는데 "나에게도 먹을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누가 먹을 것을 갖다 드렸을까?”하고 생각들을 합니다. 오늘날 어떤이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것을 자기가 기도하여 받았다면 그 양식을 빼앗길지 모르니 얼른 먹어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광야생활에서 하늘에서 내려준 만나를 백성들이 거둘 때 많이 거둔 사람도 있고 적게 거둔 사람도 있었지만 재어 보니 다 같더란 말씀이 있습니다.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모실 때 사제가 직접 쪼갠 성체를 받으면 더욱 좋은 감정이 생깁니다, 어떤이는 “우리가 모시는 성체가 예수님의 어떤 부분일까?”하는 분도 계시지만 성체는 사제가 직접 나눈 것이든 완전히 동그란 것 자체이든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 전체를 모시는 것이지 어느 특정한 부분만을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또한 우리가 북한에 쌀을 지원했던 것은 먹는 것을 나누었으니 무엇이 좋고 나쁘고라는 말이 더 필요하겠습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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