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2 성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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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11 | 조회수1,91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자신을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고 한다. 복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주해 21절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다 공관복음과 매우 흡사한 대목이다. “애제자”의 말과 베드로의 관심 또는 호기심 그리고 유다의 행동에 대한 제자들의 추측은 일종의 설명 형식으로 삽입되었을 뿐이다. 특히 제자들의 추측은 유다에 관한 예수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양이라 문맥상 모순된다.
예수를 배신할 자가 바로 한 제자라고 폭로하는 공관복음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23절 어느 제자를 가리키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교회 전통상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이라고 말할 뿐이다. 여기 처음 나오는 “예수가 사랑한 제자는 몇 군데에 또 나오는데 요한복음 내용의 증언자와 기록자로 소개되기도 한다. 그의 권위가 당시 공동체에서 인정되고 존중된 듯하다. 그는 최후만찬 석상에서도 예수 바로 곁에, 즉 “예수의 품에” 기대어 앉는 영광을 누렸다. “예수의 품에”란 표현은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이란 표현과 비교할 때,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신뢰받은 제자임을 상징적으로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그로 하여금 묻도록 하는 것도 그사실을 반증한다. 또한 제자들 가운데 오로지 그 제자만이 십자가 곁에 서서 부활신앙을 가지게 된 이상적 제자로도 서술된다(20.8). 24절 ”예수가 사랑한 제자“는 베드로의 인정된 권위로 인해서 그 위신이 더욱 강화되고 동시에 예수로부터 특별한 신뢰를 받은 제자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26절 공관복음에 비해 예수의 주도권이 강조되고 인간적 호기심을 뛰어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일부 중요한 고대 사본에는 없다. 아마도 6.11과 21.13에 따라 추가되었으리라. 배신자를 떼어놓는 예수의 주도적 행위다(27절 참조). 27절 원문에는 ”빵조각 다음에(후에)“로 되어 있다. 완전히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유다가 예수로부터 받은 ”빵조각“은 유다를 완전히 지배하게 되는 사탄에 대한 일종의 신호다. 어떤 마술적 수단은 아니다. 사탄의 도구가 된 유다의 악의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재촉함으로써 예수의 우월권 또는 주도권이 역설적으로 강조되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향하는 예수의 모습도 시사된다. 29절 12,5-6 참조. 28-29절은 26-27절과 문맥상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상충되므로 추가된 설명으로 본다. 아마도 제자들의 몰이해나 오해를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30절 27ㄴ절에 직결된 내용으로서 예수의 독촉에 따라 유다는 주저없이 즉시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일종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사탄의 도구가 되어버린 유다에게는 걸려넘어질 어둠의 영역이요, 예수에게는 지상활동을 마칠 시간을 뜻한다. 하지만 전승사적 관점에서, 역사상 당시 상황을 배제하지 않는다(1고린 11.23 참조). 31절 최후만찬 자리에서 떠난 유다의 행방은 18.1-에 보도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어올려져 영광스럽게 되는 시간, 곧 예수 죽음의 시간을 가리키는, 사건의 전환점을 뜻한다(12.23.27.31-33 참조). ”영광스럽게 되었다“란 과거 형태는 배신자 유다가 떠나간 시점에서 언급된 표현이다. 유다가 떠남으로 인해 예수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이미 왔기 때문이다. 배신의 밤(30절 참조)은 곧 영광의 시간이다. 십자가상 죽음이 임박했고 그 죽음으로 인해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기 때문이다. “그(사람의 아들) 안에서” 또는 “그(사람의 아들)한테서”라고 직역할 수도 있다. 32절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란 미래 형태는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대응적 특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이 서로 영광스럽게 하는 상호적 관계가 언급된다.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이 서로 영광스럽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곧”이란 시간적 표현으로 강조된다. 이 “곧”이란 표현은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을 극도로 영광스럽게 하는 시간, 곧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33절 직역하면 “어린애들이여”라고 옮길 수 있다. 그러나 이 칭호는 스승이 제자들을 귀엽게 여겨 부르는 일종의 애칭이기 때문에 문맥상 의역했다. 7,33-34 참조.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음 아픈 이별을 해야 하는 엄연한 사실을 예고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 말은 유다인들에게 말한 것과는 문맥상 전혀 다른 역할을 한다. 유다인들에게는 지나가는 일시적 이별이 될 것이다(14.2-3 참조). 36절 예수의 이별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반문이다. 이 반문은 유다인들의 반응과는 달리 베드로의 몰이해를 뜻한다. 14,1-4 참조. 12.26과 관련된 언급이다. 예수를 추종한 증인으로서 죽게 되는 베드로의 죽음, 곧 아버지와 함께 예수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짐을 가리킨다. “나중에는” 이란 표현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증인으로서의 베드로의 죽음을 예고하고 추종을 격려한 대목과 관련된다. 따라서 “지금은”이란 표현은 베드로더러 기다리라고 시사하는 구실을 한다. 무릇 예수를 섬기고자 하는자는 자신의 원의을 끊고 예수의 말을 경청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맡겨야 한다(221.18). 37절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뜻한다. 통찰력이 부족하고 자신의 원의를 자제하지 못한 베드로의 성급한 모습이 시사된다.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열정적 충성의 발로다(6-9절 참조). 38절 베드로의 장담을 의심한 반문이다. 베드로의 부인에 관한 예수의 결정적 예고를 강조한다. “당신이 세 번 나를 부인할 때까지 닭이 울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직역할 수도 있다. “닭이 운다”는 표현은 아침 새벽을 가리킨다. 예수의 이 예고는 안나스의 심문 과정에서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성체를 받아 모셨다고하여 모두가 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이들은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까 오늘 미사는 다끝났고 난 거룩한 몸이야”라며 마치 자신이 뭐라도 된 것처럼 행동을 하고 말들을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체를 모셨다고 하여 그가 예수님과 일치된 것이 아닙니다, 항상 거룩한 영으로, 몸으로 사탄의 유혹이 근접치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이스카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돈주머니까지 가지고 다니는 즉 회계의 직책을 맡으며 예수님을 따랐던 자입니다, 그가 최후만찬시에 예수님이 떼어 주신 빵을 받자 사탄이 그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팔아 먹었습니다, 유다도 빵을 받아 먹었는데 이는 어떤 현상인가요? 예수님의 제자였으니 매일 같이 따라다니며 시중도 들고 빵과 포도주를 같이 먹고 마셨는데 어찌 되었습니까?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또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성체 전 기도에서 사제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이 제게 심판과 책벌이 되지 않게 하시고 제 영혼과 육신을 자비로이 낫게 하시며 지켜 주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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