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5 부활 제3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04 | 조회수1,828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29 그때에 성령께서 필리포스에게, 32 그가 읽던 성경 구절은 이러하였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35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37)·38 그러고 나서 수레를 세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주해 26절 루카의 사화에서 천사들은 중재역할을 담당한다. 루카의 상징적 세계에서는 천사들이 직접 말을 건넬 수 있다. 27절 에티오피아는 이집트 남쪽과 경계를 이루는 나라이고,구스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이 나라는 언제나 간다케라는 칭호로 불리는 여왕이 통치했다. 고대 근동이나 동양의 왕실에서는 흔히 거세시킨 남성에게 궁정의 중요한 일을 맡겼다. 신명 23.2에 따르면 고자가 된 사람은 집회에서 제외되었다. 이사 56,4-5에 보면 내시들도 계약에 충실하면 하느님의 집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약속이 있지만 쿰란의 메시아 공동체는 그들을 제외시켰다. 28절 마차는 내시가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가고 있었을 것이다. 내시는 고대 관습대로 혼자 있을 때라도 소리를 내어 성서를 읽고 있었기 때문에 필립보가 그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29절 여기서는 천사가 아니라 “영”이 필립보에게 말을 건넨다. 그러나 천사나 “영” 둘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분의 직접적인 인도가 강조된다. 30절 성서의 모든 본문은 여러 단계의 이해를 거쳐 파악될 수 있다. 랍비들은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 자구적 의미와 응용적 의미와 신비적 의미를 구별했다. 그리스도교 전통도 비슷한 구분을 했는데, 본문을 자구적. 윤리적. 유비적으로 각각 구별하여 읽었다. 본 사건으로 돌아오서 보면, 필립보는 예언자들이 미래를 향한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 속에서 내시에게 질문을 던진다. 31절 “인도하다”는 길을 따라 이끄는 것을 말한다. 이 원초적 의미가 칠십인역에서는 “의로움이나 지혜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발전된다. 쿰란 공동체에서 “의로움의 교사”는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는 능력을 지닌 특별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32절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 고통받는 종의 노래는 신약성서에 매우 드물게 인용된지만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잇어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33절 “굴욕”은 루카가 좋아하는 “낮춤/올림”의 관계를 암시할 수도 있고 바오로가 메시아의 “비움”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겸손”의 의미를 가리킬 수도 있다. 34절 쿰란 공동체에서는 흔히 옛 본문을 당대의 인물들과 사건들에 적용시켜 해석했다. 내시의 질문도 예언자의 말을 예언자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에 적용시켜 해석할 가능성을 전재한다. 35절 “입을 연다”는 성서적 표현은 칠십인역에서 장중한 선언이나 예언자의 담화에 앞서 나온다. 여기서 필립보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의 기록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당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 그들에게 설명해 주시는”예수와 비교된다. 39절 “주님의 영이 필립보를 잡아채 갔다”는 표현은 루카의 시청각 교육을 드러낸다.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기쁨은 이 세상에 드러난 하느님의 활동에 대한 특별한 반응이다. 루카복음에서 기쁨이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유다와 헤로데의 기쁨뿐이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박해를 받은 후 기뻐하며 돌아가고 사마리아 지방의 도시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 그곳에는 기쁨이 넘쳤다. 40절 아스돗은 해변가에 위치한 가자의 북쪽에 있다. 루카는 여기서도 한 가지 사건을 바탕으로 일반적인 성공을 언급한다. 이 선교는 성령에 의해 극적으로 유도된다. 필립보는 가이사리아까지 바닷가를 따라 선교활동을 벌이는데, 바오로는 가이사리아에서 필립보를 만나게 될 것이다. 복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주해 44절 “나를 보내신 아버지”는 문맥상 예수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이”임을 예시한다. 45절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임을 뒷받침하는 성서 인용문이다. 자구대로의 인용은 아니고 문맥상 믿음에 대한 의미를 좀더 설명하고자 자유스럽게 인용된ㄷk. “모든 이들”은 보편적 특성을 드러내고자 삽입한 말이다. 이 인용구에 대한 짤막한 해설이 곧바로 이어진다. 문맥상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는다”란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배워서 그분의 가르침을 알고 받아들임을 함께 뜻한다.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으라”라는 원문의 표현은 이런 의미를 강하게 시사한다. 인용된 성서 말씀에 대한 설명이다. “아버지로부터 듣는다”는 것도 직접 주의깊게 듣는 내적 경청을 가리킨다. “배운다”는 것은 이런 경청으로 들은 것을 습득함을 뜻한다. 이런 “듣고 배우는”과정에서 “아버지께서 이끄시는”일이 이루어진다. 즉, “아들” 예수에게로 오게 된다. 달리 말하자면 “아들”예수를 믿게 된다. 46절 45절에 오해가 없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그이” 곧 하느님과 함께 있었고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아들”외에 그 누구도 하느님을 육안으로 보지는 않았다고 언급한다. “아들”만이 실제로 “아버지”를 보았다고 강조한 말로서 이 아들 안에서 아버지께서 당신을 보고 또한 당신 말씀을 듣고 배우게 하신다는 것을 시사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완전한 일치를이루기 때문에 아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아버지의 말을 듣는 것이다. 47절 믿음을 촉구한다. 하느님의 은총으로서의 믿음이 이제 인간의 행동이 바라야 할 믿음으로 언급된다. 즉, 구원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 편의 응답 또는 결단으로서의 믿음에 부각된다. 49절 49-51ㄴ절은 31절에 연결될 수 있고, 32-35절과 구조나 내용 면에서도 매우 흡사하다. 즉, 디 두 대목은 31절에 연결되는 것으로서 서로 병행한다. 49절은 문맥상 50절을 더욱 명확하게 한다. 즉 만나를 먹고도 주었다는 “죽음”에 역점을 둔다. 50절 만나와 대조되는 “하늘의 빵”은 “생명”을 준다는 데 역점이 있다. 만나와 “하늘의 빵”의 명확한 대조가 “죽음”과 “생명”으로 묘사된다. 27절과 흡사하다. 51절 “생명의 빵”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에 관한 내용이 함께 요약된다. 그러나 이 언급은 “살아 있는”이란 말에 역점이 있다. 그래서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생명을 계속 줄 수 있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영원히 살기 위해 반드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을 먹어야 하는 조건이 강조된다. 이제까지 현재적 선물로 언급된 “방”이 미래적 선물로 언급된다. 이것은 “세상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헌신할 예수의 죽음을 내다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이 결론이요 동시에 성체성사에 관한 가르침의 지적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은 공관복음의 최후만찬에 언급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쏟는 피”와 비교될 수 있는 말로서 성체성사적 선물을 주고자 한 하느님의 뜻이 “세상의 생명을 위해”ㅎ너신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 실현된다는 신학사상도 시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죽음으로 주어진 예수의 “살”은 이제 성체성사안에서 제공되고 취하게 되는 “성체”를 가리킨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