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2 부활 제7주간 목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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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6-01 | 조회수789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제1독서 <너는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주해 30절 천부장은 바오로를 직접 데리고 의회에 나와서 유다인들이 왜 바오로를 고발하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리고 이 천부장의 의도는 23.29에서 실현된다. 23.6절 사두가이파에 대해 루카는 복음서에서 한 번만 언급하는 데 한해 바리사이파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한다. 바오로는 처음으로 자신이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밝힌다. 그는 과거에 바리사이파에 속했던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현재 바리사이파 사람임을 분명히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바오로는 자신의 문제를 의회 내에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 사이의 분쟁으로 자연스럽게 발전시킨다. “죽은 자들의 희망과 부활”이라는 표현 안에 바오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일반적인 부활 신앙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다. 7절 24.5에서는 바오로가 모든 유다인에게 소요를 일으킨 자로 고방당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발언이 단순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을 따름이다. 한편 바오로가 주장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 교리를 바리사이들이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를 유다교 전승에 변함없이 충실한 사람들 무리에 속하게 한다. 8절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두가이들은 인간이 영원히 육체와 더불어 멸망한다고 주장하면서 내세의 삶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서에도 나오는 천사들의 존재를 과연 부정할 수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요세푸스도 영과 천사에 대한 사두가이들의 견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부활에 대한 바리사이파의 믿음은 마카베오 시대에 발전된 전승에 기초한다. 미슈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율법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는 내세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 부활의 교리를 분명하게 선포한다, 9절 바오로의 말에서 바리사이들은 어떤 초월적 체험을 기꺼이 인정하는 한편 사두가이들을 공격하기 위한 기회를 찾으려 했다. 이런 바리사이들의 태도는 바오로가 의도한 바였다. 그들은 문제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는 관계없는 논쟁에 휘말려들게 되었다. 10절 천부장은 최고의회 역시 성전 앞뜰에 모인 군중 못지않게 질서를 상실한 것으로 판단하여 22.24에서처럼 경비병을 보내어 바오로를 안전하게 병영으로 끌어들이도록 명령했다. 11절 바오로는 자시 소명의 방향을 결정지어 주는 환시를 자주 보게 되는데 이는 주님이 바오로의 증언을 인정하신다는 뜻이다. “해야 한다”는 비인칭 보조 동사는 사건 안에서 필연적으로 실현되어야할 하느님의 계획을 가리킨다. 여기서 바오로가 본 환시는 온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까지 가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게 되는 일이 이미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해 준다.루카는 교회의 길이 바오로의 선교활동을 따라 예루살렘에서부터 로마에까지 이어질 것임을 시사한다. 복음 <이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해 20절 지상 예수와 함께한 제자들을 가리킨다.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을 전제한다. 즉, 제자들은 예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자기네 입으로 선포한다. 예수 부활 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상황을 시사한다. 즉, 예수는 제자들의 복음선포로 인해 믿게 된 모든 이, 곧 그리스도의 참된 공동체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하고자 한다. 21절 공동체의 일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에 그 근원이 있고,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 안에 그 공동체가 받아들여짐으로써 일치를 이룬다는 뜻이다. 이 원칙이 예수의 기도에 표현되고, 예수는 그런 일치를 아버지 하느님께 전구한다. 이 일치는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또한 가능하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는 믿는 이들의 일치를 위한 원형이요 모범일 뿐 아니라 알치를 가능케 하는 원인이요 삶의 터전이다. 그러므로 이 일치는 하느님의 선물인 동시에 공동체가 실제로 일치를 나누어야 할 임무다. 이것은 사랑의 계명과 그 맥락을 같이한다. 공동체의 일치는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세상으로 하여금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를 믿도록 이끄는 일치로서 공동체의 일부와 함께 더욱 명료하게 언급된다. 공동체는 하느님과 결속된 실존 안에서 하느님을 멀리한 인간세계를 위해 증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여기서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의 구원행위가 미칠 수 있는 대상으로 시사된다. 이 내용은 예수가 세상을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전주하지 않는다는 말과 상충되는 듯하지만, 그 관점이 다르다. 여기서는 세상에 대한 복음선포적 관점이 강조된다. 아마도 요한 교회의선교에 대한 관심사가 반영된 듯하다. 22절 예수가 아버지 하느님에게 받은 “영광”을 제자들에게 준 목적이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것으로 언급된다. 이 일치가 예수의 기도에 언급됨으로써 예수 기도의 근본 관심사로 시사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이란 표현으로 그 일치가 하느님 실존의 표지로서 강조된다. “영광”은 여기서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을 가리킨다. 이 생명은 예수의 계시활동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에게(믿는 자들) 이미 주어졌으나, 천상세계에서 완전히 누리게 된 종말론적 생명, 곧 “영광”이다. 23절 하느님과 하나된 예수를 통해 제자들은 하느님의 일치, 곧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동체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관점이 다르다. 예수가 제자들안에 있고 하느님이 예수 안에 계심으로써 하느님의 일치가 그들에게 주어지고 완전히 이루어진다. 즉 일치는 예수로 말이암아 현재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 곧 완전한 일치는 종말의 목표요 목적이다. 또한 이 일치는 예수가 하느님께 전구함으로써 하느님의 선물로 시사된다. 신앙공동체는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예수로 말미암은 일치의 신비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체험하고 또한 세상에 보여주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이다. 공동체의 일치가 세상으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는 동기로 시사된다. 24절 원문에는 선행사 없이 중성 관계대명사만으로 표현되어 있으니, 2절과 동일하므로 “제게 주신 자(모두) 그들”이라고 의역할 수 있다. 12,26; 14.3 참조. 5절 참조. 여기서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해 예수에게 이미 주어진 영광으로 강조된다. 예수가 아버지께 청원하는 것은 믿는 자 모두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천상에서 봄으로써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일이다. 즉, 종말론적 구원의 완성을 뜻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과 직접적 관련은 없고, 사후세계와 더 관련된 약속이다. 예수가 지상에서 믿는 자들에게 준 “영광”은 천상적 영광을 미리 다소나마 체험하게 해주는 일시적 선물이다. 25절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심판과 관련된 존칭일 수도 있고, 믿는 자들에 대한 호의나 자비에 관련된 존칭일 수도 있다. 문맥상 후자가 더 타당하다. “거룩하신 아버지”와 같을 수 있고 곧이어 26절에서 아버지의 사랑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세상과 예수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믿고 믿는 자들을 대조할 뿐 별다른 의미는 없다. 믿는 자들을 더욱 드러내기 위한 대조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받을 만하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언급은 26절에서 계속된다. “저는 당신을 알았습니다”란 말이 이색적으로 언급된 것은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알았고 또한 하느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26절 예수 자신이 계속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줄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 계시의 연속성을 가리킨다. 계시와 결속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지속적 중재를 시사한다. “저 또한 그들 안에 있으리라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예수가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 사랑의 중재자요,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교량일 뿐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의 항구한 현존임을 가리킨다. 지상 공동체는 그리스도 현존 가운데 천상적 목적을 향해 계속 완성애로 성장해 간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개신교를 다니는 아주 열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권사님에 대해서 잠깐 말해볼까 합니다. 어느날인가부터 나하고 식사를 할 때면 성호경을 올바로 긋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러한 분에게 성부,성자,성령에 대해서 말을 해주었습니다. 어느날인가부터는 “아차 내가 성호경 안 했지.”하며 다시 처음부터 성호경을 긋고 식사를 합니다. 내가 성당을 안나가고 지내면 “성당 왜 않다녀왔어.”라고 꾸중도 합니다, 저하고 나이차이는 열 살정도 덜 먹었습니다. 어느날인가는 내가 어디가 좀 아프다고 하니까 권사님은 기도를 해줍니다. 그런데 무엇이 이상하다고 봐야 할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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