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6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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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25 | 조회수1,414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도 가졌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네리는 서른여섯 살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트리오 수도회를 설림한 그는 1595년 선종하였고, 1622년 시성되었다. 제1독서 <바오로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을 하였고, 회당에서 토론을 하였다.> 주해 1절 옛 고린토 시는 기원전 146년 로마의 뭄미우스에 의해 완파되었지만 율리우스 체사르가 새로 완전히 재건하여 로마인들을 정착시키고 콜로니아(로마시민의 정착지)로 삼았다. 기원전 27년에 고린토 아카이아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항구도시로서 고린토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수많은 인구를 끌어들였다. 이 도시는 성적 부도덕과 각종 우상숭배로 좋지 않은 평판을 지니고 있었다. 2절 아퀼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킬라는 언제나 함께 언급된다. 고린토 친서나 사도행전에서 그들의 개종에 대해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로마에서 추방당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그리스도인 추방령은 49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 연대는 바오로의 생애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3절 그리스-로마 시대에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공조체제를 이루는 일은 흔한 현상이었다. 천막 만드는 일은 천막 이외에 가죽제품을 만드는 일도 포함한다. 바오로는 손수 일을 함으로써 생계를 꾸렸는데 이런 생활태도는 지혜의 스승들 사이에서 이상적인 삶의 자세로 통했다. 적어도 랍비들 가운데 이런 관습을 엿볼 수 있었다. 4절 여기서 디아스포라 유다인 회당은 그 안에서 성서에 관한 학문적 토론이 벌어지는 “공부의 집”을 이용되고 있다. 바오로는 습관대로 새 도시 아테네에 들어와 제일 먼저 유다인 회당에 들렸다. 5절 다른 대목에서처럼 여기서도 “말씀”은 설교의 임무를 간단하게 요약한 낱말이다. 마케도니아에서 디모테오가 아마도 헌금을 바오로에게 가져옴으로써 바오로가 잠시 일손을 멈추고 설교에만 전념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6절 옷의 먼지를 터는 행위는 맞배척을 뜻한다. “당신들의 피가 당신들 머리 위에”라는 표현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뜻을 지닌 정식으로 2사무 1.16; 1열왕 2.33에서 유래한다. 이 선언으로 사도행전의 독자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잘못으로 구원을 가로막았고 따라서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선포가 필연적것이었음을 느끼지 않고 이방인들에게 선교의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다. 7절 리디아의 경우처럼 새로운 공동체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8절 회당장 그리스보는 1고린 1.14에서 바오로가 가이오와 더불어 세례를 준 사람이다. 사도행전의 기록과는 달리 고린토 서간에는 바오로가 이 두 사람의 스테파나 집안 이외에는 고린토에서 아무에게도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말한다. “온 집안”이라는 표현에 대해 10.2; 11.14; 16.15.31 참조. 복음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주해 16절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조금 있으면”이란 말은 예수 죽음의 시간을 가리킨다. 일부 사본에는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이 추가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을 뜻한다. 23-25절에 기쁨이 충만한 교회시대가 시사된다. 따라서 여기 “조금 있으면”은 예수의 부활 발현은 물론 성령강림도 내포한다. 존재의 차원을 달리한 채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속적 기쁨이 함께한 부활시간은 신앙공동체 안에 계속되기 때문이다(22-23절 참조). 18절 예수의 말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와 당혹을 시사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직접 묻지 않고 자기네끼리 서로 말한 것은 슬픔의 표시다(5-6절 참조). 19절 예수의 정체를 묘사한 요한복음 특유의 표현이다. 예수의 이런 모습은 나중에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고백된다. 여기서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응답보다 예수의 주도권이 강조되고 예수의 말에 주의를 요하는 데 기여한다. 20절 제자들(신앙공동체)과 “세상”을 이원론적 관점으로 언급한다. 제자들의 슬픔과 세상의 기쁨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으로 인한 것이다. 세상은 이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 기뻐할 것이고, 제자들은 그런 세상에 남아 있게 되어 슬퍼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자들은 위로하고 약속하는 말로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는 계기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예수를 다시 보는 데 있다. 예수의 이 말로 인해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은 해소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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