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4 주님 만찬 성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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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13 | 조회수1,32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파스카 만찬에 관한 규칙> -. 주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주님을 위한 파스카 만찬에 관하여 말씀하시며, 이를 영원한 규칙으로 삼아 대대로 축제를 지내야 한다고 하신다. 제2독서 <여러분은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해 주님 성찬 전승에 대한 성가 앞에서 지적한 잘못을 시정하기 위해 코린토 공동체에 바오로는 자신이 전해받은 주님의 성찬 전승을 전한다, 23절 “주님께로부터 전해받았다”라는 말은 두 가지로 알아 들을 수 있다. “주님께까지 소급하는 전승을 전해받았”고 알아듣는 것, 갈라 1.12에서 강조한 것처럼 어떤 인간적 존재를 거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알아듣는 것이다. 둘다를 진지하게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바오로가 코린토 신자들에게 전한 것은 역사상 예수까지 소급하는 전승이지만 이 전승의 지속적 보증자는 현양되신 주님으로서 성사에 현존하시는 주님이다. 23절의 두 동사 “전해주다”와 “전해받다”는 랍비들이 전승 문장들을 전수하는데 쓰이는 전문용어였다고 한다. 이렇게 바오로 자신도 23ㄴ-25절의 내용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전해받은 것을 전해준다”고 분명히 밝힐 뿐 아니라 23ㄴ-25절의 글을 예수의 최후만찬에 관한 다른 문헌들과 공관대조를 해보면 순서와 말마디까지도 상당부분 서로 일치하는 것을 볼 때, 이 본문에는 오랜 시일에 걸쳐 공동체에서 주님의 성찬을 거행하는 가운데 일정한 틀을 갖춘 전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바오로의 전승은 특히 루가 22,19-20이 전승과 매우 가깝다. 24절 “여러분을 위하는”이라는 문구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적 제사적 죽음 또는 대리적 죽음이라는 동기가 함축되어 있다. 이 이른바 “반복령”은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의 최후만찬 전승에는 없고 루카 복음서에 한 번 바오로에게 두 번 나온다. 25절 “계약” 앞에 “새로운”이라는 형용사가 붙어 있는데, 이는 루카 22.20과 여기 25절에만 나오며 예레 31,31-34의 유명한 예언을 상기시킨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이 장차 때가 되면 당신 백성을 ‘기억하실 것이며’ 당신 백성과 “새로운 계약”을 맺으실 텐데 이 계약은 돌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는 계약”으로서 이 계약을 맺음으로써 백성의 죄가 사해지고 백성은 새로운 계약 관계에 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바오로는 이 예언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고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성취었다고 본다. 26절 26절부터는 전승 부분이 아니다. 전승에 설명을 덧붙이면서 코린토 신자들이 “주님의 성찬”때 잊고 있는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일깨운다. 26절에 나오는 “전하다”의 동사 형태는 명령법일 수도 있고 직설법일 수도 있으나, 이 문장이 앞 문장의 이유를 대는 접속사로 시작하므로 직설법으로 보아야겠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주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다 저자는 예수의 공적 계시활동 보도를 12.36ㄴ으로 일단락짓고, 이어서 불신 문제를 숙고하고 또한 예수의 계시 말씀을 요약 선포함으로써 대단원의 말을 내린다. 이제 13장부터는 예수가 아버짂로 돌아가는 내용으로 엮어진 새로운 단락이 전개된다. 즉 제자들만을 향한 예수의 긴 고별담화와 기도 그리고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사화에이어 부활발현사화가 보도된다. 이 대목은 제자들과 나눈 최후만찬중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를 중심적으로 서술한다. 예수의 이 행위는 두 가지 의미로 달리 보도된다. 하나는 예수의 죽음을 시사하는 상징적, 신학적 의미 , 곧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의 의미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에게 좋은 표향을 보여주는 도덕적, 교훈적 의미다. 전승사적으로는 후자가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이나, 문맥상 특히 문학비평적 관점에서는 현 문맥에 삽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내용은 13.1ㄴ과 34-35 그리고 15.12-17과 같은 맥락이다. 유다의 배신행위에 관한 언급도 21절이하에 연결된 보도로서 저자의 신학적 의도에 따른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1절 역사적 관십보다는 신학적 의도에 따른 보도다. 즉 예수는 신약의 해방절 양으로서 죽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의도와 맥락을 같이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보도에서 해방절 축제와 자주 관련짓는다. 예수 죽음의 시간을 가리킨다. 이 시간은 또한 예수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다(12.23 참조). 예수는 자신의 정해진 죽음의 시간이 이미 온 것을 알았다는 뜻으로 특히 수난사에 잘 부각되어 있다. 예수는 체포 때부터 십자가상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죽음을 앞서 알았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이 사랑은 특히 목자에 잘 부각되어 잘 나타나 있다. 이 사랑은 또한 서로 잘 아는 관계를 뜻한다. 예수 죽음의 시간과 관련된 표현으로서 시간적 의미가 지배적이지만 질적 의미도 내포된다. 물론 질적 의미의 번역 또는 해석도 시간적 의미를 배제하지 않는 한에서 가능하다(19.30 참조).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제자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 보인다. 예수의 이 사랑은 또한 십자가상 죽음으로까지 언급된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써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헌신적 사랑을 보여주고 자기 죽음과 그 죽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공동체도 시사한다. 2절 “회식중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일부 사본에는 “회식 후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4절에 직결되므로 위 본문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 이 회식은 해방절 전날 이루어진 제자들과의 고별만찬이다. 회식 장소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행위에 역점을 둔 때문인 듯하다. 회식에 참여한 제자 가운데 배신자도 함께 있었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저나의 설명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가운데 악마도 활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악마가 유다를 자신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이다. 3절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예수의 권능을 강조한 마로서 적수들이나 “세상의 두목”이 논박하거나 박탈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저자의 설명으로서 예수에 대한 악마의 부조리한 악의를 그러내 보이고자 하는 의미를 지닌다. 4절 회식 전에 발을 씻는 것이 일반 관습인데 종이 그런 일을 맡아 했다. 부인이 남편의 발을, 자식들이 아버지의 발을 씻는 것도 일종의 의미였다, 예수는 제자들 앞에 그런 비천한 자세로써 마지막 순간까지 봉사하는 헌신과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6절 시몬 베드로는 예수를 존경하는 뜻에서 예수가 직접 발을 씻어주려는 것을 거절한다. 그러나 예수의 행위에 대한 몰이해가 시사되고 또한 예수와의 대화가 계속 전개될 수 있는 역할도 한다. 7절 베드로에게 경고하는 말로써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상징적 의미가 시사된다. “나와 함께 무엇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는 “나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얻게 되는 “몫”에 대한 약속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즉, 제자들은 예수가 차지한 “생명”에 참여할 것이고 ,예수가 있는 “곳”에 제자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가 발을 씻어주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구원의 조건이 강하게 시사된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예수의 행위에는 죽음으로까지 헌신하는 예수의 사랑과 구원을 주는 예수의 상징적 의미도 시사된다. 8절 예수의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베드로의 모습이 시사된다. “나와 함께 몫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는 “나와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다. 이 말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제자들이 얻게되는 “몫”에 대한 약속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즉, 제자들은 예수가 차지한 “생명”에 참여할 것이고 예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또한 예수와 아버지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가 발을 씻어주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된다는 구원의 조건이 강하게 시사된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예수의 행위에는 죽음으로까지 헌신하는 예수의 사랑과 구원을 주는 예수의 죽음이 상징적 의미로 시사된다 9절 베드로의 오해 또는 몰이해가 드러난다. “씻는다”는 말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서, 오로지 예수와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경고만을 들은 셈이다.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예수에 대한 열망에 찬 신뢰만 가득한 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상태를 드러낸다. 10절 일부 고대 사본에는 “발 외에는”이란 말이 없다. 이것이 원전에 더 가깝다는 견해가 통설이다. 이 말은 이해를 돕기 위해 대다수 필사자가 추가한 것으로 본다. “발을 씻어야 한다”는 “온전히 깨끗하다”와 상충된다. 따라서 원전대로 풀이한다면, 목욕한 사람은 더 씻을 필요가 없음으로 베드로의 요구는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받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뜻한다. “온전히 깨끗합니다”는 그 상징적 행위를 받아들이라는 요구가 강조된다. “여러분도 깨끗합니다”는 제자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깨끗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레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상징한 발 씻는 행위를 받아들이도록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요구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는 예수를 배신할 유다를 암시한다(2.18 참조). 11절 예수의 암시를 저자가 더 분명히 밝힌다. 12절 예수의 행위가 끝났음을 말하며, 문맥상 5절에 연결된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묻는다.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적인 뜻으로 설명된 첫째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저자는 또한 보도한다, 이 둘째 의미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보여준 표양으로서 도덕적 교훈의 뜻을 지닌다. 이 의미가 사실상 원전에 가깝고 더 오래된 것이지만 요한복음에는 나중에 추가된 것으로 엮여 있다. 13절 제자들은 예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불렀다. 초대교회에서도 그랬다. 저자도 부활한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존칭한다. 14절 예수가 제자들에게 행한 겸허하고 헌신적인 봉사를 도덕적, 교훈적 차원에서 제자들에게 의무로 지운다. 15절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예수의 행위가 그들에게 보여주고 남겨주는 본보기로 표현됨으로써 그들의 실천이 더욱 강조된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이 말을 사랑의 실천 계명으로 받아들였다(1요한3,16-18; 1디모5.10).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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