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9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청소년 주일)...독서,복음(주해) | |||
---|---|---|---|---|
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5-28 | 조회수819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청소년 주일) 한국 교회는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낸다. 청소년들이 우정과 정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며 자라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교회가 그들과 함께하며,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그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교회의 다짐이기도 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5년 주일 수난 성지 주일에 ‘세계 젊은이의 날’를 제정하였는데,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이날로 지내 왔다. 1993년부터 ‘청소년 주일’로 이름을 바꾸어 지내고 있다.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주해 1절 루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헌정받은 데오필로를 가상의 그리스도인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으나, 이 이름의 상징적 해석은 3세기 오리게네스 이후부터 발견되기 때문에 실재인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데오필로는 합성명사로서, 풀이하면 “하느님의 사랑받는 사람” 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당시 관습대로 루카의 두 저서를 헌정받은 데오필로에게는 필경사들을 구해 두 작품을 복제하고 판로를 개척할 책임이 있었다. 그는 입교 예비가 아니면 갓 입교한 교우였을 것이다. 2절 루카는 예수시대의 “처음”을 그분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때로 본다. 그리고 예수시대의 마감은 승천으로 생각한다. 사도 1장은 예수시대와 교회시대를 자연스럽게 연결짓는 역할을 한다. 성령은 루카의 저서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다. 사도들이 성령을 통해 곧 하느님의 직접적 중재를 통해 예수께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권위를 한층 높여준다. 루카는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처음부터 승천 때까지 목격한 이들만 사도로 보았다. 열한 사도가 그랬고 유다 이스가리옷의 자리를 물려받은 마티아가 그랬다. 예수의 활동성을 다 목격하지 못한 이는 아무리 위대해도 루카는 사도로 여기지 않았다. 예로 바오로를 무척 존경하면서도 사도라고는 하지 않았다. “숭천하시다”는 직역하면 “들어올리다”의 수동형 “들어올려지다”이다. “들어올려지다”까 “승천하다”의 뜻으로 사용된 경우는 2.11.22절이고 이 동상의 명사형 “들어올려짐”이 승천의 뜻으로 사용된사례는 루가 9.51. 3절 예수께서 부활하신지 “사십 일”만에 승천하셨다고 하는데 40은 루카가 나름대로 만들어낸 숫자일 것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부활하고 곧바로 승천하신 후 사도들이 자신들의 독단적인 생각과 능력에 따라 교회를 창립하고 선교홀동을 벌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예수의 가르침을 받고 성령을 받기 위한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그들의 스승인 예수 자신도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준비기간을 가지셨던 것이다. 4절 4-5절의 내용과 “아버지의 약속”이란 표현은 루카 24.49에서 따왔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여러분에게 보내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높은 데서 오는 능력을 입을 때까지 이 도성에 머물러 있으시오” “아버지의 약속”과 “높은 데서 오는 능력”은 다같이 성령을 뜻한다. 5절 이미 세례자 요한이 지금 자신이 베푸는 물세례와 장차 메시아가 베푸실 성령세례를 대비한 적이 있다. 5절과 거의 같은 말씀이 11.16에도 나온다.
6절 종말이 되면 다윗의 왕국이 재건된다는 예언이 있었다. 그리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이 쏟아져 내려오는 현상을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표지로 여겼다. 따라서 아버지의 약속과 성령세례에 대한 예수의 말씀을 들은 사도들이 종말에 이루어질 다윗왕국의 재건과 성령강림을 연결시켜 예수께 “지금 이 때 이스라엘을 위하여 나라를 재건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드린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그들의 질문에는 종말임박사상과 민족주의가 엿보인다. 7절 사도들은 성령강림 때 다윗의 왕국이 재건되리라는 임박한 종말 사상에 젖어 있었는데,예수께서는 그것을 바로잡으신다. 종말은 그처럼 임박하지 않았다. 땅 끝까지 복음이 선포된 다음에야 종말은 온다. 종말의 시기는 하느님만이 아신다. 루카는 자신의 공동체를 위해 이 기적을 남겼다. 제자들로 대표되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시기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는 소임에 관심을 쏟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8절 사도행전은 모두 증인들의 증언활동을 서술한 책이다. 곧, 증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다와 사마리아를 거쳐 마침내 제국의 수도 로마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며 증언한 것을 서술한 책이다. 그러나 예수께 관한 증언은 로마에서 끝나지 않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계쏙 추진될 것이다. 9절 “구름”은 하느님이 모습을 드러내신 때 또는 그리스도께서 모습을 드러내신 때에 으레 등장하는 소재다. 유다 묵시문학에선 장차 종말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고 기대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인자로 여긴 까닭에 장차 종말에 예수께서 구름에 싸여 오신다고 믿었다. 사도행전의 승천기도 예수께서는 구름에 싸여 승천하고 또한 구름에 싸여 재림하시리라고 서술한다.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주해 17절 “당신을 (참으로) 알아보게 하는 지혜와 계시의 영”: 하느님에 대한 참 지식이란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신비. 무엇보다도 모든 인간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포괄하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다. 18절 18-19절의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은 하느님의 권능.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체험을 포함한다. “마음의 눈”: 구약성서적 표현이다(시편 13.4: 19.9 참조). “성도들 사이에서”: 깨달음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체득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20절 20-21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당신 오른편에 앉히신 하느님의 보좌는 온갖 영적 세력보다 훨씬 높은 “하늘”에 있다. 3.10; 6.12를 보면 권력과 권세 등의 영적 세력들도 이 “하늘”에 있다. 이렇게 에페소서에서 “하늘”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다. 하느님의 힘을 드러내는 부활의 힘으로 그리스도는 온 누리의 주님이 되셨다(시편 110.1 참조). 21절 그리스도께 주어진 주권에 관해 공감적 표현이 많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하늘의 가장 높은 곳으로 현양되었으며 지금은 하늘의 영적 존재들까지 “그 아래”에 있다. 만물이 “그 아래”에 있다는 것은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뜻한다. 21-22ㄱ절은 필립 2,9-11과 내용이 상당히 합치한다. 6.12를 보면 “권력”들은 적대 존재로 파악되는데,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적대세력을 제압한다는 말은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메시아임에 틀림없다. 10절에서처럼 여기서도 공간적 요소와 나란히 시간적 요소가 나온다. “두 세대(에온) 도식”이 배경이다. 22절 이 말씀이 시편 8.7에서는 피조물 가운데서의 인간의 높은 품위의 표현이었지만 바오로 서신에서는 “현양되는 그리스도”에 적용된다. 이 서편 인용은 칠십인역과 달리 1고린 15.27과 문자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1고린에서는 권세들의 굴복이 아직 완결되지 않은 종말 드라마에 속하는 데 반해, 여기서는 그 굴복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본다. 23절 우주적 전망이 교회론적 전망으로 이어진다. 에페소서의 “교회”에 관한 특별한 관심이 엿보인다. 당대의 교회는 숫자걱으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미미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자칫 패배주의 유혹에 빠지기 쉬웠을 것임을 감안하면서 이 구절을 읽을 필요가 있다. “그분을 교회에, 만물 위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4.15-;5.23에서 말하는,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시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며 하늘로 올라가셨다.> 주해 47절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으나 이제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47절)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예수의 구원사건을 선포할 것이다. 사도들은 “모든 민족”에게, 곧 이방인들에게도 선포할 것이다. 일찍이 요한 세례자도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선포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도 “죄사함을 위한 회개”를 선포하겠는데 “그분의 이름으로”선포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요소다. 48절 사도들은 예수사건, 특히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될 것이다. 49절 “아버지의 약속”과 “높은 데로부터 힘”은 다같이 성령을 뜻하는데, 사도들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받을 것이다. 50절 여기서는 “베다니아 근처”에서, 사도 1.12에서는 “올리브라고 하는 산”에서 승천하셨다 한다. 루카는 표현만 달리했지 같은 장소를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베다니아는 올리브 산 동편 비탈에 있는 마을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셨다는 소재는 여기와 엠마오 발현사화에만 있다.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해 주셨다”는 대제관 시몬이 제사를 바치고 나서 손을 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해 준 사실과 흡사하다(비회 50.20). 51절 51ㄴ절은 파피루스 75호. 바티칸 사본과 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있으나 시나이 사본 본문과 서방 사본군에는 없다. 루카는 예수 승천을 언표할 때 “올려지셨다”,“맞아들여지셨다”,“치켜지셨다”라 한다. 52절 “그분께 잎드려 절한 다음”은 파피루스 75호. 시나이,바티칸,알렉산드리아 사본에는 있으나 서방 사본군에는 없다. 대제관 시몬이 하느님의 축복을 빌 때도 이스라엘 백성은 엎드려 절했다고 한다(집회 50.21). 53절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의 처신을 기술할 때도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양했다 한다.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소재가 집회 50.22에도 있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