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월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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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01 | 조회수1,74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로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으며,328년 그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 성인은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을 벌이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특별한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제1독서 <그들은 스테파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6,8-15 주해 스테파노가 체포되어 최고의회에서 고발당하다. 스테파노가 체포되어 최고의회에서 고발당한 이야기와 순교한 이야기는 원래 하나로 전해져 내려왔는데, 루카가 그것을 둘로 나누고 그 사이에 스테파노의 연설을 삽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스테파노의 체포와 고발 이야기와 순교 이야기에도 루카의 가필 부분이 상당히 많다. 마르코와 루카에 수록된 예수 수난사화와 일치하는 부분은 거의 다 루카의 가필이라 생각된다. 8절 스테파노는 기적과 표징도 행하고 설교도 했다. 앞의 단락을 고려하면 그가 “식탁에 봉사했다”고 말한 것도 같은데, 여기 단락에는 전혀 그런 말이 없다. 9절 스테파노의 적수들은 해외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해서 회당을 세우고 정착한 헬라계 유다인들,또는 일시적으로 귀환한 헬라계 유다인들이다. “자유인들”은 전쟁포로로 붙잡혀 있다가 석방되어 귀향한 이들이었다. “키테네”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리비아에 있는 도시로서 거기에는 유다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알렉산드리아”는 북아프리카 지금의 이집트 항구 도시로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해외 유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칠십인역 그리스 성서를 펴내고 필로 같은 석학을 배출한 곳이다. 에페소 교회와 고린토 교회에서 활약한 명설교가 아폴로도 알렉산드리아 태생 헬라 유다계 그리스도인디다. “길리기아”의 수도 다르소는 사도 바오로의 출생지다. “아시아”는 에페소 주변 지역이다. 11절 “모세를 모독하는 말”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거역하는 독성죄를 가리킨다. 13-14절에서는 스테파노가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거짓 증인들이 증언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런 거짓 증언을 할 수 있는 구실을 스테파노가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다교의 성전과 율법 자체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루카의 구세사적 구도에 따라 만민을 위한 보편적 구원이 더 이상 성전과 율법을 토대로 형성된 유다교 안에만 같혀 있을 수 없음을 증언했을 뿐이다. 스테파노가 성전을 비판한 내용을 참조하라(7.48-50). 14절 “나는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헐러 버리고 손으로 짓지 않는 다른 성전을 사흘 만에 세우겠다”를 루카는 나름대로 다듬어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물려 준 관습들도 고칠 것이다”라고 개작했다. 실상 예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고, 거짓 증인들이 예수께 뒤집어씌운 거짓말에 불과하다고 마르코도 사도행전 필자 루카도 주장한 사실에 유의하라.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께서 비록 마르코 14.58처럼 말씀하시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성전과 율법에 관하여 비판적 발언을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일곱 지도자들은 예수의 비판정신을 계승했을 것이다. 15절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 같았다”는 말은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을 눈여겨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께서 보였다, ...” 스테파노가 영광스러운 하느님과 부활하신 예수를 뵌 까닭에 그의 얼굴이 천상의 얼굴같이 변했으리라. 복음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주해 생명의 빵: 예수 자기계시 이 대목에서 “먹는 것”과 “생명을 얻는 것”이 근본 주제로 언급된다. 그란 51ㄷ절을 분기점으로 하여 주제어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서 “사람의 아들의 살”로 “먹는 것”도 비유적 의미에서 성사적 의미로 크게 바뀐다. 특히 51ㄷ-58절은 공관복음의 최후만찬 전승과 비교될 수 있는 이른바 성체성사론적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한 예수의 말씀에 바탕을 둔다. 바로 이 점이 공관복음과 크게 다르다. 예수의 이 자기 계시는 빵의 기적과 물 위를 걸은 기적에서 예시된 내용에 터를 두고 전개된다(22-34절). 22절 “호수 건녀편”은 예수가 빵의 기적을 행했던 호수의 동편. 16-17절 참조. 23절 11절 참조. “주님”이라는 그리스도론적 칭호는 부활한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므로, 편집 때 추가되었을 것이다. 일부 사본에는 “주님께서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이란 말이 없다. 24절 17.21절 참조. 25절 당시 상황에 걸맞는 표현이다. 그러나 독자에게는 예수가 홀로 물 위를 걸어온 것(16-21절)을 상기시킨다. 26절 예수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의 생각이나 태도를 알고서 그것을 들추어낸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체험한 “빵의 기적”만을 언급한다. 즉, 제자들만이 “물 위를 걸은 예수”를 체험했음을 시사한다. “표징을 본다”란 예수의 행위에서 신적 의미를 파악한다는 뜻이다. 기적의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신앙의 눈으로 보고 파악함을 가리킨다. 예수를 찾아온 이들에게는 “빵의 기적”이 아직 그런 의미로 파악되지 못했다는 것이 지적된 셈이다. 27절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은 인간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약속된 “양식”으로 언급된다. 이 양식은 지속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양식으로서 이른바 “길이 남아 있을 양식”이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양식이며, “사람의 아들”이 주게 될 양식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서 문맥상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사람의 아들”을 뜻한다. 따라서 이 양식은 “다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아들”이 주게 될 천상적 선물이다. “사람의 아들이 줄 것입니다”라는 미래적 표현이 이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 양식은 구원의 선물로서 먹고 마시도록 제공될 “살과 피”곧 성체성사적 선물로서의 “음식과 음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 예수 자신이 계시한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을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자”는 현존하는 하느님의 선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며 또한 예수 자신이다. 이 예수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때문에 자신이 곧 구원의 선물을 주는 분이요, 또한 자신을 “음식과 음료”로 제공하기 때문에 “다시 하늘로 올라간 사람의 아들”로서 구원의 선물,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분이다. 따라서 “사람의 아들이 줄 양식”이란 신적 생명을 지닌 예수 자신과 그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과, 동시에 성사적 “음식과 음료”와도 관련된 표현이라고 폭넓게 봐야 한다. 원래 의미는 “봉인하다”,“날인하다”란 뜻인데, 이 동사가 사용된 3.33의 맥락과 현 문맥에 따라 “확증하다”로 번역했다. 즉, “하늘로부터 내려온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 하느님”에 의해 확증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말하고,“길이 남아 있을 양식”을 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이란 표현은 파견된 “사람의 아들”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도 시사한다. 28절 예수의 말을 오해한 질문이다. 즉, “힘쓰시오”란 말을 오해하여 “일들”로 생각한 것이다. 사실상 “하느님의 일들”은 하느님 자신의 행위이고,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이해하고 찬미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는 다만 하느님에 의해 요구되는 “일”을 뜻할 뿐이다. 29절 “하느님의 일들”이 예수의 대답에서는 단수형태. 곧 “하느님의 일”로 언급된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은 곧 당신이 파견한 이를 믿는 것 하나뿐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이 파견한 이를 믿는 인간의 행위 또는 태도다. 하느님의 요청 또는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바로 이것을 하느님은 원하시며, 이것을 하느님의 원의에 따라 행하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다. “하느님의 일”로서의 믿음이 인간의 성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원의에 따른 인간의 태도 또는 행위로 부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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