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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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07 | 조회수1,384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성소 주일 해마다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이다. ‘하느님의 부르심’인 성소에는 여러 거지가 있다. 교회는 이 모두를 존중하는 가운데, 특별히 사제,수도자,선교사 성소의 증진을 위하여 이 주일을 지낸다. 성소 주일은 제2처 바티칸 공의회가 진행되던 1964년에 성 바오로 7세 교황이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나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정하였다. 이날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성소 계발과 육성에 필요한 꾸준한 기도로 협력해야 할 의무를 일깨우는 기회가 되고 있다. 제1독서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주해 14절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오늘날의 술타 다그의 남쪽비탈 지역에 자리잡은 도시로서 셀레우코스 니카톨이 창건했다. 셀레우코스 가문의 왕들은 많은 유다인을 프리기아와 리디아에 정착시켰는데, 안티오키아는 비시디아와 근접한 프리이가 지방에 속해 있었다.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는 기원전 25년부터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43절 여기서 말하는 “경건한 개종자들”은 할례와 율법 전체를 받아들인 경건한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느님의 경외자들보다 유다교에 더 가까운 사람들이다. “하느님의 은총에 따라 산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바오로의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44절 루카는 바오로를 위대한 설교가요 성공적 선교사로 소개한다. 그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큰 반항을 일으키자 유다인들이 시기하여 그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한다. 45절 유다인들이 모독을 한 대상은 바오로가 아니라 예수였다. 46절 9,27-28에도 나오는 “대담하다”는 표현은 확신에 찬 철학자의 말에 부여되는 특징이다. 선교과정은 하느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먼저 유다인들, 다음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바오로는 사도행전에서 유다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 선교의 발걸음을 돌리겠다고 세 번 선언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고린토에서의 두 번째 선언 뒤에도 유다인들을 향한 선교를 계속한다. 47절 27절에서 루카는 이스라엘 가운데 지도자들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를 구별했고 여기서는 유다인들의 반응과 이방인들의 반응 사이를 구별한다. 기뻐하는 반응은 하느님의 방문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다. 찬양하는 반응: 루카 2.20; 5.25-26; 7.16; 13.13; 17.15; 18.43; 23.47; 사도 4.21; 11.18.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스스로를 영원한 생명에 부적합한 자로 판결한 것과는 달리 이방인들은 같은 하느님의 말씀을 환영하고 찬양함으로써 자신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한 자임을 드러낸다. 49절 어떤 지방에서 선교가 성공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루카의 독특한 표현. 50절 바오로에 대한 유다인들의 시기는 폭력으로 이어진다. 디아스포라 회당 안에서는 부인들이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부인들이 유다교에 개종한 사람들인지 아니면 단순히 유다교에 호의를 가진 사람들인지 알기가 어렵다. 루카가 13장에서 “경건한”이라는 형용사를 어떤 특정한 그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소 자유롭게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52절 루카는 말씀이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뿐 아니라 지역 공동체들이 어떻게 번창해 갔는지에도 관심을 보인다. 제자들이라는 말로 독자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2독서 <어린양이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7,9.14ㄴ-17 주해 9절 이 표현은 쉽게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연상시킨다. 이 약속이 살아 있는 것으로 실현된다. 이제 곧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교회이기 때문이다.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는 묵시록의 전형적인 표현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1마카 13.51에 보면 “백칠십일년 이월 이십삼일에 유다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 민족의 큰 적이 참패하여 이스라엘 땅 밖으로 쫓겨간 것을 축하했다”고 한다. 구약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다는 것은 승전의 기쁨을 표시한다. 이처럼 여기서 종려나무 가지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늘나라에 개선한 사람들임을 가리킨다. 14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럽혀진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어린양이 겪은 시련과 고통의 결과로서 의인들이 나타나게 된다. 구약에서 죄로 자기 옷을 더럽힌 사람과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와 은혜로 깨끗해지고 정결하게 된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같이 묵시록에서도 흰옷 입은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구원 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이 자기 예복을 어린양의 피로 희게 빨았다는 것이란 인간 구원사업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또한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얻은 선과 효과가 자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도 포함한다. 15절 이스라엘 백성이 옛 계약에 의해 하느님 백성으로서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의 “섬김”을 상기시킨다. 이 의무가 이제 “하느님의 영으로 예배하는” 새로운 계약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넘어왔다. 예수 자신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오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그 때입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보고 계십니다. 당신 백성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거처는 옛 이스라엘 신앙의 한 축을 이루었다. 이 교리가 신약에서 더욱 충만한 의미로 완성된다. 여기서 하느님과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장막을 치다“란 말은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말이다. 16절 16-17절은 이사 49-10에서 유래한다. ”그들은 결코 베고프거나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열풍에 쓰러지고 햇볕에 넘어지는 일도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가엾게 여겨 이끌어 주고 셈이 솟는 곳으로 인도해 주리라.“ 바빌론의 유배에서 돌아옴을 상기시키는 이 약속이 종말론적이며 메시아적인 차원으로 바뀌었다. 17절 분명하게 에제키엘의 예언을 상기시킨다. ”나는 내 양떼를 구해 주어 다시는 노략질당하지 않게 하리라. 내가 양과 양 사이의 시비를 가려 주리라. 내가 한 목자를 세워 주겠다. 그는 나의 종 다윗이다. 그가 내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리라. 나 야훼가 몸소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의 영도자가 되리라. 나 야훼가 말했다“ 착한 목자라는 메시아성은 요한 10.11.14에서 그리스도께 적용된다. 복음 <나는 내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주해 28절 믿지 않는 유다인들과 대조하여 예수에 대한 양들의 태도와 양들에 대한 예수의 배려가 앞서 언급된 목자와 양들 비유의 반복으로써 시각적으로 강조된다. 특히 구원의 보장은 다른 대목과 맥락을 같이한다. 29절 어떤 사본에는 “나의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은 만유보다도 더 위대하고”로 되어 있다. 그런 내용상 문맥이 적절하지 못하다. 현 문맥에서는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양들을 보호하는 예수의 힘은 곧 아버지의 힘이요, 아버지는 예수의 양들을 위협하는 만유보다도 위대하시다는 뜻이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주신 양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확실성을 아버지에게 둔다. 30절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가 하나다”라는 말은 예수 자신이 하느님과 함께 일하며, 하느님과 함께 있으면서 일치하고 하느님의 뜻과 지시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내용을 총체적으로 함축한다. 예수의 모든 일들이 바로 일치에서 이루어진다.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의 깊은 내면적 관계와 동시에 본질적 동등성을 뜻하는 그리스도론적 언급으로도 볼 수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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