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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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02 | 조회수88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오늘 기념하는 야곱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며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제1독서 <주님께서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해 15장의 주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다. 바오로가 이 문제를 다루게 된 계기는 고린토 신자 일부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었다. 아마 에페소에 머물던 때 자기에게 오가던 코린토 신자들로부터 이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도입부분의 장중한 문제와 상세한 논술은 바오로가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문제를 방치할 경우 고린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뿌리쩨 흔들리겠다고 염려한 것 같다. 15장의 구성은 12절에서 확연한 구분을 이룬다. 12절에서부터 “죽은 이들의 부활”문제를 본격적 주제로 다루며, 1-11절에서는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재확인시킨다. 15.1-11절 문단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3ㄴ절: 3ㄷ-8절: 9-19절: 3ㄷ-8절 문장들이 주어는 3ㄷ절의 “그리스도”뿐이다. 8절 끝에서는 6절에서부터 나열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라는 고리를 바오로 자신에게까지 연결시킨다. 9-10절에서는 사도인 자신의 현재를 하느님의 은총 덕분으로 이해함을 보여준다. 11절은 2절의 “믿음을 가졌다”. 1-2절의 “(복음)전하다”와 유사한 “선포하다” 동사가 반복되면서 두 번이나 “이렇게”(그렇게)라는 부사가 사용되는 것으로 보아 1-11절의 결론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2절 “무슨 말로 (복음)전했는지”에 해당하는 원문은 간접의문문으로 되어 있어서 번역에 어려움이 있다. 3절 랍비들이 전승의 권위를 강조한 것과 같은 식으로 “전해받다”동사와 “전해주다”동사를 함께 사용하여 전승을 주고받는 관계를 표현한다. 3ㄷ-5절에서 초기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들의 “전통적 신앙고백문”을 전한다는 것은 신약성서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3ㄷ-5절은 네 개의 “...셨다는 것”이라는 문장 또는 세 번의 “그리고 ... 셨다는 것”이라는 문장에 의해 나머지 글과 뚜렷이 구별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3ㄷ-8절 문장들의 주어는 3ㄴ절의 “그리스도”뿐인 것이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장중한 도입부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으로 안내한 복음의 내용인즉 바로 이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4절 3ㄷ절과 4ㄴ절에서 반복되며 평행을 이루는 “성경대로”라는 문구는 그리스도의 “죽음심”과 “부활하심”이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죽음심”과 “부활하심”을 내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호세 6.2: 요나 2.1: 마태 16.21// 참조. 여기 사용된 동사 에게이레인의 기본 뜻은 잠에서 “깨우다”또는 “깨어나다/일어나다”이다. 이 동사가 “죽은 사람(들)”에 적용되면서 “부활시키다/부활하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문제는 4절의 동사 에게게르타이를 현재완료 수동태로 보느냐 현재완료 중간태로 보면 “일어나셨다. 부활하셨다”라고, 수동태로 보면 “일으켜지셨다”라고 번역된다. 여기 15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는 것”,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 부활되리라는 희망”임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이 희망의 근거로 “그리스도의 부활”도 말한다면, 15장의 에게이레스타이 동사는 중간태가 아니라 수동태로 보는 것이 옮다. 그리고 “일으켜지셨다/일으켜진다”라는 말은 이 말의 수동태를 신적 수동태로 보고 “하느님이 일으켜 주셨다/ 하느님이 일으켜 주신다”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다. 실상 15절에서는 “그리스도를 그분이 일으키셨다”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바오로의 생각은 이미 6.14에서 명시되었다. 그러나 중간태로 본다 해도 “그리스도 부활”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완전 배제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3ㄷ-5절에 사용된 다른 동사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항인 데 비해 “일으켜지셨다”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완료형이리는 점이다. 성서 그리스어에서 완료형은 과거 행위의 영향이 현재까지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4절의 현재완료 수동태 에게게르타이는 15장에서 다음 여섯 구절에 다시 나온다. 모두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이것만 보아도 바오로가 얼마나 3ㄷ-5절에 나오는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셨다”는 믿음을 12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일으켜질 것이다”라는 희망의 근거로 삼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5절 3ㄷ-5절에 의하면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죽고, 묻히고, 일으켜지고, 나타나셨다”는 네 가지다. 그런데 “묻히셨다”는 것은 “죽으셨다”는 것을, “나타나셨다”는 것은 “일으켜지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말이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로 요약될 수 있다. 6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체험한 증인들”을 나열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1-11절 단락에서 강조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바오로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도들도 다같이 선포하는 바요 그 선포를 듣고 고린토인들도 믿고 있는 바인 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공동기반으로 삼아, 12절에서 바오로는 “죽은자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주장을 반박하려고 한다. 6절 6-8절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누구누구에게 발현하셨는지 그 명단이 나열되는데, “그러고 나서”,“이어서”,“맨 마지막으로” 그리고 “나타나셨다”라는 말의 반복으로 한 소단락을 이룬다. 본 것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만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은 근거가 확고함을 강조한다. “잠들다”는 “죽었다”의 완곡한 표현이다. 8절 “배넷병신”이라고 번역된 엑트로마는 신약성서에서 이곳에 단 한 번 나오는데, 조산. 유산. 낙태 등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만산이 아닌 조산의 경우에 사용되므로 여기서 “바오로가 다른 사도들에 비해 늦게 불리었다”는 것을 표현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바오로가 부름받을 때의 처지가 마치 배넷병신처럼 부족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표현이라고 보아야겠다. 복음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주해 6절 예수의 자기계시다. “나는 길입니다”에 역점이 있다. 예수는 아버지를 계시하기 때문에 “길”이다. “진리요 생명입니다”란 말은 “길”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한다. 예수는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를 계시하고, 그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실천하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자기를 믿는 자 모두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길”임을 뜻한다. 이 계시는 “나는 문입니다”라는 계시 말씀과 맥락을 같이한다. “길”의 목적지가 “아버지”로 시사된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은 유일무이한데, 그 “길”이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말이다. 이 말로 인해 “길”로서 자기 자신을 계시한 예수의 말이 더욱 완전하게 표현된다. 오로지 예수안에서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또한 구원될 수 있다는 뜻이다. 기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요한복음 그리스도론과 구원론의 최고봉이요 요약이다. 7절 일부 고대사본에는 “여러분이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제자들에 대한 비난이 담겨 있다. 아마도 필립보에 대한 예수의 책망으로 보고 필사자들이 고쳤을 것이다. 하지만 위 본문이 “그러나 이제 이미 여러분은 ...”(7ㄴ절)이란 문맥에 내용상 더 적절히 연결된다. 6ㄴ절에도 순조롭게 연결된다. 즉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하지만, 그를 통해 아버지께로 간다는 뜻으로 다시 언급된 셈이다. 또한 “아버지께로 간다”가 “아버지를 안다”로, “나를 통하지 않고서”가 “나를 알면”으로 달리 표현되는데, 따라서 7절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무이한 “길”이라는 6절의 내용을 더욱 강하게 일깨우고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강화시킨다고 볼 수 있다. “안다”란 표현은 인격적 관계를 가지게 되는 공동체 형성을 뜻한다. 8절 일종의 이의제기로서 필립보의 이 소청은 아직도 예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에 대한 믿음도 부족함을 시사한다.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란 말은 일종의 신변을 가리키는 말로서 아버지를 직접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뜻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다른 대목에서는 “보여주다”란 말이 직접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가리킨다. 그리고 아무도 하느님을 직접 보지 못했다는 말이 강조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 주변 종교 신비가들의 사고가 반영된 듯하다. 9절 예수의 말과 일들을 통해 예수의 신원과 정체를 이미 알았어야 했다는 것을 뜻한다. 예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요, 아버지는 예수 안에서 말씀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아버지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필립보를 책망하는 말로서, 하느님을 직접 눈으로 보려 하거나 특별한 환시적 신체험을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라는 촉구다. 10절 아버지와 예수가 완전히 일치되어 있음을 표현한다. 아버지께서 예수 안에 계시고 예수를 통해 계시하시며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예수의 말들은 예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이며 아버지께서 위임한 것들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행하는 일들이 곧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들이라는 뜻이다. 11절 아버지와 완전히 일치된 예수 자신과 예수의 말들을 믿으라는 뜻이다. 적어도 그 일들 자체를 보아서라도 믿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일들”은 아버지와 예수가 함께 일치하여 행하는 것들로서, 예수를 증언하는 것들, 곧 표징을 가리킨다. 이 일들은 눈으로 볼 수 있는 표징이요 증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도록 이끌어 주고 도와 주는 근거가 된다. 12절 믿음을 가지고 제자가 된 자들에게 예수가 앞서 언급된 “일들”과 관련해서 말한 약속이다. 믿는 제자들이 행하는 “일들”은 우선 예수 자신의 일들로 강조된다. 원칙적으로 예수 자신이 그 일들을 행하며 아버지께로 떠나간 다음에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또한 그 일들은 예수가 지상에서 행하는 이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시사된다. 그 일들은 단순한 기적이 아닌 표징으로서 생명을 주는 예수 자신을 가리키고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다는 뜻 이다. 예수의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은 예수와 함께 이루는 일들로서 믿음에 대한 약속을 가리키며,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제자들을 통해 예수의 일들이 계속됨을 뜻한다. 즉 그 일들은 제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광스럽게 된 예수의 일들이요, 그일들의 끝이 없다는 뜻에서 “더 큰 일들”로 언급된다. 이런 일들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 다음 제자들의 활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하지만 예수의 일들을 보증하거나 능가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13절 제자들의 청을 다 들어주겠다는 또 다른 약속이다. 그러나 내용상 12절의 약속과 연결된다. 제자들이 예수의 일들을 행하고 그 일들보다 “더 큰 일들”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예수가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 곁에서 그들의 청을 들어주고 그들이 청하는 것을 또한 함께 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자들의 청은 “예수 이름으로”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어떠한 청이라도 예수가 다 들어준다는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서는 예수와의 깊은 결속관계 속에서 예수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며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제자들의 청을 확실하게 다 들어주게 된다는 것은 예수가 그들을 파견했고 그들과 결속관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또한 예수 자신이 그들의 일을 함께 행하고 “더 큰 일들”이 그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원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의 청을 들어주는 동기와 목적이 시사된다. 그것은 마치 예수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일들을 이행함으로써 아버지를 지상에서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같다. 제자들은 예수가 행한 일들을 하고, 예수도 제자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기 때문에 그들의 일들이 바로 예수 자신의 일들이 된다. 14절 13절의 약속이 반복되지만, 예수 자신이 기도의 대상으로서 또한 청을 들어주는 자로서 강조된다. 즉 예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계속 활동하는 자로 더욱 부각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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