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1 부활 제4주간 수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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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10 | 조회수1,217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나를 위하여 바르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주해 24절 전체 상황을 요약하는 발언(2.47;4.4;6.7;9.3111.24 참조). 폭군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힘차게 전파된다. 25절 바르나바와 사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모은 원조기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곳 형제들에게 전달한 뒤 다시 안티오키아로 내려갔다. 13장 1절 사도행전에서는 교사라는 칭호가 여기만 나온다. 루카는 안티오키아 교회의 주요인물들을 바르나바와 사울로 사이에 언급함으로써 이 두 서교사가 그들 모두를 포옹하여 함께 일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유다식 이름 시므온에 붙여진 라틴어 별명 “니게르”는 검다는 뜻이고 그가 아프리카 태생임을 가리킨다. “헤로데 영주오 함께 자라난”이라는 표현은 채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절 손을 얹는 동작은 능력이나 권위를 나타낸다. 단식과 기도의 연결에 대해 루카 2.37;5.33; 사도 14.23 참조. 단식과 기도의 병행은 유다교의 중요한 신심행위다. 4절 루카는 사도들의 파견에 하느님의 권위를 부여한다. 성령의 직접 중재에 대해 4.31; 8.29.39; 10.44; 16.6 참조. 5절 셀류기아는 안티오키아에서 서쪽으로 16키로미터 떨어진 오론테스 강 하류에 위치한 항구도시이고 살리미스는 키프로스 섬의 동쪽 연안에 있는 제일 큰 도시다.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는 어디를 가든지 제일 먼저 유다교인들의 회당에 들러 설교를 한다.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유다인 회당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비교적 정확한 증언중의 하나다. 모세의 책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읽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교의 주일예배에서 차지하는 말씀의 중요성을 재확인해 준다. 복음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주해 말씀의 심판- 결단의 촉구 예수의 자기계시 말씀으로서 문맥상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대목이다. 예수의 공적 계시활동 보도는 이미 마무리되었고,예수의 활동 성과도 앞서 요약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활동 성과도 앞서 요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이 결여된 예수의 자기계씨 말씀이 현 문맥에 잘못 연결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원래 8.12나 12.36ㄱ 또는 12.37절에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내용상, 앞서 수시로 보도된 예수의 자기계시 말슴에 비해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 아마도 전승자료를 토대로 엮어진 이른바 요한복음 저자의 복음선포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 선포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예수의 계시 말씀이 선포된 당시에는 영향력이 적었다고 할지라고 그 영향력은 여전이 지속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고자 했을 것이다. 또한 제자들에게만 계시하는 예수의 말씀에 앞서 교훈적 의도 아래 결단을 촉구하면서 마지막으로 이 대목을 현 문맥에 추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맥상 자신의 영광만을 찾고서 신앙고백을 하지 못한 자들에게 말한다. 예수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의 말씀을 한다. 따라서 예수의 계시 말씀은 “(큰 소리로) 욏다”란 표현과 함께 성령으로 인한 영적 말씀이요 종말론적으로 유요한 말씀이라는 선포적 특정이 강조된다. 믿음을 촉구하는 말로서 예수를 믿는 것이 곧 예수를 세상에 파견하신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가 파견된 자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만 언급한다. 즉, 예수는 자기를 보내신 하느님을 대신하고 하느님은 예수안에 현존하시며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함께 활동하신다는 뜻이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 강조된 여러 대목과 달리 여기서는 예수를 파견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강조된다. 예수는 다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끌고 그 믿음은 하느님 안 에서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하느님 중심적 믿음이 강조된다. 하지만 그리스도론적 믿음이 위축된 것은 아니다. 하느님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45절 “믿는다”대신 “본다”란 말로 44ㄴ절을 더욱 강조한다. “본다”란 말은 외적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영적으로 알아보고 신앙적으로 보며 또한 천상적인 것을 보는 것까지 뜻한다. 이 동사는 특히 표징과 발현한 예수를 외적으로 보는 것에서부터 오로지 신앙으로써만 온전히 볼 수 있는 것에까지 전이되는 과정을 시사하는 대목에서 사용된다. 따라서 “본다”와 “믿는다”는 이 두 동사는 요한복음에서는 동의어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가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있다고 신앙적으로 보는 것은 육화와 육화된 그리스도의 활동을 전제로 한다. 즉, 믿는 자는 예수 안에서, 곧 그의 말과 일들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다. 46절 3.19; 8.12 참조. “나는”이란 말은 계시자요 구원자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어둠”은 죽음의 영역을 가리키며, 하느님의 아들만이 이 영역우로부터 인간을 해방할 수 있다. “어둠속에 머문다”란 하느님의 진노, 곧 영원한 죽음으로 단죄되는 심판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47절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곧 영원한 죽음으로 단죄되는 심판의 상태에 머무는 것을 뜻한다. 예수의 말들을 믿음으로 들어야 지키게 된다. “지키다”는 도덕적 행동이 아니라 믿음을 가리킨다. 예수를 심판자로 만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예수의 계시, 곧 하느님의 말씀으로는 심판을 받은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예수의 심판이 완전히 배제되지 않고 다만 변증법적으로 언급된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예수의 구원행위가 강조된다. 48절 “믿지 않는 이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와 의미상 다를 바 없다. 믿지 않는 태도를 “물리친다”란 말로써 강조하고 “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란 마로써 더욱 밝힐 따름이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를 심판할 분이(따로) 있습니다”란 말은 47절을 더욱 개진하는 언급으로써 예수의 “말들”이 결국 심판한다는 뜻이다. 예수 자신은 심판하러 오지 않았지만 예수의 활동은 심판적 의미를 지닌다는 뜻이다.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는 예수의 “말들”을 거절하는 자는 심판을 자초한다. 예수의 “말들”이 “내가 말한 그 말”이란 단수 형태로 요약된다. 예수의 이 “말”은 아버지의 말씀이기 때문에 자체로 힘이 있고 영향력을 발휘한다. 즉, 정화력과 성화력이 있으며, 신적 생명과 참된 자유를 선사한다. 여기서는 다만 심판할 수 있는 역할만 언급된다. 영생을 주는 예수의 “말”의 어두운 뒷면이 시사된다. “마지막 날에”란 표현과 함께 언급된 미래적 심판은 사실상 믿지 않음으로 인해 “지금 여기서” 자기 자신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현재사건에 비해 약화한다. 그러나 상충하지는 않는다. 현재적 심판도 종말론적 심판으로서 종말론적 미래를 규정하는 유효한 심판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가 지금 얻게 되는 “생명”도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지향된 생명이다. 즉, 영원한 생명은 믿는 자가 지금 얻게 되는 “생명”도 “영원히 생명은 믿는 자가 목표로 삼는 선물이다. 따라서 저자는 종말론적 미래를 배제하는 것이 아리라 종말론적 현재에 신학적 역점을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심판에 대한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 미래관을 반영한 듯하다. 그리하여 인간을 구원할 수도 있고 심판을 자초할 수도 있는 예수의 ”말“에 대한 결단을 촉구하고자 했으리라 여겨진다. 예수의 ”말“이 심판할 권능을 가지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예수의 ”말“이면에는 하느님의 권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설명은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시사하고, 또한 예수 자신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말“이 심판한다는 언급도 정당화한다. 마치 하느님께 유보된 심판으로 설명된 이 내용은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것을 모두 아들에게 넘겨주셨습니다“라는 말에 상충되지 않는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들은 대로 심판을 하지 때문이다. 여기서는 예수가 아버지와의 일치 속에 아버지의 명령대로 행동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50절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예수의 ”말들“은 그말들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뜻이다. 예수는 자기를 파견하신 아버지를 직접 안다는 뜻으로서 아버지와 일치된 내적 관계를 시사한다.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자로서 말한 예수의 ”말“은 바로 하느님의 계시 말씀임을 가리킨다. 즉, 예수의 계시 말씀 안에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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