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3(금)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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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6-02 | 조회수844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가롤로 르왕가 성인과 그의 동료 성인들은 아프리카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다. 우간다를 비롯한 동아프리카 지역에는 19세기 말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왕궁에서 일하던 가롤로 르왕가는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은 뒤,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며 궁전의 다른 동료들에게도 열성적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왕조가 들어서면서 배교를 강요당하던 그와 동료들은,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1886년 6월에 살해되었다. 1964년 바오로 6세 교황은 우간다 교회의 밑거름이 된 이들을 ‘우간다의 순교자들’이라고 부르며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주해 13절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빠 2세는 헤로데 대왕의 증손자로 27년에 태어난 100년에 죽었다. 글라우디오 황제의 명으로 아버지 아그리빠 1세의 왕국을 물려받았고, 레오 황제로부터 팔레스티나 여러 도시의 주권을 넘겨받았다. 유다 항쟁 동안 내내 로마인들에게 매우 충실한 식민지 군주로 행세했다. 베르니게는 아그리빠 2세의 한 살 아래 여동생으로 남편이 죽은 뒤 오빠의 궁전에 들어와 살았다.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둘 사이의 친밀한 관계까 좋지 않은 소문거리로 나돌기도 했다. 14절 루카는 페스도의 사건 요약을 통해 목자들에게 이 사건의 전체적 윤곽을 다시 한번 파악하도록 유도한다. 16절 로마법에 의하면 피고발자를 보호 없이 고발자에게 넘겨주지 못하며, 피고발자는 스스로 변호할 권리가 있고 그 변론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다. 유다인들의 왕 아그리빠에게 로마의 재관관습을 설명해 주면서 페스도 총독은 은연중 민족적 우월감을 드러낸다. 18절 루카는 제3자로 하여금 바오로의 무죄를 다시 한번 선언하게 한다. 바오로는 페스도가 염려한 것처럼 공공질서를 어지럽힌 폭도가 아니라 유다 지도층 내부의 신학적 논쟁에 본의아니게 휘말려든 사람이었다. 19절 부활과 관계된 신학적 논쟁은 페스도의 판단능력을 뛰어넘는 문제였다. 루카는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자인 예수의 부활을 이방인인 로마 총독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독자에게 주지시킨다. 20절 로마의 고위직 관리가 스스로 어떤 문제에 대해 재판 능력이 없다고 인정했다는 사실은 바오로 사건이 위험한 범죄 행위와 관계없는 유다인들 내부의 종교적인 논쟁과 얽혀 있는 문제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주해 15절 12-13절과 연결하는 편집자의 묘사다. 부활한 예수와 시몬 베드로의 이른바 특별대담이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가운데 먼저 베드로에게 발현했다는 전승과 관련된 듯하다. 일부 사본에는 “요나의 아들”로 되어 있다. 아마도 마태오복음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하지만 “요한의 아들”은 요한복음의 고유한 표기다(1.42 참조). “이들보다” 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예수와 베드로의 관계가 특별히 큰 사랑의 관계라야 함을 전제하고서 그런 사랑의 준비태세를 묻는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베드로만이 예수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고 따르겠다고 장담한다. 바로 그런 베드로의 태도를 상기시킨 듯하다. 두 번째와 세번째 물음에는 비교급없이 표현된 점에 유의해 볼 만하다. 예수의 물음에 대한 긍정적 대답을 신뢰에 가득 찬 겸허한 자세로 표현한다. 베드로의 사목권이 “목자와 양들”비유의 표현으로 부여된다. 그런데 첫 번째와 세 번째 위임에서는 “먹여 기르시오”로, 두 번째 위임에서는 “지켜 돌보시오”로 표현되지만, 내용상 차이는 없고 표현을 달리함으로써 오히려 목자가 해야 할 일을 총체적으로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어린양들”과 “양들”이란 표현도 마찬가지다. 예수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총칭한다. 부활한 예수는 자기에게 속한 신앙공동체를 돌보도록 시몬 베드로에게 위임한다. 시몬 베드로는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예수와의 결속관계 안에서 지키며 보호해야 한다. 사도 20.28; 1베드 5.2; 에페 4.11 참조. 그리스도는 여전히 “목자들의 으뜸”이고 목자의 역할은 양들을 보호하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목자는 양들을 지키고 돌보며 이끈다. 17절 부활한 예수가 베드로에게 세 차례나 묻는 것은 우선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상기시키고 또한 베드로를 의심하는 것으로 시사된다. 베드로가 “슬픔에 빠져”있었다는 것은 베드로의 부끄러움과 슬픔을 가리키며 회개를 뜻한다. “모든 것”이란 표현은 베드로가 모든 자기확신을 포기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즉, 부활한 예수에게 전적으로 신뢰하며 자기 자신을 내맡기는 베드로의 겸허한 자세가 표현된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에 대한 사랑을 다짐받으면서 그때마다 부활한 예수의 “양떼”를 돌보도록 위임받는다. 즉,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것을 모두 용서받고 예수의 제자로서 받아들여진다. 베드로에게 부여된 임무는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는 “목자들의 으뜸”으로서 또한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로서 이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베드로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양떼”전체의 사목에 역점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수위권이 시사된 마태오복음과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베드로의 선교 임무나 다른 제자들에 대한 우위권이 명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교황직에 관련하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많은 논쟁이 되어 왔고, 또한 교회일치 차원에서도 그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18절 일종의 비유로서 60년대 중반의 베드로 순교를 시사한 이른바 사후예언이다. 문맥상 “나를 따르시오”라는 촉구와 함께 베드로가 지상에서 예수를 대신하여 양떼를 돌보듯이 예수의 십자가상 죽음에도 동참하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활한 예수는 이제 베드로의 확고한 자세를 받아들인 셈이다. 19절 베드로의 순교. 곧 십자가상 죽음을 가리킨다. 13,31-32; 15.8; 17.4 참조.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사도 7.5. 55-56 참조). 12.22 참조. 여기서는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추종을 더욱 명료하게 하기 위해 언급된다. 고별 때 예수와 베드로가 나눈 대화를 상기시킨다. 당시 상황과는 달리 부활한 예수는 이제 베드로에게 추종을 촉구한다. 이 추종은 예수의 운명에까지 동참하는 죽음의 추종이다. 이런 추종 가운데 이루어지는 베드로의 순교가 강조된다. 베드로는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착한 목자”처럼 목숨까지 희생하지만 그것은 “양들”을 위한 죽음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봉사로서의 죽음이다. 바로 여기에도 베드로 사목권의 특성이 시사되어 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양들”을 위해 자유롭게 자신의 목숨을 아버지께 바쳤다(10,14-18 참조).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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