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6 부활 제5주간 월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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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15 | 조회수2,06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헛된 것들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7 그들은 거기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다. 11 군중은 바오로가 한 일을 보고 리카오니아 말로 목소리를 높여, 14 바르나바와 바오로 두 사도는 그 말을 듣고서 17 그러면서도 좋은 일을 해 주셨으니, 주해 6절 리가오니아는 타우루수 산맥 남쪽 기슭, 갑바도기아의 동쪽, 갈라디아 지방의 북쪽, 프리기아와 비시디아 지방의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곳이다. 이 지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리스트라와 데르배다. 8절 이 태생 앉은뱅이에 대한 묘사는 3,1-10에서 베드로가 고쳐준 앉은뱅이의 모습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두 치유사건의 유상성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루카의 고의적인 의도에서 나왔다. 바오로 역시 베드로와 예수께서 하신 똑같은 행적을 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9절 “눈여겨보다”라는 표현에 대해 루카 4.20; 22.56; 사도 1.10; 3.4.12; 6.15; 7.55; 10.4; 11.6; 13.9 참조. 구원과 믿음의 연결은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의 중요한 주제다. 10절 3.8과 같은 표현. 11절 아테네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이 시골 읍네 사람들은 바오로의 행적 앞에서 소박한 반응을 보인다. 바오로를 신으로 떠받드는 그들의 말은 당대 그리스 -로마 종교의 한 모습을 반영한다. 곧, 사람들 가운데는 인간 세상과 신의 영역을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12절 제우스는 올림피아 만신전의 최고신이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아들인데, “사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신” 또는 “언변을 다스리는 신”으로 알려져 있었다. 13절 이 도시 사람들은 성문 밖 광장에 제우스 제단을 차려놓고 제사를 바쳐왔던 것으로 보인다. 제우스 신전의 제관은 제물로 바쳐질 황소들과 그 머리에 걸 화환을 준비해 가지고 성문 앞에 왔다. 14절 사도행전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를 명시적으로 사도라고 칭한 유일한 예다. 14.4의 사도에 대한 언급은 포괄적이다. 한편 여기서는 바르나바가 바오로보다 먼저 나오는데, 리스트라 사람들이 바르나바를 바오로보다 높은 신으로 착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옷을 찢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극도의 슬픔이나 분노와 같은 격한 감정을 나타낸다. 옷을 찢은 두 사도는 큰 소리로 외치며 군중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연속된 행위는 판관 14.16-17을 연상시킨다. 15절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입니다”란 말로 두 사도는 자신들이 하느님의 옝예로운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됨을 분명히 밝힌다. 이 말은 자기를 신처럼 영접하는 고르넬리오에게 한 베드로의 말을 연상시킨다. “부질없는 것들로부터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라는 표현은 헬라계 유다인들의 호교론을 특징짓는다. “돌아서다”는 루카가 즐겨쓰는 동사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라는 표현은 4.24를 반영한다. 하느님이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근거로 이용된다. 16절 여기서 “길”은 관습 또는 윤리적 행위를 의미한다. 하느님은 이방인들에게 아직 계시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못 알아보는 것은 용서가 된다. 17절 하느님이 자연에 하신 일은 그분의 선하심을 증언한다. 이 일은 유일신 숭배의 근거가 된다. 하느님이 주시는 축복의 내용, 즉 비와 열매와 음식과 마음의 기쁨 등은 시편 144.13-17; 146,8-11을 상기시킨다. 18절 기적에 대한 군중의 반응이 매우 컸음을 암시하는 표현. 복음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주해 21절 15절을 반복한다. 다만 사랑의 의미를 전개하기 위해 역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부활 이후 제자들의 공동는 사랑을 바탕으로 사랑안에서 성장해 가는 공동체임을 시사한다. 물론 이 공동체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서는 예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 전제된다. “드러내 보인다”란 말은 제자들의 노력에 앞선 예수의 자기계시를 가리킨다. 이 계시는 또한 하나의 지속적 과정이다. 예수는 자기의 계명들을 지키면서 자기를 더욱더 믿고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강하게 드러내 보인다. 예수를 사랑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에게 사랑안에서 예수 자신을 더욱더 열어보인다. 22절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유다는 야고보의 아들 또는 타대오라고 불리는 사도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교회 전통에서는 예수의 형제 유다와 동일시했다. 그러나 이 전통은 여기서 언급된 유다가 요한복음서의 “예수의 형제들이 그를 믿지 않았다”와 상충된다. 예수가 왜 “세상”과는 거리를 두려 하는지 묻는다. 예수의 자기계시를 오해한 것이다. 예수는 사랑의 내적 현시를 뜻했으나 유다는 세상에 대한 외적 현시를 물은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 왜 “세상”이 예수의 자기계시에서 제외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나 이의제기로서 의미는 있다. 이 질문 이면에는 왜 부활한 예수가 제제들에게만 발현했는지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이의나 항변이 시사되어 있다. 23절 유다의 질문 내용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다. 앞서 말한 바를 거듭 강조할 뿐이다. 15.21ㄱ 참조. 21ㄴ절 참조 “살 것입니다”는 “거처를 만들겠습니다”를 의역한 것이다. “거쳐”는 14.2와 관련된다. 따라서 “머문다” 또는 “거처한다”보다 깊은 의미를 지닌다. 구약성서에도 하느님이 당신 백성과 함께 “거처하신다”란 표현이 나오는데, 숭배적 의미나 종말 약속을 기다리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느 영적 방식으로 공동체안에 현존하는 의미로 언급된다. 제자들은 예수가 있는 곳 하느님의 사랑안에 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에게 간다”란 표현도 8절과 관련된다. 제자들과 내적 결속관계를 맺고 있는 예수와 함께 아버지께서도 그들에게 가서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의 공동체 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공동체 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 공동체 삶은 천상세계에서 비로소 볼 “영광”을 기다리며 아버지께서 영예롭게 해주실 것을 희망하는 삶이다. 24절 제자들에 대한 경고라기보다는 유다의 질문에 대한 간접적 대답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은 예수의 말들을 듣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예수를 사랑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므로 예수는 그런 세상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고 드러내 보이고 싶지도 않다는 것이다. 예수와 유다인들의 논쟁에서 주로 볼 수 있는 항의를 시사한다. 믿지 않는 세상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예수 자신을 그런 세상에 드러내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은 불평할 수 없다는 뜻이다. 제자들에게 말한 것이므로 예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의미도 있다. 25절 성령의 활동과 관련지어 예수의 지상적 계시활동을 강조한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계시하고 가르친 말을 일단락짓고,이제 이별의 시점에 이르게 되었음을 시사한 표현이다. 26절 “협조자”가 바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고백한 “성령”임을 명시한다. 이 성령은 예수의 “이름으로”아버지께서 보내 주신다고 함으로써 성령의 파견이 아들의 파견에 연계됨을 시사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파견하셨듯이 이제 성령도 파견하신다는 뜻이다. “내 이름으로”라는 표현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협조자”의 파견을 원하고 그 파견을 아버지께 청했다는 뜻을 함축한다. 예수 대신 앞으로 가르쳐주고 예수의 모든 말을 상기시킨 “협조자”의 역할을 설명한다. “가르친다”란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계시행위를 뜻한다. “협조자”는 새로운 가르침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계시를 계속 이행한다. “상기시킨다”는 말은 요한복음의 중요한 용어로서 과거를 해석하고 현재화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협조자” 성령의 임무는 예수의 계시 내용을 증언하면서 더욱 심화하고 실현하는 일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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