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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작성자김대군 쪽지 캡슐 작성일2022-04-28 조회수948 추천수1 반대(0) 신고

가타리나 성녀는 1347년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앞날을 짐작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체험을 하였다. 그래서 완덕의 길을 걷고자 일찍이 도미니코 제3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역들 간의 평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특히 교황의 권리와 자유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가타리나 성녀는 1380년에 선종하였고, 1461년에 시성되었으며, 1970년 교회 학자로 선포되었다.

 

 

1독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5,34-42
그 무렵 34 최고 의회에서 어떤 사람이 일어났다.
온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율법 교사로서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사이였다.

그는 사도들을 잠깐 밖으로 내보내라고 명령한 뒤, 35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저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잘 생각하십시오.
36 얼마 전에 테우다스가 나서서,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였을 때에
사백 명가량이나 되는 사람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살해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끝장이 났습니다
37 그 뒤 호적 등록을 할 때에 갈릴래아 사람 유다가 나서서
백성을 선동하여 자기를 따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게 되자 그의 추종자들이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38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39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40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41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 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
42 사도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또 이 집 저 집에서 끊임없이 가르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해

36

유다고사 205.1에 따르면 44-46년경 쿠스피우스 파두스가 총독으로 재직할 때 튜다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요르단 강물을 갈라서 추종자들로 하여금 마른 땅을 밝고 요르단 강을 건너게 하겠노라고 장담했다. , 여호 3장의 기적을 재현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파두스 총독은 튜다를 참수하고, 그 추종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을 죽이고 나머지는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30년경 가믈리엘이 5,35-39의 말을 할 무렵에는 튜다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36절의 연대는 분명히 맞지 않는다.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말하자는 튜다가 자칭 메시아로 행세했다는 뜻이다.

 

37

시리아의 총독으로 이스라엘까지 다스린 퀴리노가 6~7년에 주민세를 거두려고 이스라엘에 호적등록을 실시하자 갈릴래아 지방 가믈리 요새 출신 유다가 하느님 홀로 이스라엘의 임금님이라는 구호 아래 납세거부와 민족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열혈당의 기원이다. 열혈당은 74년 해방절에 마사다가 함락될 깨까지 맹위를 떨쳤다. 나아가 그들은 2차 독립전쟁때도 활동했다.

 

튜다가 먼저 출현하고 그 뒤에 갈릴래아 출신 유다가 출현했다는 말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분명히 오보다. 실은 유다가 튜나보다 한 세대 먼저 출현했다. 유다의 죽음에 관한 정보는 전해오지 않는다. “그자가 파멸하자 그에게 순종하던 자들이 다 흩어졌습니다라고 루카는 기록하나, 실제로 열혈당원들은 나날이 불어났다.

 

39

하느님 적대자들은 원문에서는 복합명사로서 신약성서 가운데 여기만 나온다.

 

40

서른아홉 대 매질 형벌이 있었다. 원래는 신명 25.3에 따라 마흔 대까지 매질할 수 있었지만, 혹시라도 마흔 대가 넘을까봐 서른아홉 대까지만 때렸다. 사도 바오로는 서른아홉 대 매질 형벌을 다섯 번이나 받았다.

 

41

41-42절은 석방된 사도들의 반응을 기술한다. 그들은 박해받음을 오히려 기뻐하고 , 복음선포를 계속한다.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 오히려 기뻐한다는 주제는 신약성서에 여러 차례 나온다.

 

루카 6,22-23: “그대들은 복되도다. 사람들이 인자 때문에 그대들을 미워하면,또한 그대들을 쫓아내 모욕하며 그대들의 이름을 사악하다고 내치면! 그 날엔 기뻐하고 뛰노시오. 정녕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는 많습니다. ...”

필립 1.29: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곧 그분을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은혜도 받았습니다.”

필립 3,10-11: “내가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깨닫고, 그분 수난에 동참함을 깨닫기 위함이니 곧 나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습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할 수 있는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으 부활에까지 도달했으면 합니다.”

로마 8.17-18: “...우리가 그분과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골로 1.24: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음을 기뻐하며,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웁니다.”

1디모 2,11-13: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되리라. ...”

히브 10.34: “여러분은 ... 재산을 빼앗기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은 더 좋고 길이 남는 재산을 가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고 1,2-3: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싸일때에 여러분은 그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시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바와같이, 여러분의 신앙의 시험은 인내를 길러 줍니다.”

1베드 4,12-14: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단련하려고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의 불을 괴이한 일이나 당하는 것처럼 괴이하게 여기지 마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시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이 나타나게 될 때에 여러분이 즐거워하고 기뻐하기 위함입니다. ...”

 

42

42ㄴ절을 직역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복음 전했다또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복음 전했다.” “복음이라는 명사는 루카복음에는 없고 사도행전에 두 번 나온다. “복음 전하다라는 동사는 루카의 관용구로서 루카복음에 열 번, 사도행전에 열다섯 번 나온다. 복음선포의 목적이 되는 대상은 주로 예수시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주해

티베리아 호 건너편에서의 표징:빵의 기적

이른바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사화는 네 복음서 모두 보도한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서는 또다른 이른바 사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사화도 보도한다. 이 대목은 오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사화와 더 가깝다. 그래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내용의 문학적 상관관계가 문제로 대두된다.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은 각양각색이지만, 요한복음은 독립적 전승자료를 인정하면서 구두전승 단계에서만 공관복음 전승자료와의 상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가설이 지배적이다.

 

이 대목의 이야기는 우선 예수가 행한 표징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고자 한다. 표징을 잘못 이해한 군중의 모습이 묘사되고 저자가 의도한 표징 이해가 언급된다. 동시에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서술된다, 예수의 처신은 의도적이고 능동적이며 내적으로 명확하다. 공관복음에 비해 제자들의 자세는 극히 피동적이다. 예수는 군중에 대한 동정이나 자비로서 빵의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많은 군중을 먹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고자 한다. 이 주제는 예수의 자기계시며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요한복음은 빵의 기적을 한 표징으로 이해하고 그리스도론적으로 묘사한다.

 

1

그때에는 새 단락을 시작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막연한 시간적 표현이다.

티베리아는 17~22년 사이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갈릴래아 호수 남서쪽에 세운 도시로서 갈릴래아 수도였다. 이 도시명에 따라 갈릴래아 호수를 티베리아 호수라고도 불렀다.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명칭이다.

 

호수 건너편은 호수 동편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한적한 곳이었다. 일부 실사본에 따라 티베리아 도시와 멀지 않은 호수 서편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2

2.23:4.45에도 나오는 저자의 설명으로서 군중이 예수를 따라나선 이유나 동기를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깊은 믿음에서가 아니라 외적 선행 또는 이기적 생각이나 감성적 호기심에서 예수를 따라갔다는 것이다. 이 말은 빵의 기적을 본 군중의 반응, 표징에 대한 이해부족, 완고한 불신에 연결된다.

 

 

3

의 명칭도 없어 막연히 언급된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짐 산을 제외하면 산이란 신학적 의미가 없다. 이에 반해 공관복음에서는 산의 신학적 의미가 다양하게 언급된다. 예컨대,예수의 거룩한 변모, 열두 사도 선발, 복음선포, 치유, 파견 등이 산과 연결된다. 아마도 여기서는 공관복음 전승사 맥락에 따라 특별히 에 대한 언급을 의도적으로 삽입했을 것이다. 모여드는 군중을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거나 아니면 하느님의 선택된 자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오른 것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4

이 설명은 요한복음만의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연대기적 설명이 아니다. 유다인들은 해방절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사실을 회상하고 기념한다. 빵에 관한 예수의 계시 말씀 가운데서도 만나에 대한 말이 언급된다. “해방절은 그런 맥락에서 언급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빵이 새로운 해방절 빵이라는 저자의 예시인 셈이다.

 

5

상황 설명에서 예수의 행동 설명으로 전환하는 문맥상 표현이다.

눈을 들다란 셈족 계통의 표현으로서 기도자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모여든 군중을 본 예수는 이제 그들에게 요기할 빵을 줄 결심을 한다. 이 결심은 공관복음에서처럼 때나 위급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군중이 예수를 따라나섰고 또한 예수에게 모여들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예수는 그들에게 모든 굶주림을 풀어줄 으로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자 한다. 자기 스스로 빵을 주고자 필립보에게 물어 본다.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들이 예수에게 말한 것으로 되어있다. 특히 사다가 먹도록 한다”,“어디서란 표현은 전승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6

필립보에세 물은 예수의 말에 대한 오해가 없도록 저자가 설명한다. 제자들을 가르치려는 예수의 의도적 물음이라는 것이다. 필립보는 예수를 신뢰하는 믿음을 시험받는다. 예수의 물음은 믿음에 관한 것이고,“어디서의 대답을 예수에 대한 믿음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립보의 대답은 예수의 질문을 오해한다.

 

7

필립보는 예수의 물음이 믿음에 관한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대답한다. 필립보 대답의 역점은 그렇게 많은 군중에게 빵을 사서 먹게 하거나 어렵다는 데 있다. 기적이 없이는 불가능함이 시사된다.

 

9

안드레아도 예수 자신이 군중을 먹이겠다는 의도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 “보리빵밀빵보다 못한 주로 가난한 자들이 먹는 빵이었다. “생선은 구운 것을 가리키며 빵과 함께 먹는 음식이었다. 보리빵 기적 이야기는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안드레아가 제기한 물음과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으로 보리빵만 언급된 점에 비교해 볼 만하다.

 

10

예수는 자신이 그 많은 군중을 먹이겠다는 의도를 이제 구체적으로 밝힌다.

야훼가 목자로서 인도하는 푸른 초원을 연상시킨다. “풀이 많다는 사막과 대조되는 상황묘사로서 축제 분위기를 돋운다. 예수가 많은 군중을 먹인 기적을 해방절과 연결하므로, 양떼에게 목초를 제공하는 목자, 곧 메시아적 목자로서 예수상을 시사하는 데도 기여하는 상황묘사다.

 

11

당시 유다인 식사 예법에 따른 예수의 동작들이 묘사된다. 성찬례와 직결되지는 않지만 그 배경임은 배제할 수 없다.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 자신이 빵을 주는 분으로 강조되기 때문이다. 이 예수상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주는 분 세상의 생명을 위해 ”, 을 주는 분으로서 예수의 정체를 예시한다.

 

12

예수로 인해 빵의 기적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묘사한다.

 

남은 조각들이 아니라 예수로 인해 먹게 된 기적의 빵자체에 역점이 있다. 예수가 제공한 이 기적의 빵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으로서 표징적 의미를 지닌다.

 

13

빵의 기적을 재확인한다. 빵조작들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는 기적행위의 위력을 묘사하며 동시에 열두 제자를 시사한다. 제자마다 광주리 하나씩 빵조각들을 모아들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14

예수가 모세에 의해 약속된 예언자, “종말론적 예언자라는 이 고백은 공관복음에는 없고 요한복음에서만 있다. 요한복음은 빵의 기적을 메시아로서 예수의 자기계시가 이루어진 표징으로 설명한다. 예수의 신비를 드러내는 이런 고백 형태는 요한복음에서 더러 볼 수 있다. “세상에 오기시기로 된 분이라는 표현과 그 예언자란 칭호도 요한복음의 주된 관심사다.

 

15

빵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예수가 행한 표징적 의미를 참으로 깨닫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들의 오해는 그 표징을 지상 정치와 관련지은 데 있다. 예수를 억지로 메시아 왕”, 곧 민족해방자로 삼으려 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참된 왕국에 대한 불신자들의 오해와 같은 맥락이다. 특히 유다인들의 왕이란 칭호는 요한복음에서 이스라엘의 왕에 비해 항상 부정적이다. 여기서 언급된 유다인들의 왕이란 뜻과 동일한 의미다.

 

일부 사본에는 물러가셨다대신 피해 가셨다로 되어 있다. 아무튼 이 구절의 강조점은 예수 혼자서산으로 갔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는 의식적으로 외로이 하느님 가까이 갔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 홀로 있다는 말은 요한복음에서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자기계시의 오해 또는 몰이해에 대한 일종의 항의로 볼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예수님께서는 조용조용히 나지막하게 말씀을 하셨어도 속삭이지는 않았습니다.

군대에서는 속삭이면 ! 너 지금 속삭이냐?”하며 혼이 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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