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 연중 제15주일...독서,복음(주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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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대군 | 작성일2022-07-09 | 조회수810 | 추천수0 | 반대(0) 신고 |
제1독서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0-14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그들 가까이, 곧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 제2독서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주해 그리스도 찬가 이 단락은 본문의 언어와 구조가 색다르다. 저자가 전승에서 물려받아 나름대로 손을 댔을 개연성이 크다. 15절 “그분은 ...이시다”(호스...에스원)은 관계대명사로서 앞에 나온 “그분의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지칭한다. 여기서 “그분”은 곧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드님”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 “모상”은 성서전승에서 특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다. 종교사적으로는 이집트에서 임금을 신성을 지닌 인물로 형성화하기 위해 쓰던 말로 이해된다. 어떤 형상은 곧 그것이 뿌리를 둔 존재 자체를 반영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2고린 4.4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거기서 “모상”은 하느님의 모상을 , 그리스도와 하느님께 대한 관계를 뜻하지만, 여기 15절에서의 모상은 하느님께 대한 관계뿐 아니라 모든 믿는이의 원형으로서의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의 믿는 이들에 대한 관계를 강조한다. 모상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현존은 다름아닌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표현을 요한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눈에 보이는 분으로 인간에게 다가오신다는 뜻이다. 하느님의 계시라는 입장에서의 모상은 요한 1.18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을 계시하는 분으로 등장된다. 본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은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15절은 천지창조의 본래 목적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창세 1,26-27; 9.6에 비추어볼 때 하느님이 인간 창조에서 목표하신 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실현된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창조 본연의 목적에 참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말한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이제 “하느님께 대한 지식”에 대한 표현을 눈여겨 보아야겠다: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모상을 따라 새로워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바오로는 믿은 이들 또한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리라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의 맏이시로다“; 이는 창조신학적 입장에서 특히 지혜문학적 배경을 전제로 해서 보아야 한다. 지혜는 창조세계 중개자로, 하느님의 형상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사고는 필로에게서도 발견된다. ”성서는 고귀하고도 천상적인 지혜를 다양하게 표현해 준다. 이는 지혜가 하느님의 원형. 시작. 바라봄 등으로 불린다. 그러나 여기서 성서는 지혜를 정원의 식물에 대 한 설명을 통해 원형의 모상으로, 세상의 지혜로 묘사한다. 필로는 모세가 자신이 이룩한 공로로 인해 하느님 권능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하느님 권능의 모상이며 ...보이지 않는 자연세계의 보이는 모습이다”. 여기서 하느님 모상에 대한 지혜문학적 측면의 이해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으뜸.맏이”는 직접적으로 하느님과 관련지어 사용된다. 여러 측면에서 우선권을 가진 첫아들을 뜻하는 표현은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발견된다. 이단락에서는 창조와 직결되어 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의미론상 보편적이며 포괄적인 경향을 띠고 있음은 “모든. 온갖” 등을 사용하는 데서 명백히 드러난다.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맏이”은 단순히 시간의 의미에서 “첫째 창조물”을 가리키지 않고 오히려 무엇보다 “신분.서열”을 뜻한다. 이같은 측면에서 “맏이.으뜸.첫째”를 뜻하는 프로토스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 15절의 “맏이”를 16ㄱㅂ절과 17ㄱㄴ절에 나오는 “만물.모든 것”과 견주어 읽으면 더욱 깊이 이해된다. 더 폭넓게 풀어 말하면 15절의 “맏이”는 모든 피조물과 관련되어 창조된 세계 전체 가운데서 “으뜸”이란 뜻이다. 이는 곧 가족관계법에 뿌리박은 “신분, 서열”이란 의미가 새로운 문맥에 들어온 셈이다. 그 때문에 여기서의 창조를 단순히 “출생”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문맥상 그분은 하느님 모상으로서 창조와 관련을 맺게 된다. 우주의 다른 어떤 요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에 의한 창조세계가 주도되고 있음이 이 그리스도 찬가의 특징이다. 여기서의 강조점은 “모든 피조물”에 있다. 즉, “그분”께서 “모든 피조물의 으뜸” 16절 16절 전체의 주요 내용은 첫부분과 끝부분이다. 이 구절 전체를 주도하는 동사는 “창조하다”로서 “그분”과 “만물”과 직결되어 있다.16ㄴㅁ절은 “모든 것”을 더 섬세하게 설명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모든 창조는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으며 특히 그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내용이 이 구절의 골자다. 이러한 내용은 다음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그분을 위해” 등. 이러한 수사의 나열을 통해 그리스도께로의 총체적 움직임이 매우 강조높게 묘사되어 있다. 바로 그 안에서 “맏이.으뜸”의 내용이 무엇인지가 계시된다. “왜냐하면”; 16절을 이끄는 첫 단어로서 15절에서 서술된 내용의 근거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만물”: 여러 차원에서 이를 설명한다. 즉, 먼저 당시 우주관에 바탕한 반명제들을 통해 이어서 같은 낱말을 가지고 권능을 지닌 존재들을 나열하는 가운데 “만물”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이로써 창조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분, 창조의 원동력을 행사하는 분이 누구인지 나아가 창조의 목표는 무엇인지가 계시된다. 곧 창조의 원동력도 창조의 목표도 예수 그리스도임이 명백해진다. “창조하다”; 이 동사는 창조행위를 가리키는 전문용어로서 칠십인역. 특히 시편. 지혜서. 집회서 등에 자주 나온다. 16절에서 수동형으로 두 번 사용되며 두 경우 모두 “만물”이 주어다.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의 존재 이유일 뿐 아니라 창조의 근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창조의 행심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16ㅂ절은 창조세계가 자신의 목적지인 “그분을 위하여, 그분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고 있음을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이로써 그리스도론적인 표현이 극에 달한다. 이러한 우주론적 묘사는 창조세계의 중심이 그리스도임을 드러낸다. 이로써 16ㅂ절은 그리스도의 묘사인지 무엇인지 그 속성을 밝히는 임무를 띠고 있다. 17절 “앞서”; 이 전치사는 단순히 시갅거 차원분 아니라 상황적 측면에서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계시다”; “존재하다”를 뜻하는 동사는 그 뜻을 더 강도높게 표명하는 동사 “존속하다”로 발견된다. 특히 접두사 “함께”와 합성된 동사가 사용됨으로써 “존재하다”라는 앞의 병행구절과 움직임이 같은 내용인데도 더 생동감있게 서술된다. 창조된 만물의 존재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한다. 즉, 창조된 모든 존재 근거는 다른 어느 곳에도 없다. 그것은 다른 어떤 권력 안에서도 발견될 수 없으며 오로지 “그분 안에서”만 발견된다. 이러한 측면은 2,6-8에서 다시 한번 강조된다. 이러한 사상이 이면에는 플라톤의 창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분은 먼저 이 모든 기본요소들을 정돈했다. 그러고 나서 이 모든 것들을 합쳐 하나의 생명체로 만들었다. 그 생명체는 곧 모든 생명체들을 말한다. 죽어 없어지는 것이든 불사불멸하는 것이든간에 나라로 만들었다. 18절 18절 첫마디는 앞선 17절 첫마디와 똑같은 말로 시작된다. 이는 양자 사이에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이로써 ”그분은 만물에 앞서 계시다“는 17절 사상이 여기서도 일관성잇게 지속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18절에는 새로운 의미를 담은 표현과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이는 곧 새로운 주제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교회의“; 바로 앞에 나오는 ”몸의“를 설명하는 부가어로 보아야 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소유격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15절에 나온 ”피조물“이 ”교회“라는 개념으로 대치된다. 18절에서 새로운 주제가 등장한다는 말은 다음 두 차원을 고려할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는 ”교회“가 무엇인지가 전면에 드러난다. 간접적으로는 ”만물“이 무엇인지가 규정된다. 이는 특히 인격적이며 구원론적인 측면에서 조명된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관은 바오로 신학의 기본사상이다. 그의 교회관은 여러 유형의 공동체 모습과 공동체 삶의 다양성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바오로 후에 교회론은 더 구체화된다. 여기서의 특징은 그리스도가 몸인 교회의 머리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8절과 에페 4.15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볼 때 부가적 소유격 ”교회의“는 저자가 이미 주어진 찬가에 덧붙인 표현으로, 본래찬가에서는 ”피조물“에 직결되었던 표현을 ”교회“에 결부시켰다고 본다. 이로써 18ㄱ절은 18ㄴ-20절로 이어지면서 구원론적 내용으로 발전된다. 이로써 그리스도 찬가에 앞서 서술된 내용과도 부드럽게 교회론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며, 구원론적 귀결로 발전한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이시니“; 이 표현은 이곳을 제외하면 신약성서 전체에서 묵시 1.5에만 나온다. 이는 부활을 전제한 표현이다. 바로 그점에서 그리스도는 창조된 모든 것의 ”맏이. 으뜸“위치를 차지한다. 세상 만물의 으뜸 성격을 근거짓는 핵심은 한마디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부활했다는 표현이다. 이는 다시금 ”...위하여“라는 동기와 연결된다. 죽은 이들, 곧 죽음을 능가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능가하는 분임을 표명하는 말이다. ”첫째“; 하느님 모상 또는 ”만물 가운데 첫째“와 같은 묘사는 골로사이서에서 새롭지 않으며 이해하기도 쉽다. 2.10에도 그와 같은 표현이 나온다. ”그분은 하늘의 모든 권력과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그러나 18ㄱ절에서는 누구나 기대할 수 있는 평범한 표현 ”만물의 ...“가 아니라 ”몸의 ...“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새롭고도 놀랍다. 새로운 내용은 ”만물에 앞서“도는 ”만물 가운데 첫재“란 표현으로부터 ”교회의 머리- 교회의 으뜸“이라는 표현으로 발전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머리“라는 은유가 사용됨이 새롭다. 이로써 차조세계와 관련지어 그리스도께 대해 언급되었던 바가 ”교회“에도 전이된다. 이러한 내용상 발전을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겠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에 앞선 존재다. 만물은 그분안에서 존속한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 19절 이 구절은 번역상 난점이 있다. 무엇보다 주어가 무엇인지 가려내는 일이 급선무다. 본문에는 명시되지 않지만 ”하느님“을 주어로 보관할 때 큰 문제는 해결된다. ”충만함“을 주어로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이 경우 전체 의미가 모호해진다. ”그분 안에서“; ”머물다“와 떨어질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 2.9도 이 관점에서 이해할 때 무리가 없겠다. ”충만함“은 어던 결함도 용납될 수 없는 하느님께만 실존 가능한 ”절대적 충만성“, 곧 ”하느님의 온전한 현존“을 가리킨다. 에페 1.23에서의 ”충만함“도 이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바오로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충만함“ 개념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기꺼워하셨으며“; 그리스어 동사 ”기꺼워하다“는 비인칭으로 쓰였지만 ”하느님“을 행위의 주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동사와 직결된 부정법 문장은 20절에서 계속된다. 20절 ”그분을 통하여 모든 것을 말하며 우주론적인 뜻으로 사용된 말이다. “화해시키셨도다”; 원인과 활동 영역의 관계를 드러내는 “그분을 통하여”로써 그리스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여기 쓰인 동사 “화해시키다”는 신약성서 전체에 걸쳐 이 20절과 22절, 에페 2.16에만 나오며 다른 고대 문헌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단순히 윤리적 의미에서의 화해만을 뜻하지 않고 더 근본적인 차원의 화해를 일컫는다. 이는 “총체적 일치”를 목표로 하는 표현으로서 그 본연의 의미는 20절 중반부에 가서 “평화를 이룩하시는 가운데”를 통하여 더 명료해진다. 또한 이 표현에는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스도는 우선적으로 창조의 중심이며 동시에 화해의 중심이다. “십자가의 피”; 희생제물을 일컫는 표현으로서 구약의 번제재물과 상관되는 표현이다. “평화를 이룩하시는 가운데”; 20ㄱ절의 “화해시키다”를 더 선명하게 조명한다. 평화는 하느님과의 티없는 온전한 일치다. 여기서 “이루다, 만들다” 동사는 단순히 무엇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을 전제한 창조행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된다. 이러한 새로운 창조, 곧 화해는 결국 바오로의 가르침에 따를 때 십자가를 통해 성취된다.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내용은 16ㄴ절을, 표현양식은 16ㄹㅁ절을 연상케 한다. 20절 후반부는 화해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20절은 “화해시키다”와 “평화를 이룩하다”라는 표현에서 절정에 달하며 바로 그 시점에서 이 찬가는 막을 내린다. 복음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주해 사랑의 이중계명 루카는 이 단락을 엮을 때 마르 12,28-34를 참고했다. 이에 곁들여 어록도 참고했으리라는 설이 있다. 이 설을 따르는 이들은 루카가 마태오와는 같은 점, 그러면서 마르코와는 다른 점이 많다고 한다.사실 루카와 마태오는 마르코보다 짧고, “들어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가 루카와 마태오에는 없으며, 루카 10.25에는 “율법학자”,“시험하다”,“선생님”따위 같은 낱말이 있다. 루카는 마르코와 어록을 옮겨쓰면서 많이 손질했는데 그 흔적이 25.28절에 뚜렷이 드러난다. 25절 25절에서는 “율법학자(하나)가 그분을 시험하려고”물었다. 마르 12.38에서는 “율사 하나가 ... 예수께서 그들에게 잘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는 다가와서 예수께 물었다”. 마르 12.28에서는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어느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물려받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이는 18.18의 물음과 똑같다. 루카는 영생을 얻는 조건으로 “행함”을 거듭 강조한다(25.28.37절). 27절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 친히 사랑의 이중계명을 말씀하시고 율사는 찬동하면서 그것을 반복한다. 28절 28절은 25절을 문체만 고처 되풀이한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화 이 예화는 루카가 특수사료에서 따온 것이다. 루카는 이웃사랑의 본보기로 이 예화를 여기에 덧붙였다. 그러면서 루카는 29.37절을 가필한 것 같다. 예화의 원형은 30-36절일 것이다. 29절 29절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착한 사마리아 사람 예화를 잇대면서 루카가 덧붙인 연결문 “의로운 체하다”(직역하면 “자신을 의롭게 하다) 동사는 네 복음서 가운데 여기말고 루카 16.15에만 있는데,예수께ㅐ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이렇게 책하셨다 한다. ”여러분이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체하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속을 알고 계십니다. 사실 사람들 가운데서 고상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흉물입니다“,”의로운 체하다“동사와 매우 비슷한 표현이 18.9 ;20.20에도 있다. 30절 본디 여기서부터 사마리아 사람 예화는 시작되었을 것이다. 사실 루카복음에만 수록된 예화나 비유 가운데는 ”(어떤) 사람(즐)“로 시작되는 것이 상당수에 달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는 약 25키로미터. 그 사이는 민가가 없는 사막인 까닭에 예로부터 자주 강도가 나타났다. 32절 ”레위 사람“이란 예수 당시 제관 보조역으로서 제사때 재물을 준비하고 노래를 불렀다. 또한 십일조를 거두어들이고 성전을 경비하는 일도 했다. 제관과 레위 사람이 왜 강도를 만난 동족을 돌보지 않았는지 그 동기를 따질 필요가 없다.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35절 데나리온은 로마 은화. 농촌의 하루 품삯. 36절 예화는 본디 36절의 질문으로 끝맺었을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변은 자명하다. 유다교 성직자들이 아니라 혼혈 이단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다인의 이웃이 되어 주셨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이 예화로서 예수께서는 유다인 청중을 향해 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처신하라고 촉구하신다. 곧, 절실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만자면 민족적,종교적 선입관 따위를 버리고 힘닿는 데까지 보살피라는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든 이 예화야말로 민족적, 종교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유다인 청중에게는 큰 충격을 주고도 남았으리라. 현재의 문맥을 고려한다면, 누가 나의 이웃인가 따질 것이 아니라 내가 불행한 사람의 이웃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37절 37절은 25.28절을 염두에 두고 루카가 내린 결론이다. 영생을 물려받으려면 ”행함“이 있어야 하는 법, 어떤 행함? 사랑의 이중계명을 행할 것이요, 저 사마리아 사람처럼 민족적, 종교적 선입관을 버리고 불행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분도출판사에서 옮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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