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부활 제2주간 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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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4-25 | 조회수1,05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한마음 한뜻> 주해 공동 소유 루카는 2,42-47에서 예루살렘 신도들의 신앙생활을 요약해서 서술한 바 있다. 4,32-37은 두 번째 요약문이다. 여기서 루카는 신도들간의 일치와 상부상조를 강조한다. 이 대목에서는 사도들의 권위를 부각시킨 점이 특이하다. 32절 “한마음 한정신”은 그리스도-로마 문화권에서 우상과 관계된 표현이다. 그리고 이 우정은 2.43에서처럼 물질적 소유물을 함께 나누는 것을 말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를 직역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것들이 공동이었다”가 된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2,44에도 있다. 그 뜻은 각자가 사유재산을 소유하되, 도움이 필요한 교우가 있으면 재산을 팔아 기꺼이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는 것이다. 33절 여기서 말하는 “총애”는 인간적 인정이라기보다 하느님의 축복을 말한다. 하느님의 총애와 관련하여 바로 다음 34절에 신명 15,4-5의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는 너희에게 유산으로 주어 상속받게 한 땅에 틀림없이 복을 내려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희 가운데 궁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리라. 물론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들어야만 그렇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오늘 내리는 이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해야 한다.” 예루살렘 공동체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그분의 명령을 잘 들어야 하는데, 그 명령이란 현재 사도들의 말에 순명하라는 것이다. 34절 신명 15.4의 “너희 가운데 궁한 사람이 하나도 없으리라”는 예언이 실현된 셈이다. 35절 “발치에다 놓았다”라는 표현은 발을 어떤 물건이나 사람 위에 올려 놓아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스라엘의 옛관습과 일맥 상통한다. 다른 사람의 “발치에 있다”는 성서적 관용구는 복종 또는 순명의 자세를 의미한다. 루카도 이 관용구를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한다. 이제 사도들은 공동체의 모금을 관리하는 일에서 최고권한을 행사하게 되었다. 36절 요셉을 표본으로 든다. “그는 키프로스 태생 레위 사람으로서 사도들에게서 바르나바- 격려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받았다.”그는 “선한 사람이었으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다.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이 안티오키아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새로 개심한 사울로를 사도들에게 소개했다. 또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견을 받고 안티오키아 교회로 가서 ”주님께 머물라고 격려했다“ 그후 다르소로 가서 사울로를 안티오키아로 데려와 만 1년 동안 그와 함께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헌금을 모아 유다의 굶주린 교우들에게 사울로와 함께 가서 전했다. 바르나바와 사울로는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귀환할 때 바르나바의 사촌 요한 마르코를 데리고 왔다. 45-49년경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요한 마르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떠나 자기 고향 키프로스 섬과 터키 남부 지역에서 전도했다. 49년경 바르나바는 바오로와 함께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했다. 갈라 2,1-10에 따르면 그 회의에선 세 가지 사항을 의결했다. 이방꼐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유다인들에게 전도한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의 가난한 교우들을 위해 모금운동을 편다. 5-52년경에 실시한 2차 전도요행 때에,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서 전도하고, 바오로는 예루살렘 출신 신도 실라를 데리고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전도했다. 전도사들 가운데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만이 무보수로 전도했다. ”나와 바르나바만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없다는 말입니까?“(1고린 9.6). 복음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주해 7절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육”과 “영”의 존재 영역이 서로 다르다는 말로써 대조하여 설명한다. “영”으로부터 난 자만이 “하느님의 나라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 태어날 때부터 ”육“의 영역에 속한 모든 인간은 반드시 ”영“을 곧 ”위로부터“새로 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의 가르침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따르도록 촉구한다. 8절 히브리어 루하와 그리스어 프네우마는 “영”과 “바람”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영”으로부터 새로 태어난 자의 정체와 실존을 “바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그러나 “영”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10절 니코데모의 몰이해가 시사된다. 이런 오해나 몰이해는 니코데모가 예수의 가르침을 아직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란 말에는 율법을 권위있게 가르칠 수 있는 분으로 인정받은 선생이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표현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니코데모에 대한 비난이 더욱 고조된 셈이다. 11절 “우리”란 말 속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내포되어 있다. 니것은 니코데모가 “우리”라고 표현한 것과 대칭을 이룬다. 따라서 “당신들”이란 말은 니코데모와 그와 같은 신분을 자들을 가리킨다. 증언도 서로 대칭을 이룬다. 예수 편의 증언은 이미 본 것을 바탕으로 하나, 니코데모도 편의 중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더 확실한 증언인데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다는 것이다. 12절 “자상의 것”과 “천상의 것”이 대치을 이룬다는 뜻은 아니고, 천상의 것이 지상의 것을 능가한다는 의미로 비교된다. 지상의 것도 믿지 않는 자에게 천상의 것을 말한들 믿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지상의 것”은 예수가 이미 말한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새로 태오나는 것”을, 천상의 것”은 앞으로 전개될 예수의 계시적 행위들을 뜻한다. 문맥상 13절 이하의 내용들을 가리키다. 13절 ”천상의 것“을 계시할 수 있는 자로서 “사람의 아들”이 언급된다. “사람의 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구현하기 위해 취한 “길” 곧 지상으로 내려와 머물다가 천상으로 올라가는 길도 간략히 시사된다. 즉, “사람의 아들”만이 천상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14절 민수 21.4-9: 이사 52.13 참조. “들어올려지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이 죽음이 모세와 구리뱀 사간과 비료된다. 그 비교점은 들어높이난 것, 구원의 힘, 감추어진 하느님의 뜻을 들 수 있다. 특히 “들어올려져야 합니다”에서 “...해야 한다”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반드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강조한다. 15절 “사람의 아들”이 들려올려지는 목격은 믿는 자 모두 그 안에서 얻을 “영원한 생명이다”. 이제 “사람의 아들”은 인간 구원의 중개자로 언급된다. 특히 “그의 아들”은 인간 구원의 중개자로 언급된다 특히 “그 안에서”란 말이 이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인간의 구원의 확실성은 하느님의 구원의지에 근거한다. “영원한 생명”은 요한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유한 개념으로서 인간 구원을 가리킨다.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언급된 “하느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대해할 수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종말론적 미래 의미로 언급된다. 그러난 요한복음에서는 현제적 의미에 역점을 둘 미래지향적 개념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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