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0 부활 제5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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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19 | 조회수1,725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성령과 우리는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주해 사도회의에서 안티오키아로 편지를 보내다15.1.21에 소개된 사도들과 원로들의 결정 과정은 예루살렘 교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 문서 형식으로 지역교회들에 전달된다. 서신 형식으로 전해진 이 문서의 내용을 안티오키아 교회의 신도들은 크게 반긴다. 22절 야고보의 결정은 예루살렘 모교회 전체에 받아들여졌고 자체 내에서 둘을 뽑아 바오로. 바르나바와 더불어 안티오키아로 파견했다. 이들의 역할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경의를 표하고 예루살렘 지도부의 권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중에 예언자들로 소개되는 두 사절 가운데 하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결별한 후 바오로의 새동료가 된 실라였다. 실라는 바오로의 중요한 협력자였던 실마노의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유다 바르사빠에 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없다. 혹시 1.23에 나오는 요셉 바르사빠의 형제가 아닌지 모르겠으나 바르사빠라는 이름이 하고 흔해서 이를 확신할 수 없다. 실라는 바오로의 여행 동반자인데, 일반적으로 1.2 데살 1.2에서 두 서간의 발신자로 드러나고, 2고린 1.19에서는 고린토에서 바오로와 디모테오와 함께 설교하던 실바노와 동일시된다. 1베드5.12에서는 저자가 실바노를 이 서간의 필경사로 밝힌다. 실라는 히브리 이름 세일라의 그리스어 번역이고 실바노는 그것의 라틴어 번역이다. 23절 직역: “그들의 손으로”. 디아 케이로스는 “...에 의해서”로 번역되는 칠십인역의 표현으로 2.23; 5.12; 7.25; 11.30; 14.3에도 나온다. 여기서는 이 편지가 이들 손에 의해 씌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 전달되었다는 뜻이다. 바오로가 시리아와 길리기아에 선교활동을 벌였다는 언급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러나 루카는 이 지방의 선교가 바오로의 도움으로 이루어졌음을 당연한 사실로 여긴다. 사도들과 원로들이 써보낸 편지는 이 세 지역 교회에만 해당되는 것은 물론 아니고 온 교회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 편지가 실제로 전달된 곳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함께 모여 이룬 혼합 공동체였지 순수하게 또는 대부분이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들은 아니었다. 24절 “우리 가운데 몇몇”은 예루살렘 지도부로부터 정식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권위가 없었다. 루카의 이 묘사는 바오로의 서간과 내용이 일치한다. 25절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더불어 유다와 실라를 지역교회들에 파견하기로 한 것은 예루살렘 지도부의 공식 결정이엇었기 때문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수구파 유다인들과는 달리 이들은 교회의 권위를 지니고 있다. 26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숨을 내놓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가 바오로와 바르나바에게 붙여준 영예로운 칭호다. 28절 독자는 이 규정들이 무엇인지 알지만 이 편지가 전달되는 지역교회들은 아직 그것을 모른다. 성령과 사람 활동이 함께 협력하는 또 다른 예에 대해 13.1-1 참조. 29절 “지키다”는 칠십인역에서 “계약이난 계명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통한다. 31절 이 편지는 그들에게 격려가 되었다. 그 내용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받지 않은 상태로 있으면서도 완전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에 영입될 수 있다는 위로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복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주해 12절 예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된다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다. 즉, 그 “계명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인 계명으로 요약된다. 이 사랑의 계명은 그것을 지킴으로써 예수의 참된 제자임을 드러내는 핵심 계명이며, 예수가 제자들을 사랑한 모범적 사랑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 사랑의 계명은 9절도 설명한다. 즉, 예수를 통해 이미 제자들에게 드러난 사랑에 근거한 계명으로 강조된다. 13절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사랑의 최고 실증이라는 일종의 격언이다. 이 말은 14-15절에 연결되어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친구관계로 설명된다. 문맥상 예수의 사랑을 가장 값진 친구 사랑으로 시사할 뿐 아니라, 목숨까지 바치는 예수의 헌신적 사랑을 모범으로 제시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그런 사랑을 실천할 준비를 갖추도록 촉구하는 의미도 지닌다. 14절 예수와 제자들의 새로운 관계를 시사한다. 예수는 하느님과 자기 앞에서 “종”으로만 여겼던 제자들은 “친구”로 생각하게 이끌고 동시에 그런 관계를 선사한다. 15절 제자들은 예수가 행한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선택되었을 때 이미 예수의 “친구”였다는 뜻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을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 대해 강압적인 주종관계가 아니라 자유롭고 선의에 가득 찬 친구관계로 선택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우정관계의 주도권은 예수에게 있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들은 모든 것을 제자들과의 우정관계 속에서 계시했고 또한 아버지의 사랑도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계시는 제자들을 종이 아니라 친구관계로 머물도록 자유롭게 한다. 16절 예수의 주도권을 시사하고 동시에 제자들에게 예수와의 우정관계가 선물임을 일깨운다. 제자들의 임무수행을 파견사상의 맥락에서 언급한다. 이 임무수행은 예수에게 무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의식에서 솟아나고 예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떠나)가서 열매를 맺는다”란 표현은 문맥상 촉구하는 뜻이다. “그 열매가 남아 있다”란 예수 자신과 그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맺은 “열매”는 사람들 가운데서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하느님의 사랑을 가리킨다. 예수와의 결속관계에서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 그 청을 들어주신다는 확신과 약속이다. 즉, 예수는 제자들에게 “(언제나) 남아 있는 열매”를 원하고, 제자들의 그런 간청은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고 약속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제자들이 열매를 맺도록 예수 자신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한다. 17절 12절이 거듭 강조된다. 즉, 제자들에게 열매를 맺도록 당부한 예수의 훈계 또는 경고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에서 절정을 이룬다. 예수 안에 머물러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비유말이 제자들을 친구로서 예수의 사랑을 그들도 서로 나누어야 한다는 말로써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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