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8 부활 제6주간 토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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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27 | 조회수1,063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아폴로는 성경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논증하였다.> 주해 23절 안티오키아는 바오로를 언제나 지원한 고향 같은 공동체였기에 이곳에 꽤 오래 머물렀다. 바오로는 이곳을 늘 선교의 근거지로 삼는다. “차례로”는 바오로 자신이 전에 창립한 지역교회들에 조직적인 사목방문을 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런데 루카가 바오로의 행선지를 나열하면서 왜 여기서는 16.6과 달리 갈라디아 지방을 프리기아보다 먼저 말하는지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다. 24절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 자신이 이집트에 건립한 도시다. 건립되자마자 이곳은 즉시 거대한 도시로 탈바꿈했다. 훌륭한 박물관과 도서관을 갖춘 이 대도시는 고대 지중해 세계에 학문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고, 특히 칠십인역 그리서 성서를 비롯하여 찬란한 헬라 유다계 문학을 꽃피웠다. 유다인 필로는 이 문학이 가장 중요한 대변자다. “아폴로가 성서에 능통했다”는 묘사는 성서를 바탕으로 유다인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게 되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아폴로의 이 탁월한 성서해석 능력은 히브리서가 그의 저서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헬라계 유다이즘과 맥을 같이하는 이 서간의 세심하고 유려한 수사학적인 논증들은 대부분 성서해석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25절 서방 사본군은 이 구절 첫 부분을 “그가 자기 고향에서 주님의 말씀을 배웠고”라고 약간 달리 소개하여 아폴로가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종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런 소개조차 없다면 이집트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어떻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아폴로는 아직 성령의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예수에 관해 정확하게 가르쳤다. 루카에게 요한의 세례는 언제나 예수와 연결된 성령의 세례를 준비하는 전단계다. 26절 서방 사본군은 여성의 역할을 낮추기 위해 아퀼라를 브리스킬라보다 앞에 놓는다. 루카는 그들이 아폴로에게 가르친 내용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으나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 성령의 세례에 관한 가르침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7절 아폴로가 아카이아로 건너가려 했다는 기록은 에페소에 이미 유다인 그리스도교로 공동체가 존재했음을 뜻한다. 28절 성서에 근거한 논증은 이미 바오로가 데살로니카에서 시도한 바 있다. 고린토 공동체가 유다인 회당과 결별했기 때문에 아폴로는 더 이상 그곳에서 유다인들의 비위를 맞추는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복음 <아버지께서는 너희를 사랑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믿었기 때문이다.> 주해 23ㄴ절 예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기쁨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인해 그들이 번민한 문제나 의심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로 인해 파견된 “협조자”의 역할이 함축되어 있다.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약속이다. 이 약속은 제자들의 충만된 기쁨에 대한 약속에 직결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더 물을 필요가 없게 된 이유도 시사된다. 제자들은 직접 아버지께 향할 수 있고 기도 가운데 모든 어둠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들의 문제나 질문은 아버지께 기도함으로써 받아들여져 풀린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기쁨을 누리는 제자 실존의 상징이요 표지다. “내 이름으로”라는 말은 아버지께서 제자들이 예수에게 속해 있음을 고려하신다는 것을 뜻한다. 또는 아들 예수는 아버지와 일치된 행동을 언제나 하기 때문에,“예수를 대신해서”라는 의미도 있다. 24절 제자들이 의기소침과 몰이해 가운데 있던 시간을 가리킨다. 기쁨에 찬 시간과 대조된다. 14.13-14 참조. 여기서는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기도하도록 격려하고 당부하는 의미가 시사된다. 제자들이 “이제까지” 예수의 “이름으로”기도하지 않았던 것은 예수가 아직 영광스럽게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예수의 “이름으로”바친 제자들의 실존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자유로이 청할 수 있고 아버지께서 들어주심으로써 더욱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25절 예수의 고별담화가 끝나감을 시사한다. “수수께끼”로 표현된 예수의 현재적인 말과 “분명하게 알려주는” 예수의 미래적인 말이 우선 대조된다. 대조의 역점은 후자에 있다. 제자들에게 아직도 감추어진 채 표현되는 신비스런 수수께끼 같은 말이 분명하게 두루 알려질 “시간”이 온다는 것이다. 문맥상 이 일은 “협조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의 역할로 강조된 예수의 지상 계시와 부활 이후에 이해되는 그 계시의 연속성을 말하고자 하는 신학 사상을 반영한다. 당시 제자들에게 말한 예수가 이제 들여높여져 현존하면서 신앙공동체에 계시한다는 것이다. 즉, 부활한 예수는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말하고 제자들 즉, 부활한 예수는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말하고 제자들, 곧 신앙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영적으로 말하고 제자들. 곧 신앙공동체는 성령이 예수의 복음을 자기들에게 설명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또한 스스로 그 말씀을 다시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학적 관점은 금세기에 문제점으로 대두된 이른바 역사상 예수와 신앙상 그리스도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다소나마 해답을 준다. 하지만 그 신학사상적 긴장은 여전하다. 이 구절의 내용은 지상 예수와 신비스런 계시말들이 부활 이후에 명백하게 드러난다는 데 역점이 있고, 지상 예수와 부활한 그리스도의 동일성 관계 문제는 당시에는 낯선 신학적 주제였기 때문이다. 26절 25절에 언급된 “시간”, 곧 예수의 부활 이후를 가리킨다.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결속관계를 시사한다. 23-24절 참조. 여기서는 청을 들어준다는 약속의 관점이 아니라 아버지께 직접 청할 수 있다는 관점으로 언급된다.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중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27절 예수의 중재가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제시한다. 이 말은 “그 날에” 아버지의 충만한 계시가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데도 상응한다. 제자들이 예수와 일치된 결속관계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바로 이런 관계 안에서 제자들은 아버지에게 친히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고 또한 예수의 “이름으로”아버지께 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15.15-16 참조). 28절 요한복음의 그리스도론에 따른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길”을 요약한 말로서 예수의 활동들을 신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적 배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다는 점을 강조한다. 바로 그 아버지께서 친히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그분께 직접 기도한다는 것이다. 또한 예수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고, 그것은 제자들에게 “이롭다”것도 시사한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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