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4 부활 제2주일 곧,하느님의 자비 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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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23 | 조회수1,125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하느님의 자비 주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데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제1독서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주해 사도들의 기적 5.12-16은 2.42-47과 4.32-35에 이어진 셋째 요약문이다. 전반부는 첫째와 둘째 요약문의 내용을 반복하고, 후반부는 새로운 사실들을 소개한다. 이 요약문 전반부의 내용과 첫째와 둘째 요약문의 내용이 상통하는 사례들을 지적하면 이렇다. 12ㄱ: 사도들의 표징과 기적 12ㄴ: 한마음으로 솔로몬 행각에 모인다. 13: 백성은 그들을 찬양한다. 14절: 주님을 믿는 무리가 늘어난다. 새 요약문의 특징을 지적하면 2,42-47에서는 주로 성찬을 다루고, 4,32-35에서는 주로 공동소유를 강조한 데 비해 5,12-16에서는 사도들의 표징과 기적을 거론한다. 12절 “솔로몬 주랑”은 성전 마당 동쪽에 있는 회랑
제2독서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해 9절 파트모스는 에게 해 동쪽, 에페소에서 남서쪽으로 약 75키로미터 떨어진 바위섬, 폴리나우스가 말한 대로 죄수들의 유형지다. 그리스도교의 오랜 전통에 의하면 요한은 파트모스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0절 “주님의 날”: 주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을 가리켜 초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용된 용어다. 히브리인들 안식일의 거룩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11절 2-3장에서 저자는 여러 종류의 체험을 한 것 같은데, 이것이 현시의 문학형태로서 묵시문학 양식으로 표현된다. 12절 아마도 저자는 여러 종류의 체험을 한 것 같은데, 이것이 현시의 문학형태로서 묵시문학 양식으로 표현된다. 예루살렘 성전 성소의 일곱 가지 황금등경과 출애급기에서 모세가 성소에 놓도록 명령받은 등경을 연상시킨다. 전례 상황 속에서 설명되는 이 등경의 의미는 세상을 비추는 하느님의 빛을 나타낸다. 2.1에서는 “거니시는 분”이라는 말이 첨부되어 전례 공간이 더 분명히 강조된다. “등경”을 “교회”로 보는 1.20과의 관계에서 보면 “일곱 황금등경”이란 이상적 전례 공간으로 보는 교회를 총칭하는 셈이다. 13절 “인자 같은 분”은 다니 7.13에서 유래한다. “나는 밤에 현시를 보았는데,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더니,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었다” 이처럼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며, 종말론적 관점에서 메시아적 기능을 가진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이 표현 역시 구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은 출애 28.4: 29.5의 긴 옷과 다니 10.5또는 에제 9.2.11에서 천상적인 인물을 표시하는 발끝까지 오는 긴옷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니엘서 혹은 에제키엘서에 나오는 “허리” 대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다고 말한다. 발끝까지 오는 긴 옷은 천상적 존재를, 가슴의 금띠는 사제직을 말해준다. 그리스도는 교회인 “전례적 공간” 안에 현존하며 대사제 역할을 하신다는 뜻이다. 구약성서에서 금띠는 왕권을 상징한다. 17절 전체적 체계는 다니엘서에서 취한 것 같다.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초월적 존재 앞에서의 나약한 인간서을 묘사한다. 나약한 인간이 두려움을 없애고 평정을 이루어 주는 것은 오직 천상적 존재의 직접 개입이다. 여기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인간의 이해능력을 넘으며,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와서 이해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현시를 본 저자의 반응이 묵시-예언문학에 자주 나오는 전형적 방법으로 표현된다. 천상적 존재는 당신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만 유보된 동일한 속성으로 표현된다. 이 표현은 분명 이사 44.6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군의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시작이요 내가 마침이다.” 묵시 1.8에서는 하느님을 “알파요 오메가”라고 부르며, 동일한 호칭이 22.13에서는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이처럼 야훼의 초월성이 그리스도께 전위되며,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구세사의 시작이고 마침이시다. 18절 구약에서 하느님에게 속한 충만한 생명이 부활한 그리스도에 의해 확인된다.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자로서 구세사에서 처음이요 마지막이다. 저자에 따르면 부활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살아 있는 자”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혼 존은 칠십인역 구약성서 “살아 계신 하느님”의 신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개념이다. 두 측면으로 부활의 신비를 표현한다. “죽음”은 현재에 영향을 주면서도 과거에 속한다. 한편 “부활”은 현재에 속하면서 구세사에 계속적으로 속한다. 동일한 표현이 4.9.10과 10.6에서는 하느님께 사용된다. 이 구절은 다니 12.7의 “영원히 살아 계시는 이”라는 신적 호칭을 반영해 주고 있다. “열쇠”는 능력과 주권을 나타내는 셈족식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부활로 죽음을 이기고 지하세계인 어둠의 나라에 대해서도 주인으로 군림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죽음과 죽은 자들의 저주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즉, 그의 생명. 그의 불멸성에 모든 이를 참여시키실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어둠의 세력은 그의 교회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19절 이 문장은 이 책의 내용 전체, 즉 과거, 현재, 미래의 일들을 포함한다. 복음 <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주해 제자들에게 나타나 사명을 부여하시다 이 대목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 장면과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면은 특히 루카복음과 가장 가깝다. 아마도 원래는 독립된 전승자료였을 것이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에게 발현한 예수의 부활사화에 연결된 듯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상에 죽고 부활한 예수를 보았듯이 제자들도 바로 그 예수를 보고서 기뻐했다고 저자는 서술한다. 둘째 장면도 부활한 예수의 평화인사가 반복됨으로써 첫 장면과 연결된다. 그리고 둘째 장면에서 저자의 관심사가 표명된다, 즉, 십자가상에 죽었으나 이제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성령을 주고 죄를 사할 권한과 함께 복음선포 사명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19절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빈 무덤을 발견한 것고 연결하려는 저자의 표현이다. 여기서는 “이른 아침” 대신 “저녁”이라고 함으로써 아침에 발견한 빈무덤사건의 최고봉을 시사한다. 아무튼 부활사건과 부활체험을 같은날 곧 “주간 첫날”의 일로 서술한 것은 틀림없다. 이어서 저자는 예수의 부활발현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도한다. “제자들이 있던 곳”은 예루살렘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역사적 보도라기보다 예수의 부활발현사화를 보도하기 위한 표현일 뿐이다. 제자들의 공포와 불안을 시사하는 데 역점이 있다. 저자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상태에서부터 해방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부활한 예수의 새로운 실존방식과 그 현존에 오히려 더 관련된 표현이다. 부활한 예수는 돌무덤을 열고 나오듯이 굳게 막힌 문을 통해서도 제자들에게 나타난다. 이제 예수는 닫힌 세상을 열린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닫힌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다가갈 것이다. 예수의 직접 주도권이 시사된다. 부활발현은 완전히 예수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유다인들의 평상시 인사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고별담화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한 “평화”를 이제 부활한 예수가 기원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공포와 불안을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즉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의미를 지닌 인사말이다. 20절 부활한 예수가 바로 십자가상에 처형된 예수와 동일인임을 뜻한다. 그러기에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또한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이 실제로 만났음을 시사한다. 루카복음에는 “옆구리”대신 “발들”로 표현되어 있다. 아마도 요한복음은 “창으로 찔린 옆구리”를 상기시키려는 듯하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실제로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제자들의 두려움이 이제 기쁨, 곧 부활의 기쁨으로 바뀐다. 따라서 “주님을 뵙다”란 말은 이별 때 예수가 약속한 말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제자들이 가지게 된 기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1절 이 평화인사는 19ㄴ절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성령”과 함께 주어지는 영적인 선물이다. 인사나 축복보다 차원 깊은 의미로 드러나는 평화의 선물이다. 이 평화는 부활한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제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제자들의 사명 수행과 함께하고 세상에 증언하는 참된 평화다. 따라서 부활한 예수로부터 받을 수 있고 또한 참으로 원하고 적극적으로 바라는 평화다. 제자들 파견이 아들 파견에 참여한다는 의미보다는 파견된 실존의 권위에 더욱 중점이 있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그리스도론적 파견사상이 시사된다. 22절 이 표현은 구약성서에서 생명을 주는 상징적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의 생명을 얻게 됨을 뜻한다. 부활한 예수는 공동체 삶을 가능케 하는 성령 곧 자신의 성령을 제자들에게 준다. 즉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로부터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만 강조된다. 이제 제자들은 믿는 자 모두가 받게 되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예수의 약속도 이루어진 셈이다. 그러넫 이 성령은 “죄의 용서” 에 관한 권한과 함께 제자들에게 주어진다. 초대교회에서는 믿는 자 모두가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고 또한 죄의 용서와 함께 새로 태어난다고 여겼다. 저자도 세례자 요한의 입을 통해 예수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메시아로 소개했다.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고 또한 죄를 용서할 권한도 위임받았다. 23절 부활한 예수가 사죄권을 제자들에게 준 방법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권한이 공동체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죄의 용서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이 용서는 부활한 예수가 공동체에 준 선물인 동시에 위임이다. 현 문맥에서 “제자들”은 신앙공동체를 대표한다. 죄의 용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 요한 교회도 예수의 죽음으로 인해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여겼다. 부활한 예수는 자기 죽음의 결실을 제자들의 권한으로 부여한다. 그 결실은 구원을 향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삶이다. 그러므로 사죄는 구원의 원천인 예수의 보편적 속죄를 통해 이루어지고, 사죄받지 못한 자에게는 이 구원의 원천이 폐쇄된 채 머문다는 것을 뜻한다. 24절 예수의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는 자가 열두 제자 가운데도 있었음을 우선 말하기 위한 일종의 상황묘사다. 25절 문맥상 토마를 제외한 이른바 “열두 제자”를 가리킨다. 이 “열둘”은 실제 숫자보다는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제자단”을 가리키는 듯하다. “열두 제자”가 토마에게 예수의 부활을 증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열두 제자”의 증언에 바탕을 두고 있는 한, 여기서 토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서 예수 부활에 관한 증언을 듣는다. 토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인물로 소개된 셈이다. 사도시대에도 예수 부활신앙에 대한 힘은 있었다. 토마는 믿음이나 신뢰를 위한 증거를 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의심 또는 불신을 드러낸다. 토마의 이런 태도는 표징이나 기적을 보지 않고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르 상기시킨다. 따라서 저자의 관심이 여기에 반영된 듯하다. 또한 이 구절에서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 26절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처음 발현한 날부터 한 주간 만인 “주간 첫날”을 가리킨다. “여드레”란 “주간 첫날”을 겹쳐서 날짜를 계산한 당시 사람들의 관습에 의한 표현이다. 당시 “주간 첫날”은 “주님의 날”로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면서 성찬례를 거행한 날이다. 이 날짜와 요일 표기는 당시 전례 날짜에 근거한다. 그러나 저자의 관심은 성찬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간 첫날”에 제자들이 함께 모여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기억하면서 전례를 통해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을 재현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있다. 부활한 예수의 첫 발현상황과 흡사하다. 여기서는 “유다인들이 두려워서”란 말이 있다. 그것은 부활한 예수의 발현을 체험한 제자들의 기쁨이 그 두려움을 이겨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문들이 잠겨 있었다”는 표현은 첫 발현사화에서도 볼 수 있는 상황묘사이지만, 여기서는 그 역할이 다르다. 의심을 품은 토마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다, 토마는 자기가 요구한 그대로 핟록 부활한 예수로부터 지시를 받음으로써 오히려 당황하게 된다. 이것은 부활한 예수가 언제라도 실제적인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도 시사한다. 믿음을 촉구한 일종의 경고로서 자기 자신이 요구한 증거가 없는 한 결코 믿지 않겠다는 토마의 말에 상응한 표현이다. 문맥상 토마에게 한 예수의 이말은 토마의 신앙고백에 대한 직접 동기 또는 근원이되고, 또한 조건적 믿음에 대한 예수의 말을 연결짓는다. 따라서 부활신앙이 반드시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며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가지게 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28절 토마는 자기가 요구한 증거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부활한 예수의 말만을 듣고서 신앙을 고백하게 된다. 이 고백은 우선 개인적 결단으로 이루어진 특성을 지니고 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토마 자신의 개인 고백이다. 토마도 다른 제자들처럼 “주님”의 부활을 이제 믿게 된다. 또한 부활한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보게 되었음도 함께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입증한 셈이다. 즉 예수는 부활로써 “주님”이요,“하느님”으로서 자신의 정체를 결정적으로 토마에게 계시한 것이다. 이 고백은 요한복음의 맥락 안에서 예수에 대한 다양한 고백의 절정에 이르고, 또한 저자의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을 명료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29절 토마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면서도 눈으로 봄으로써만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에 질책도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보다”란 말은 토마가 부활한 예수로부터 체험한 일체의 모든 것을 가리킨다. 오로지 “말씀”만으로만 믿음을 가지게 되는 자들에 대한 축복선언이다. 믿음의 촉구는 요한복음의 전반적 기조이며 저자의 주된 관심사다. 이 축복선언에는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보지도 않고서 믿음을 가지게 되는 후대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한 저자의 의도가 내포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부활신앙은 예수의 부활발현에 무조건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0절 이 대목은 요한복음의 원래 결말에 해당한다. 그러나 예수의 지상활동을 “표징”이란 개념으로 요약한 것을 미루어볼 때, 이른바 표징의 책에 속한 결말인 듯하다. 요한복음 전체를 “표징”개념으로만 파악할 필요는 없다. 저자의 저술 동기와 목적이 명시된 점은 특징적이다. 어느 복음에서도 볼 수 없는 언급이다. 특히 그리스도론적 신학사상에 중점을 두면서 믿음을 촉구한 점에 유의할 만하다. 31절 이미 믿음을 가진 요한 교회를 가리키는 듯하다. 공동체의 믿음을 더욱 일깨우자는 것이 저자의 근본 관심사다.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적 신앙고백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존칭은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유다인들의 비난을 겨냥하면서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더욱 힘차게 고취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존칭도 유다인들의 메시아 대망을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으로 강조하는 신앙고백이다. 지속적인 믿음을 가지도록 바라는 저자의 의도가 내포된 표현이다.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의 인격을 가리킨다. 믿음을 통해 맺는 예수와의 결속관계가 시사된다. 예수와의 결속관계에서 얻는 “생명”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을 가리킨다. 바로 이 구원이 그리스도인 실존의 요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짜의 이 신학사상은 그리스도론적 구원론을 연결짓고 복음서가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시사한다. 즉 저자의 그리스도론적이고 구원론적 관심사가 표명된다. 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동기나 목적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오러써 구원을 얻게 되는 바로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하고 일깨우며 강화하고 심화하는 데 있는 것으로 명시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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