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8 연중 제14주간 금요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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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7-07 | 조회수926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4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6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나는 싱싱한 방백나무 같으니 너희는 나에게서 열매를 얻으리라. -.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 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주해 16절 16ㄱ절(=루카 10.37)은 어록에서 따온 것이다. 16ㄴ절은 일종의 처세술 속담이었는데 마태오가 채록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라니 상반되는 처신을 요구 하는 것 같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인가? 그걸 알면 처세하기 쉽게. 박해를 각오하라 17-25절에서는 박해상을 서술하는데, 이는 예수 생시에 제자들이 당한 박해이기보다 후대에 교회 전도사들과 신도들이 유다인들의 의회와 회당에서 겪은 박해요, 로마제국 총독들과 로마제국 앞잡이 임금들에게서 당한 박해다. 17-22절은 대체로 마르 13,9-13에서 따왔다. 23절은 마태오에만 채록된 고유 요소다. 24-25절은 루카 6.40에도 있으니 어록에서 따왔다.내용을 살펴보면 심한 박해도 받겠지만, 박해중에 네 가지 위로도 받는다는 것이다. 17절 17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들에게서 겪는 박해를 묘사한다. 50년경 유다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에게서 박해를 받았다는 기록이 1데살 2,14에 있다. 여기 “의회”는 회당의 유지 23명으로 구성된 지방의회를 뜻한다. 지방의회에서 유죄판결을 내리면 회당에서 매질을 했다. 법적으로 최고 40대까지 매질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39대까지만 때렸다. 사도 바오로는 유다인 회당에서 39대 매질을 다섯 번이나 맞았다.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의 총독들 또는 로마제국이 임명한 지방 임금들 앞에 끌려가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박해하거나 이방인들이 박해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19절 그리스도인들이 붙잡혀 재판을 받게 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미리 걱정할 것 없다. 성령이 일러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첫 번째 위안이다. 이는 본디 앞뒤 문맥과 상관없이 구전된 단절어였다. 이 단덜어는 두 갈래로 구전되어 오다가 그 중 하나는 어록에 수록되고 또 하나는 마르 13.11에 수록되었다. 마태오는 어록과 마르코를 혼합하여 10.19-20을 엮었다. 베드로, 베드로와 사도들, 스테파노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을 증거했다. 21절 묵시문학계에서는 비판적 사관을 지녀서 종말이 다가올수록 비극이 도를 더한다고 보았다. 일례로 사회조직이 무너진다. 사회조직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비극의 극치다. 22ㄱ절은 절망적 상태다. 마태오는 이 구절을 24.9ㄴ에서도 전재했는데 조금 고쳤다. “여러분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들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는 마르 13.13ㄴ을 고스란히 옮겨쓴 말씀올써,19-20절에 이어 두 번째 위안이다. 여기서 “끝까지”는 종말까지를 뜻할 수도 있겠고 또는 “순교로 죽기까지”를 뜻할 수도 있겠다.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역시 종말 구원을 가리킬 수도 있겠고 또는 순교한 다음의 영생을 가리킬 수도 있겠다. 23절 박해중에 이스라엘 도시들을 순회하는 정도를 마치기 전에 인자가 내림하리라는 예언은 세 번째 위안의 명시된 종말시한어다. 예수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고 하셨으나 종말 도래 시기를 밝히시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종말시한어들은 종말이 가까이 왔다는 종말 임박 신앙을 넘어서 종말이 바싹 다가왔다는 종말 촉박 신앙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말들일 것이다. 곧, 말세사상에 젖은 성급한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말들인 것이다. 곧, 말세사상에 젖은 성급한 그리스도인들이 지어낸 말들이겠다. 이제 23절의 상황을 이렇게 가상하자. 즉,이스라엘에서 유다인 박해자들에게 쫓겨 이 고을 저 고을로 숨어다니면서 몰래 예수님을 선전하던 전도사들에게 위안을 주려고 조금만 더 참아라. 곧 인자이신 예수님이 재림하여 구원에 주실 것이다라는 예언이 떠돌았고 마태오는 그것을 채집하여 23절에 수록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물론 80년경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할 무렵에 이 예언이 맞지 않았다는 것을 받았지만, 예수 전승을 존중해서 그대로 채록한 것 같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에서 옮김 예수님 말씀은 거의가 비유로 되어 있어서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가 봅니다.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다보면 모두가 자기의 말과 행위를 두고 말하는 것을 느낄수 있습니다. 죽 한자한자 읽다보면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는데 우리는 그 말씀에 밑줄을 긋기도 하고 한참을 묵상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저의 목요일 주해글을 읽은 개신교의 권사님이 전화를 걸어서 따지는데 저의 글에 댓글을 다신 박영희님의 글의 뜻이 무어냐며 “왜 박영희님과 짜고서 나를 두고 나무라는 거에요?”라며 화를 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은 2천년전의 글이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과 현재 일어나는 것들과 일어날 일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라고 말을 하였으며 “전혀 박영희님과 저는 서로 짜고서 권사님을 나무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느님 말씀으로서 현재에도 살아계시며 우리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권사님은 헤어지자고 하였으며 게시판의 묵상글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올바로 귀를 기울여 말씀을 듣고 새겨야 하는데 어느 행위가 주관적으로 치우치게 되면 말씀의 뜻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말씀으로 치달으며 하느님 말씀을 들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군사들이 왔을 때 베드로가 칼로 대사제의 종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는데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 귀를 주워서 귀를 고쳐주었다고 합니다. 올바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이는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는 병자입니다, 부디 그 개신교 권사님이 올바른 귀를 갖고 말씀을 들었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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